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4권 조선 후기의 사회
  • Ⅰ. 신분제의 이완과 신분의 변동
  • 2. 양반서얼의 통청운동
  • 1) 서얼인구의 증가와 사회참여
  • (3) 서얼의 정치·경제적 지위향상과 사회참여

(3) 서얼의 정치·경제적 지위향상과 사회참여

 고려시대의 서얼차대는 어디까지나 중세적인 신분질서의 문란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부계가 사족이라 하더라도 모계가 천인이거나 그 반대인 경우 즉 천계의 혈통이 섞인 자들의 사족집단 편입을 거부하기 위해 「一賤則賤」의 원칙을 확립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152)≪高麗史≫권 85, 志 39, 刑法 2 奴婢. 그러나 조선시대의 서얼차대는 그 외에도 유교적인 「禮無二嫡」의 원칙이 추가되어 부계·모계 모두가 사족일지라도 한 사람의 처 이외의 자손은 서얼로서 차대를 받았다.153)≪太宗實錄≫권 33, 태종 17년 2월 경진. 그러나 조선 개국초부터 처가 있는데 또 처를 들인 경우 선취녀의 자손은 적출사족이고 후취녀의 자손은 서얼이라는 단순한 논리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너무 많았다. 그래서 태종 13년(1413) 3월 11일 이전의 「有妻娶妻」의 경우에는 선후취를 막론하고 嫡妻로 하여 그 자손들이 모두 적계사족이 되도록 하였던 것이다.154)≪世宗實錄≫권 29, 세종 7년 7월 병자.그러나 그 이후 중혼관계에 놓인 자들은 그 어느 한쪽 처의 자손이 서얼이 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여러 처·첩이 모두 사족인 경우, 처와 첩의 분간이 곤란해짐에 따라 그 자손들의 적통을 다투는 분쟁 또한 매우 심각하였으므로 성종은 사족의 딸을 취첩하는 행위를 금지시켰다. 그러나 그 후에도 그러한 사례는 많았고 동시에 적통을 다투는 투쟁 또한 지속되었다.155)李鍾日, 앞의 글(1989), 77∼117쪽.

 그리하여 조선시대의 서얼은 양첩자손이건 천첩자손이건 문과와 생원·진사시의 응시자격이 박탈되어156)≪經國大典≫권 3, 禮典 諸科. 淸顯要의 관직에 나아갈 수 없었다. 요행히 무과에 급제하거나 음직으로 관료가 되더라도 限品의 제한을 받게 되었다.157)≪經國大典≫권 1, 吏典 限品叙用. 또한 일부 서얼은 잡과를 거쳐 기술관이 되거나 중앙과 지방의 잡직 또는 吏胥가 되어 사족양반으로부터 대대로 천시받고 차별받았다.158)≪成宗實錄≫권 139, 성종 13년 3월 기묘.
≪太宗實錄≫권 29, 태종 15년 4월 정해.
桂勝範,<조선후기 丹城地方 陝川李氏家의 職役 실태와 그들의 신분문제>(유인물, 1992).
그외 대부분의 서얼들은 무직상태로서 빈곤과 질병으로 외롭고 괴로운 삶을 이어갈 수밖에 없었다. 가문내에서는 「呼父呼兄」도 못하고 부모의 재산은 주로 적자녀에게 상속되어 서자는 적자의 1/7∼1/10을 상속받는데 불과하였다.159)李鍾日, 앞의 글(1990a), 64∼73쪽. 적자가 없는 경우에는 조선 후기에 이르면 입양제도가 보편화되어 대를 이어 제사를 받드는 양자에게 재산이 주로 상속되었다. 물론 법제상으로는 적출의 후사가 없을 때에는 첩의 아들이 제사를 받들어 모시도록 규정되어 있으나160)≪經國大典≫권 3, 禮典 奉祀.19세기 중엽까지는 그러한 경우는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또한 혼인관계에 있어서도 처음에는 천첩자녀에 한하여 양반과 혼인할 수 없도록 하였으나161)≪世宗實錄≫권 42, 세종 10년 10월 병신. 그 후 많은 천첩이 속량되어 양첩자손과 천첩자손 사이의 구분이 애매하여 지자 결국 대개의 서얼이 양반과 혼인하지 못하는 처지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나 조선 중기 이후 서얼수의 증가와 적서갈등의 심화로 제반 모순이 누적되어 사회불안의 요인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서얼금고의 지속으로 많은 인재가 사장되고 있었으므로 위정자들은 서얼소통을 논의하게 되었다. 그 결과 선조 때 李珥의 주장에 따라 納粟許通法을 만들어162)≪栗谷全書≫下 권 35, 附錄 3, 行狀 및 권 34, 附錄 2, 年譜 下, 계미 11년 4월. 제한된 범위 내에서나마 서얼을 관료로 등용하도록 하였다. 인조 때에는 고위관료들의 찬반토론을 거쳐 限代法을 만들어 서얼자손들의 영구적인 금고를 해제하고자 하였다. 한대법에 의하면, 양첩자손은 손자대부터, 천첩자손들은 증손자대부터 허통하여163)≪仁祖實錄≫권 10, 인조 3년 11월 무오. 문무과에 응시할 수 있도록 하고, 등과 후에는 요직은 허용하되 淸職만은 불허하도록 하였다.164)≪癸史≫권 1, 인조 3년. 그러나 납속허통법에 의하여 혜택을 받는 사람은 일부 부유한 서얼들뿐이었고 등과 후 벼슬길에 진출하는 자는 극소수뿐이었다.

