•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4권 조선 후기의 사회
  • Ⅰ. 신분제의 이완과 신분의 변동
  • 2. 양반서얼의 통청운동
  • 1) 서얼인구의 증가와 사회참여
  • (1) 서얼의 개념과 신분계층상의 지위

(1) 서얼의 개념과 신분계층상의 지위

 조선시대의 庶孼은 보통 양반의 첩자녀와 그 자손들을 의미하였지만 그 이외에도 士族인 부와 사족이 아닌 모 사이에 출생한 자와 그 자손 모두를 통칭하는 넓은 개념으로 인식되기도 하였다. 또한 첩자손 가운데에는 부계가 향리나 庶族 등 사족이 아닌 경우도 있었고109)≪收養承嫡日記≫(奎章閣圖書 No. 13038), 헌종 9년 9월∼고종 31년 4월. 부계·모계 모두 사족인 경우가 있어서110)≪成宗實錄≫권 117, 성종 11년 5월 갑신.
≪中宗實錄≫권 34, 중종 13년 10월 신사.
서얼을 중간신분이라는 하나의 신분범주로 파악하기는 매우 어렵다.

 서얼은 부계와 모계의 신분등급에 따라 또는 직역에 따라 위로는 양반에 해당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중인·서리와 평민에 속한 사람이 있고 아래로 천인신분인 자도 있었다. 특히 16세기 말과 17세기 전기에 걸친 壬辰·丁酉의 倭亂과 丁卯·丙子의 胡亂을 겪으면서 많은 사족가문에서 가족의 이산으로 처가 있는데도 처를 얻어 중혼관계에 놓이는 사람들이 많게 되었다.111)李鍾日,<朝鮮後期의 嫡庶身分變動에 대하여>(≪韓國史硏究≫65, 1989), 77∼117 쪽. 이 때 선후취처가 모두 사족인 경우 어느 한쪽의 자손이 서얼로 되었기 때문에 그들 양쪽 자손들은 여러 대를 이어가면서 적통을 다투는 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리하여 때로는 선취의 자손이 서얼이 되고 후취의 자손이 적통을 계승하는 일도 있었다.112)李鍾日,<朝鮮後期 士庶族의 身分構造變動에 관한 사례연구>(≪何石金昌洙敎授華甲紀念史學論叢≫, 汎友社, 1992), 392쪽. 또한 조선 후기에는 양자제도의 보편화로 많은 사족가문에서 親生子를 두고 同宗의 侄行에서 입양하는 수가 많았는데 이 때에 양자가 宗系를 계승하면 친생자는 거의 서얼로 취급되어 양쪽 자손간에 적통을 다투는 싸움이 벌어지곤 하였다.113)李鍾日, 앞의 글(1989).

 중국에서는 晋代로부터 唐·元代까지의 법제나 고문서를 통해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복수의 처가 병존할 수 있었으므로 서얼은 신분이 낮은 여자(妾)의 자손만을 의미하였다.114)仁井田陞,≪中國身分法史≫(東京大 出版部, 1942;1983, 復刻版), 353∼366 및 715∼719쪽. 당의 각종 법제를 이어받은 고려 귀족사회에서도 분명히 복수의 처가 병존하였고 서얼은 낮은 신분의 여자 몸에서 출생한 자녀와 그 후손만을 의미하였다.115)李鍾日,<朝鮮前期의 戶口·家族·財産相續制 硏究>(≪國史館論叢≫14, 國史編纂委員會, 1990). 따라서 사족가문의 복수의 처 중에서 한 사람만을 적처로 하고 나머지를 첩으로 하여 그 소생자손을 서얼로 한 것은 조선 초기의 왕실 내부사정과 관련된 왕권확립책과 禮無二嫡이란 유교윤리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116)李鍾日,≪朝鮮時代 庶孼身分變動史硏究≫(東國大 博士學位論文, 1987), 37∼40쪽. 그러나 복수의 처가 모두 사족인 경우는 단순히 선후취만을 기준으로 처·첩을 나누는 것이 그리 간단하지 않아서 恩義의 깊은 정도와 棄別有無·동거여부 등을 기준으로 처와 첩을 나누고자 하였다.117)≪太宗實錄≫권 27, 태종 14년 6월 신유. 그러나 이 역시 문제가 많아서 다시금 사간원에서 명분론에 따라 선·후취를 기준으로 처·첩을 나누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118)≪太宗實錄≫권 33, 태종 17년 2월 경진. 그렇지만 무엇을 기준으로 하였든지간에 처·첩 내지 적·서시비는 끊일 날이 없었으므로 결국 성종은 혼례로 사족의 딸을 취하여 첩으로 삼는 행위를 금지시켜 처첩의 신분을 반상으로 갈라놓아119)≪成宗實錄≫권 141, 성종 13년 5월 경오. 후일분쟁의 소지를 없애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 후에도 양반들은 사족의 딸을 거듭 취하여 중혼관계의 발생과 적서분쟁이 계속되었다.

