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4권 조선 후기의 사회
  • Ⅰ. 신분제의 이완과 신분의 변동
  • 3. 중간신분층의 향상과 분화
  • 1) 중인층의 지위상승과 분화
  • (3) 부민층의 신분변화

(3) 부민층의 신분변화

 조선 후기에는 각 시기에 따라 농업과 상공업이 상당한 정도로 진전되었다. 17세기부터 18세기까지는 충청 이북지방에 모내기농법이 보급되고 공동노동 조직인 「두레」가 활성화되었다. 모내기법은 이전의 直播法에 비해 김매는 노동력을 5분의 4나 감소시킴에 따라 廣作도 가능하게 하였다.294)李海濬,<17·18세기 향촌사회질서의 변화와 촌락기반>(≪제19회 동양학학술회의강연초≫, 단국대 동양학연구소, 1989), 46쪽. 최근 경제지리학연구에서는 조선 후기부터 말기까지 주거지가 저지대에서 고지대로 확산되어 갔고, 旱田法의 혁신은 이에 기여하였다고 한다.295)유제헌, Institutionalization and Cultural Adaptation on the Honam Plain of South Korea, 1789∼1982. PH.D. Dissertation, Univ. of Texas at Austin, 1987. 鄭勝謨,<향촌사회 지배세력의 형성과 조직화과정>(≪제19회 동양학학술회의강연초≫, 1989), 59쪽에서 재인용. 이 시기에 상업작물의 발달도 이와 같은 추세와 연관시켜 볼 수도 있다. 이러한 산업의 발달은 상당한 부력을 축적하고 그에 상응하는 사회적 지위의 상승을 희구하는 다수의 부농과 상공인을 파생시켰다. 조선 후기사회가 변화하는 가운데 중인층의 신분변동은 이중적 계기에296)金容燮,<朝鮮後期에 있어서의 身分制의 動搖와 農地占有>(≪史學硏究≫15, 1963;≪朝鮮後期農業史硏究≫Ⅰ, 一潮閣, 1970). 의한 동태변화를 추적해야 한다. 하나는 봉건체제의 위기에 처한 봉건지배층이 그에 대한 대책으로서 어쩔 수 없이 취하게 되는 사회정책의 한 소산이었고, 다른 것은 역사발전에 따르는 백성의 내재적 성장으로 기대되는 봉건제의 붕괴현상이었다. 곧 앞의 경우는 봉건적 국가권력 자체가 주동이 되어 신분제를 이완시키는 경우였다. 有功者·納粟受職·庶孼許通·校生免講·奴婢從母法·奴婢貢革罷 등의 정책을 통해 지배체제 유지를 위한 여러 시혜책을 마련함으로써 봉쇄적 신분체제에 미치는 위기를 축소시켰다. 그리하여 각 계층의 의식성장에 따르는 지배신분으로의 욕구를 흡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래에서는 영·정조대에 일어난 자연재해와 국가의 재정궁핍에 직면하여 이를 해결하고자 했던 納粟制度의 실시와 이를 기회로 신분향상을 기도했던納粟富民層의 실태를 중심으로 중인층의 신분변동을 살펴보기로 한다.297)徐漢敎,<英·正祖代 納粟制度의 實施와 納粟富民層의 存在>(≪朝鮮史硏究≫1, 伏賢朝鮮史硏究會, 1992), 289∼353쪽. 이하 서술은 위의 글에서 많이 참고하였다.

