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4권 조선 후기의 사회
  • Ⅰ. 신분제의 이완과 신분의 변동
  • 3. 중간신분층의 향상과 분화
  • 2) 중인의 통청운동
  • (1) 통청운동의 발기

(1) 통청운동의 발기

 조선 후기에 전개되었던 중인들의 신분상승운동은 서로 연계하여 상승작용을 하였다. 이들을 각 부류별로 보면, 서얼들은 주로 정치운동 성격의 通淸運動, 이서층은 문화운동 측면인 委巷文學運動을 맡고, 전문직 중인들은 경제적 싱승운동에서 주역을 맡았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대한 정부당국자의 대응은 서얼의 통청운동과 기술직 중인의 경제활동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반면, 이서층인 경아전 중심의 위항문학운동에 대해서는 긍정적이었다. 앞의 두 운동이 명분 해이에 의한 체제 위험요소나 지하경제의 비대화로 인한 비정상화 등으로 파악된 반면, 문학운동은 조선왕조의 정책방향과 부합하고 중인층의 사회운동을 다른 방향으로 유도할 수 있다는 인식에 따른 것이었다. 오히려 양식있는 사대부들은 문화의 저변확산이라는 면에서 적극적으로 후원하였다. 이러한 중인들의 신분상승운동은 17세기에 단초를 열고, 18세기에 본격화되며, 19세기에 대세화되어 사대부 중심의 조선사회를 압도하게 되는 추세였다.311)정옥자,≪조선후기 역사의 이해≫(一志社, 1993), 143·168쪽.

 위와 같은 학계의 이해경향에 비추어 본다면 19세기 중반에 대규모로 일어났던 기술직 중인들의 통청운동은 약간 예외적인 것으로 주목을 받게 된다. 영조가 즉위하면서 기대를 걸고 일어난 서얼들의 통청운동은 정조가 원년(1777)에<丁酉節目>을 반포하자. 비로소 실마리가 풀렸다. 이 결단으로 규장각 검서관에 李德懋·柳得恭·朴齊家·徐理修 4명의 서얼이 등용되었다. 19세기에 이르면 이 문제는 더욱 표면화되어 순조 23년(1823) 7월에는 경기 등 6도 유생 9,996명이 상소를 올려 재연되었다. 그들은 權貴庶孼들의 후원으로 수만냥의 자금을 마련하고, 수만 명을 끌어들여 疏廳을 설치하고 사회문제로 부각시켰다. 조정의 의견이 모아져서 같은 해 11월에<癸未節目>이 나왔으나 제도상의 규정에 불과하였다. 순조 27년에 다시 허통의 실현을 촉구하였고, 철종 2년(1851) 4월 15일에는 서얼을 허통하여 벼슬에 채용하도록 각별한 관심을 가지는 조치가 내려졌다.312)≪哲宗實錄≫권 3, 철종 2년 4월 신미.
鄭玉子,<朝鮮後期의 技術職中人>(≪震檀學報≫61, 1986), 56쪽 이하. 이후 통청운동부분 서술은 이 글과 韓永愚의 연구 참조.

 여기에 크게 충격을 받은 중인들은 위의 사건 10일 후인 4월 25일 통례원에 모여 통문을 만들었다.313)韓永愚, 앞의 글, 67∼72쪽.
―――,<朝鮮時代 中人의 身分·階級的 性格>(≪韓國文化≫9, 1988), 191∼199쪽. 하버드 燕京圖書館(Yenching Library)소장 필사본≪象院科榜≫에는 앞머리에 철종 2년의 기술직 통청운동자료가 있고, 연산군 4년부터 고종 17년까지 역과합격자 명단이 있다. 이 운동에 관여했던 인사가 개인적으로 자료를 수집하여 역과방목 앞에 수록한 듯하다. 통청자료는 다음 9개의 문서가 포함되어 있다. ① 辛亥四月二十五日通禮院發通 ② 辛亥五月初二日圖畵署一會時各處有司 ③ 五月初四日金知士相淳第一會時 ④ 七月十三日秦知士膺煥第一會時 ⑤ 辛亥閏八月十八日景陵幸行時上言草 ⑤ 輿誦 ⑦ 失名氏書 ⑧ 辛亥擬疏草 ⑨ 雜攷
내용의 대강은 “中庶의 막힘은 조선의 편벽된 일로 몇 백 년이 되었다. 庶族은 조정이 성덕을 입어 문관은 槐院(承文院), 무관은 宣傳官에 임용되고 있는데 중인은 함께 은혜를 입지 못하니 탄식이 없겠는가. 원통함을 호소하고자 이 달 29일 麻洞 洪顯普의 집에 모여 상의하고자 한다”는 것이었다. 끝에는 역관 方孝善 이하 45명이 연서했던 것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다음날에는 檢漏官 崔壽敏 등 17명이 첨가되었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