 그런데 여기서 특기할 것은 宗代가 끝나지 않은 종친인 경우에는 비록 서얼일지라도 법제상으로나 사실상으로 차별받지 않고 청요직을 거쳐서 고위관직에 오를 수 있고 婚閥 또한 좋았다.120)李鍾日,<朝鮮後期의 沒落兩班에 관하여>(≪水邨朴永錫敎授華甲紀念 韓國史學論叢≫, 1992), 930쪽. 그러나 그들도 왕실 내부에서는 천대를 받았다. 즉 惠慶宮 洪氏의≪恨中錄≫에서 “그도 천하나 골육이니 아니 거두지 못하여 거두니라” 하여 思悼世子의 서자인 恩信君 示因과 恩彦君 禛을 천하다고 표기하였다. 비록 민간의 기준으로는 金枝玉葉이라 할 수 있는 고귀한 신분의 왕손이지만 서자라 하여 천하다고 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가문 안에서 차별받는다든지 천하다는 기록만 가지고 그 사람이 천인이라든지 양반이 아니라고 속단하는 것은 옳지 않다. 이는 왕족 이외에도 외척이나 문벌가문을 비롯하여 번화한 서울양반가문과 재야의 儒賢을 위시한 일반사족가문의 경우에도 그대로 유추할 수 있다고 하겠다. 예를 들면 세조의 부마인 鄭顯祖(의숙공주의 夫)의 후취부인 이씨는 공주의 사후에 정식 혼례를 치르고 繼配가 된 사람으로서 신분상으로는 당당한 사족가문의 嫡出女였지만 부당하게 첩으로 논의·결정되어 그 자손은 서얼이 되었다. 그들의 가문 안에서의 처우가 어쨌든 누구도 그들을 양반이 아니라고 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121)≪河東鄭氏族譜≫, 英祖壬辰譜 권 1.
≪中宗實錄≫권 34, 중종 13년 10월 신사.
다른 예로써 조선 말기의 대유학자 華西 李恒老의 경우를 보면, 비록 그가 庶後孫이었지만 아무도 그를 양반의 범주에서 제외시켜야 한다고 하지 않았다. 이항로는 경향 최고의 성리학자로서 고위관료요 교육자였으며, 그의 많은 제자들은 19세기의 관계와 학계를 지배하였다.