 이 시기에는 주로 賑資확보와 각종 산성의 보수 등에 따른 재정보충을 위하여 空名帖의 발매와 富民勸分 논상제도가 실시되었다. 勸分이란 곧 부유하여 베풀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을 권해서, 私穀을 내어 궁민을 그 능력에 따라 구제하는 것으로298)≪備邊司謄錄≫79책, 영조 2년 3월 11일. 부민들이 동원되었다. 영조 때 제정된 論賞別單에는 1,000석 이상 납속하면 실직을 제수하고, 500석 이상이면 賞加 100석 이상이면 散職帖, 50석 이상이면 納粟通政帖, 10석 이상이면 3년간 烟役이 면제되었다. 그러나 납속제도의 운영에서 공명첩의 남발과 수령의 늑탈 폐해가 커지자, 영조 21년(1745)부터는 큰 진휼이 필요한 때 이외에는 시행을 제한토록 하였다. 이러한 노력은≪속대전≫과≪대전통편≫에서 법제화되어 시행되었다. 영조·정조대의 납속인들은 경제적으로 부유한 부민층으로 여러 신분층을 포함하고 있었다. 이 시기에 납속의 주 대상은 富民·饒戶층이었다. 각 도에서 올린 부민논상별단에서 확인되는 432명의 부민들을 신분별로 분류해 보면, 전·현임 조관이 9%, 사족층이 15%, 중인층이 73%, 양인층이 3% 정도로서 반상의 중간인 중인층이 부민납속의 핵심계층임이 확인된다. 따라서 당시 부민 원납인의 핵심층은 새롭게 양반층으로 신분상승을 노리고 사회경제적으로 지위향상을 갈구한 중인층이었다. 전임관 중에는 오위장·첨사·순장이 많았는데 이들은 대부분 장교출신으로 1,000석 이상을 거듭 원납하여 무관직을 두루 역임하면서, 중인에서 양반으로의 신분상승과 관계진출을 꾀한 가장 역동적인 부민층이었다. 납속자 중에 유학은 13%로서 상당한 비중이었다. 그 중에는 1,000석 이상을 바쳐 오위장을 받은 자도 있고, 100석 미만을 바치고 연역면제를 받은 유학도 58%나 되었다. 유학은 18세기 후반 이전에는 양반층이었으나, 그 후 중인·양인은 물론, 천인까지도 경제적 여유가 있으면 장적상 유학을 직역으로 기록할 수 있는 분위기였다. 또한 향리·서얼도 18세기에는 유학을 칭하도록 허용되었다.299)崔承熙,<朝鮮後期 幼學·學生의 身分史的 意味>(≪國史館論叢≫1, 國史編纂委員會, 1989), 94∼113쪽. 위에서 연역을 면제받는 유학은 양인층에서 납속이나 모칭 등의 방법으로 유학이 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중간계층에 속할 수 있는 납속부민에는 여러 층이 있었다. 지금까지의 연구로 閑良·鄕品·閑散·鄕人·業武·業儒 등은 반상의 중간층인 중인이다.300)李俊九,<朝鮮後期 兩班身分 移動에 관한 硏究-丹城帳籍을 中心으로->(上·下) (≪歷史學報≫96·97, 1982). 신분상승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처음에는 군관직을 얻고 다음에는 유학과 대등한 신분을 얻고, 마지막에는 직접 유학을 얻는 것을 주 목표로 진행하였다고한다. 당시 정부에서 정권유지를 위하여 군조직 등을 재편하고 강화하는 가운데 군관직 등 신분직역은 향촌사회에서 유학신분을 공인받는 것보다 쉬웠다. 지방관청에서는 재정난 타개의 한 방법으로 군관의 정원을 늘렸으므로 군관직은 무예를 익힌 상민층의 ‘拔身之計’로 이용되기에 이르렀다.301)≪備邊司謄錄≫140책, 영조 37년 7월 27일 掌令 申近所懷. 말단지배층인 중인은 양반보다 토지소유 경제력면에서 월등히 우세하였고, 평민층 중에도 부농이 적지 않았다. 그리하여 17∼18세기에는 군관직 취득이 신분변동의 한 통로가 되고 있었다.302)大邱府 租岩面의 경우 호적과 量案을 분석해 보면 숙종 13년(1687)에 양반 상층에 해당하는 A류가 5%, 中人에 해당할 軍官 등 양반 B류가 30.55%였던 것이 정조 7년(1783)에는 38.2%, 48.7%였다. 지배층이 차지하는 비중이 약 1세기 사이에 35%에서 87% 이상 되게 빠른 속도로 신분구성이 변화하고 있었다. 신분변동이 시작되는 시기는 숙종 40년에서 영조 14년(1738) 사이로 이 기간에는 영조 4년에 戊申亂(李麟佐亂)이 발생하였다. 중인에 해당하는 말단 지배층에는 軍官·業武가 많았다. 이렇게 신분직역을 상승시키고 호적에 올리는 데는 많은 자금(뇌물)을 써야 했을 것이다(金容燮,<朝鮮後期 身分構成의 變動과 農地所有>,≪東方學志≫82, 1993, 69∼72쪽). 향품은 향임을 맡을 수 있는 향반 내지 양반 상층으로 전라도지방에 많았다. 다음으로 資憲·嘉善·通政·折衝·僉知 등의 품계를 가진 사람들이 있었다.