 그리하여 서얼들의 불만과 사회불안은 조금도 해소되지 않았으므로 崔錫鼎등의 건의에 의하여 친서얼인 경우에는 業儒·業武라 호칭하도록 하여 일반 상민과 구별하게 하였다. 또 업유의 아들이나 손자 때부터는 양반과 같은 호칭인 유학을 쓸 수 있도록 하였다.165)≪肅宗實錄≫권 30, 숙종 22년 10월 경진.
≪典錄通考≫, 戶典 戶籍.
동시에 납속허통법을 개정하여 납속이란 전제조건을 삭제, 서얼들이 문무과와 생진시에 응시를 할 수 있도록 하였다.166)≪續大典≫권 3, 禮典 諸科. 그러나 서얼차대 완화를 위한 여러 가지 제도적 장치를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서얼들의 벼슬길은 그렇게 넓지 못하였다. 사회적 차대 또한 조금도 완화되지 못하여 18·19세기의 사회환경과 역사조건의 변화에 따라, 그리고 서얼들의 양적 축적으로 집단적이며 조직적인 소통운동을 전개하였다. 그 결과 위정자들은 서얼들의 벼슬길 확대와 陞班化의 길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고167)≪增補文獻備考≫권 195, 選擧考 12, 銓注 4.
李鍾日,<18·19世紀의 庶孼疏通運動에 대하여>(≪韓國史硏究≫58, 1987), 57∼67쪽.
일부 사족들도 서얼들의 상속상의 지위상승을 인정하게 되었다. 즉 상당수의 가문에서는 적서차대를 어느 정도 완화하여 적자가 없을 경우 종전처럼 양자를 얻어서 대를 잇도록 하지 않고 親生子인 서얼로 적통을 이어(承嫡) 후계를 삼아 재산상속을 시키는 사례가 늘어났다.168)≪收養承嫡日記≫헌종 계묘 3월∼고종 갑오 5월. 「承嫡」이란 18·19세기 무렵에 널리 쓰였던 용어로서, 그것이 바로 嫡出子孫이 된다는 뜻은 아니라는 주장이 일반적이다. 승적을 시키는데는 家廟에서 告由祭를 지내는 관습이 있었다(朝鮮總督府 中樞院,≪民事慣習回答彙集≫1933, 264쪽).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19세기 후기에 이르면, 서얼들이 京職으로는 淸顯의 벼슬도 하게 되고 종묘의 제사에서는 축사의 임무도 맡고 성균관의 제사에서는 헌작의 반열에도 서게 되었다.169)≪高宗實錄≫권 22, 고종 22년 6월 9일.
李鍾日, 앞의 글(1990b), 41∼42쪽.
그러나 이러한 정치·법제적, 그리고 사회·경제적 지위향상에도 불구하고 향촌사회내에서의 거부반응은 여전히 지속되어 곳곳에서 鄕戰이란 이름의 적서싸움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그것은 대개 향촌사회내에서 양반으로 공인받기 위해서는 鄕案 내지 儒案(≪靑衿錄≫)에 이름이 올라야 했는데 기성의 양반(舊班)들의 강력한 저지로 서얼양반(新班)들의 입록이 번번히 실패하자, 실력대결을 하게 된 것이다. 순조 23년(1823)의 庶類유생 1만 명의 상소에서는 이를 「擯斥成風」이라 표현하고 있다.170)≪純祖實錄≫권 26, 순조 23년 7월 신묘.

 향안·유안 등의 입록을 중심으로 일어난 신·구반의 싸움은 19세기 후반에도 완전히 해소되지 않았다. 그러나 일부 서얼들이 이미 18세기 후반에 구반과 함께 향교의 東齋案에 입록되었던 점으로 보아서171)崔允榛,<高敞鄕校 東西齋 儒生案에 대한 檢討>(≪宋俊浩敎授停年紀念論叢≫, 1987), 285쪽. 19세기에는 더욱 많은 서얼들이 이른바 「3所」(향교·서원·향소)의 유안에 등재되었으리라 추정된다.172)李鍾日,<公州鄕校文書解題>(≪朝鮮社會史資料≫2, 公州 下, 國史編纂委員會, 1991), 1364∼1388쪽 참조. 공주향교의 유안에서 그러한 추정을 뒷받침하는 사례를 발견할 수 있다. 18세기 말엽 경기도 노론가문의 서후손 중에서 출생한 華西 李恒老는 19세기 중엽부터 「위정척사학파」라고 불리는 거대한 학파를 형성하기도 하였다. 사방에서 勉菴 崔益鉉을 비롯한 많은 학자들이 모여들었는데, 그들은 鄕儒의 유안 따위에 입록되는 것보다는 화서의 문하로 입록되는 것을 더 영광스럽게 생각할 정도였다. 화서의 문인들이 19세기 후반에 큰 활약을 하였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173)여러대 庶系양반으로 인고의 세월을 보냈던 華西의 父祖 3대도 화서의 대성으로 吏曹參判·吏曹參議·知中樞 등 관직이 추증되었다(≪華西集≫附錄, 神道碑銘幷序).