 18세기 후기에 이르면 서얼에게도 문과와 생원·진사시 응시가 거의 무제한으로 허용되어 많은 서얼·서족들이 이에 합격하였고,122)前間恭作,<庶孼考>(≪朝鮮學報≫6, 1953), 60∼70쪽.
宋俊浩,<조선시대의 文科에 관한 연구>(프린트본, 1975).
그들 가운데는 중외의 양반관료를 역임하거나 농촌지식인으로서 新班集團의 중심인물이 되는 경우도 있었을 것이다.123)李鍾日,<朝鮮後期의 司馬榜目分析>(≪法史學硏究≫11, 1990).
新班이란 새 양반이라는 뜻으로 19세기 이후 서얼의 별칭으로 널리 사용되었다(黃 玹,≪梅泉野錄≫권 1 上).
조선 중기 이후의 사회는 사림이 지배하였다고는 하지만 역시 양반관료국가로서의 본질은 변하지 않았으므로 일부 학자가 생각하는 것처럼 관권이 그렇게 약하지 않았다. 17세기 사림이 극성한 시기에도 일개지방수령(義城縣令)이 사림의 우두머리인 안동의 陶山書院 院長을 부역문제 등으로 잡아다가 매를 쳐서 죽일 정도로 관권의 위력이 대단하였던 것이다.124)≪仁祖實錄≫권 12, 인조 4년 5월 병오·정미 및 권 13, 인조 4년 윤 6월 병오. 따라서 아무리 서족·서얼출신이라 해도 일단 현령·현감 등 관장이 되면, 嫡系사족인 향촌사회의 化民(士民)들이 신반인 관장을 양반이 아니라고 운운할 수가 없었다고 생각된다. 하물며 적서차대를 완화·철폐하라는 18세기 말과 19세기의 왕명이 있고 난 이후에는 서얼들의 합법적인 陞班운동을 막기 어려웠을 것이다.

 물론 문벌양반가문의 서얼일지라도 그 모계가 천인인 경우에는 속량되지 않는 한 천인신분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러나 고위관료의 천첩자손은 속량된 후 잡과를 거쳐서 전문직 기술관료가 된 사람이 많았을 것이다.125)≪成宗實錄≫권 139, 성종 13년 3월 기묘. 특히 조선 후기 양반들의 천첩자손은 상당수가 속량되어 그 중에서는 吏胥나 軍校가 된 사람도 있었지만 중인에 만족하지 않고 무과에 급제하여 무관이 되어 군공으로 입신출세한 사람도 있었다,126)≪仁祖實錄≫권 32, 인조 14년 5월 정미.
≪正祖實錄≫권 6, 정조 2년 8월 무오.
≪葵史≫, 追錄, 賢人錄.
≪大東奇聞≫권 3, 鄭忠信心喪鰲城三年.
그러나 18세기까지는 서얼들이 비록 문·무과에 급제하여 관료가 되거나, 생원·진사시험에 합격하여 재야유생으로서의 지위를 굳혔더라도 감히 사대부의 반열에 설 것을 주장하지는 못하였다. 그들은 서북지방의 양반이나 영호남의 閑品(품관)과 비슷하였고127)≪正祖實錄≫권 6, 정조 2년 8월 무오. 中人 또는 中庶人이라 통칭되었다.128)李重煥,≪擇里志≫, 總論. 이와 같이 서얼은 위로 양반과 한품인 토반 내지 중인으로부터 아래로 양인과 천인에 이르기까지 모든 신분층에 고루 산재하였다. 그러므로 단선적인 시각에서 그들을 중서인이라는 같은 범주의 신분개념으로 파악할 수는 없다. 다만 중간신분자가 많았음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19세기 후반기로 내려올수록 중간신분자 이상인 서얼·서족 중에서 상당수의 사람이 淸顯의 朝官으로 진출함과 동시에 종묘나 학궁의 제사에도 동참하게 되어 사족과 다름없는 대접을 받게 된 것이라 생각된다.129)李鍾日, 앞의 글(1990b), 41∼42쪽.
≪高宗實錄≫권 22, 고종 22년 6월 9일.
일부 지방에서는 조상에 대한 제사에서의 서얼차대와 서얼의 鄕案入錄 거부 등의 사례가 있었지만, 적계 사족수의 감소와 반비례하여 서족수는 나날이 증가하였으므로 팽창하는 양적인 힘에 의하여 신분구조상의 질적인 변화를 초래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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