 위에서 중인층에 속하는 한량·향품과, 절충·가선의 품계를 지닌 사람은 전체의 3분의 2를 차지할 정도로 정부의 권분 모속에 가장 적극적으로 참여한 계층이었다. 이들은 50대의 연령으로 그들의 경제력을 이용하여 수령과 결탁하여 이 시기에 가장 능동적으로 사회신분의 지위향상을 꾀한 신분이었다. 넓게 보면 부민납속제에 적극 참여한 계층은 양인 상층 내지 중인층으로 일차적인 목표는 자신과 자손의 면역을 받는 것이었다. 그들이 주로 이용한 방법은 납속으로 얻은 품계를 호적에 모록하거나 유학으로 모칭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실질적으로 별 의미가 없게 되자 그들의 일부는 수령의 보호 아래 있던 軍任이나 面任·향임권을 장악하고 향촌사회에서의 권력구조를 재편해 나갔다. 영조 때 부민들이 면·향임에 진출하고자 한 것은 우선 일족의 면역을 위한 것이지만303)≪備邊司謄錄≫152책, 영조 44년 9월 24일. 처음에는 면임을 맡고 마침내 향임을 맡으며 다시 유학서적을 읽어 한·두 세대가 지난 후, 궁극에 가서는 향반으로 상승하기 위한 것이었다.304)徐漢敎, 앞의 글, 334쪽. 새로운 향임층은 기존의 재지사족과 구분하여 鄕曲品官, 鄕族이라 불리면서 鄕戰을 격화시키기도 하였다.305)≪正祖實錄≫권 30, 정조 14년 4월 병인.
수령에 의한 賣鄕은 당시 관서지방이 가장 심하였는데, 그 중에서 이 해에 정주목사 吳大益이 補民庫의 재정확보를 위해 매향한 사건이 가장 큰 규모였다(徐漢敎, 위의 글, 333쪽).
그러나 그들은 기존의 신분구조를 철폐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하였다. 지금까지의 신분직역제에 관한 연구에서 분명히 드러난 사실은 납속공명첩이 보장하는 사회적 지위는 발급받은 당사자 1대에 한하고 자손에게는 아무런 보장도 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신분변동이 임란 이후 일어났다는 설은 이와 같이 그 주된 근거가 허물어지고 있는 만큼 더 이상 고려될 필요가 없을 것이라고 못박고 있다.306)李泰鎭 등,≪韓國社會發展史論≫(一潮閣, 1992), 183쪽. 부민층은 끊임없는 정부나 수령의 수탈대상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한계를 지님으로써 19세기 民亂의 주도계층이 되기도 하였다.

 당시 발달한 국내상업과 대외무역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한 상인층의 정치·사회적 진출 또한 볼 만하였다. 함경도나 강계·개성상인들은 원거리 진출에서 획득한 막대한 부를 바탕으로 유통뿐 아니라 생산영역에까지 나아갔다.307)북한 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김옥균≫(북한 사회과학원출판사, 1964;역사비평사 재편집, 1990, 33∼37쪽).
한국역사연구회,≪조선정치사 1800∼63≫(청년사, 1990), 266쪽.
이 과정에서 축적된 부를 바탕으로 巨商들의 관직진출도 나타났다. 순조 10년(1810)경에 홍삼무역권을 독점할 정도로 막강한 경제력을 가졌던 林尙沃은 순조 34년 서북지방에 큰 수재가 났을 때 수재민들을 구휼한 공로로 龜城府使에 임명되었다. 헌종 13년(1847) 전라도 光陽현감은 부유한 상인들을 公廳에 끌어들이고 읍정을 논의하여 물의를 일으키기도 하였다.308)≪日省錄≫179책, 헌종 13년 11월 26일. 이것은 당시 막대한 부를 축적한 상인층과 권력집단의 연결관계를 보여주는 것으로 상인층의 성장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였다. 그 밖에 李禧著를 비롯한 서북상인들이 평안도농민전쟁에 대거 참가한 것은 우리 나라 역사상 일찍이 없던 일로서, 상인층이 상승되어 간 정치지향을 획기적으로 드러내었다. 황해도 谷山에서는 순조 11년 일반인들이 민란을 일으켰을 때, 경제적 부의 축적을 방해하던 수령에게 불만을 갖고 富商大賈들이 폭동을 배후에서 부추겼다.309)≪承政院日記≫200책, 순조 11년 5월 6일.
홍희유 외,≪봉건지배계급에 반대한 농민들의 투쟁≫이조편, 51∼126쪽,
상인집단이던 金守溫은 쇠가죽·홍삼 등 대외무역에 종사하다가 실패하자 水賊集團으로 변신하여 서울도성에 방화를 기도하며 변란을 꾀하다 순조 29년에 처형되었다.310)≪純祖實錄≫권 30, 순조 29년 11월 기해.
≪推案及鞫案≫285책, 己丑推案 2.
이런 사건들은 이 시기의 상인들이 정치지향의 차원을 넘어서 변혁을 지향했던 사실을 일부나마 보여주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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