 요컨대 서얼들의 벼슬길 진출은 일찍이 18세기 후반부터 활발해져 18세기말경인 정조대에 이르면 縣監 元重擧, 校書校理 成大中, 五衛將 吳正根, 縣監丁俱祖, 察訪 李鴻祥, 禮賓寺 參奉 李命圭, 奉常寺 主簿 崔粹翁, 承文院 檢校 金洪連, 司䆃寺 直長 南鳳秀, 東部 都事 李可運, 檢書官 朴齊家·柳得恭·李德懋 등 30명이나 되었다.174)≪葵史≫권 2, 정조 20년∼24년. 그들은 청현직이나 고위직의 취임이 불가능하였고 평생 동안 중하위직에 머물렀으나 다음 시대를 여는 데 큰 몫을 하였다. 결국 19세기 중엽에 이르면 庶孼通淸運動에 앞장선 서얼관료 출신자 중 正言·持平·掌令 등 청현직을 지내는 경우도 나타나게 되었다. 더구나 19세기 말엽이 되면 李祖淵·李範晋·金嘉鎭·閔致憲·閔商鎬·閔泳綺·李允用·尹雄烈·安駉壽·金永準 등 청현직을 거쳐서 대관에 이른 자가 많았다. 그 외에 金玉之班은 일일이 다 손꼽을 수 없을 정도였고 서얼이 조관의 5분이 3이 될 정도였으며, 특히 노론계의 서얼 중에는 淸宦·達官이 별처럼 많았다고 한다.175)黃 玹,≪梅泉野錄≫권 1 上.

 서얼들이 이와 같이 공경대부의 자리를 많이 차지하게 되자 여러 가문에서 서얼들을 「承嫡」시켜서 후사로 삼았다. 承嫡人이 바로 적자가 되는 것은 아니었지만176)法院行政處,≪親族相續에 관한 舊慣習≫(1985), 209쪽. 법제상의 지위로 보나 경제상의 실력으로 보아서 적서간에 차별이 거의 해소되었다. 또 서얼들에 대한 재산상속분을 확대하여 적서간의 차이가 2:1 정도로 좁아졌다.177)朝鮮總督府 中樞院,≪民事慣習回答彙集≫(1933), 131∼141쪽·180쪽. 재산 상속상으로 적서차대가 완화되는 반면 남녀차대의 역작용이 나타나 딸의 상속분은 매우 작아지거나 없어졌다. 또한 19세기 후반에 이르면 「以妾爲妻」 내지 「以庶爲嫡」의 관행도 생겨서178)朝鮮總督府 中樞院, 위의 책, 285∼288쪽·292∼293쪽. 비록 1916년에 조사된 것이나 19세기 후기 이래의 관습으로 보인다. 사족사회 안에서의 적서의 구분이 매우 어렵게 되었다. 물론 그시기에도 적서차대가 완전히 해소인 것은 아니었고 사회의식 속에 남아 있어서 서얼들은 벼슬을 하여도 일부지방에서는 향안입록이 거부되고 있었다.179)宋俊浩<身分制를 통해서 된 朝鮮後期社會의 性格의 一面>(≪歷史學報≫133, 1992). 그러나 19세기 중엽 이후는 농촌중심의 생활보다는 도시중심의 광역생활로 삶의 모습이 바뀌어 가고 있었으므로 특정지역의 사족모임인 향안입록이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뿐만 아니라 19세기의 향안 속에는 서계자손들이 참여하고 있는 곳도 있었다.180)崔允榛, 앞의 글, 285쪽.
李鍾日, 앞의 글(1991), 1364∼1388쪽.
그렇지 않은 경우에도 新班인 서얼들은 구사족과 대등한 입장에서 향전을 벌였고 나아가서는 농민들을 조직하여 이른바 농민전쟁을 수행하였던 것이다. 즉 동학교주 崔濟愚를 비롯하여 고종 8년(1871) 영해 동학운동의 주체세력과 갑오동학농민전쟁의 주체세력들 중에 서얼이 많았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181)金泳模,<開港과 한국사회신분의 변동>(≪한국근대사의 再照明≫, 서울大 出版部, 1982), 83쪽.
張泳敏,<1871년 영해동학란>(≪한국학보≫47, 1987), 108∼126쪽.
―――,<1840年 영해향전과 그 배경 小考>(≪忠南史學≫2, 1987), 49∼86쪽.
愼鏞廈,<동학과 갑오농민전쟁의 민족주의>(≪韓國學報≫47, 1987), 51∼5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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