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4권 조선 후기의 사회
  • Ⅰ. 신분제의 이완과 신분의 변동
  • 3. 중간신분층의 향상과 분화
  • 2) 중인의 통청운동
  • (2) 통청운동의 전개

(2) 통청운동의 전개

 기술직 중인들은 5월 2일에는 도화서에 모여 11개 관청에서 사무를 맡을47명의 대표를 정했다. 참여한 관청은 通禮院·觀象監·司譯院·典醫監·惠民署·律學·籌學·圖畵署·內醫院·寫字廳·檢漏廳이었다. 方禹度를 총책임자로 하고 別有司에는 玄鎰·卞亨植과, 斐然詩社를 통해 문학활동을 했던 율관 출신 張之琬 등이 임명되었다. 4일에는 새로운 총책임자를 전의감소속 方允中으로 하고, 製述책임자로 역관계통의 玄鎰·鄭芝潤(鄭壽銅)과 율관 장지완 등이 임명되었다. 전날 모임이 발기인대회였다면, 이번은 상소문 작성을 위한 실무자 모임이었다.

 그런데 중인통청운동이 한창 조직을 늘려가던 5월, 상소문을 맡은 崔必聞·張之琬 등 3명의 집에 거사계획을 격려하고 충고하는 이름없는(失名氏) 투서가 들어왔다. 편지는 중인차별이 300년간 계속되었고, 순조 23년의 서얼허통 때도 중인 사이에 허통운동이 있었으나 실패하였으니 이번에는 실패하지 않도록 적극적이고 신중히 처리하라는 내용이었다. 특히 중인들은 패배주의를 극복하고, 문과합격자는 승문원에, 무과는 선전관청에 등용되는 것을 추구하되 다음의 운동방법을 택하도록 제시하였다. ① 가을에 임금의 행차 때에 상소하고 후에 伏閤한다면 연기하려는 자가 생기기 쉬우니 복합을 먼저 하는 것이 타당하다, ② 중인관청에서 모금하는 것으로는 경비가 부족할 것이니 부유한 사람의 헌금을 받을 것, ③ 일을 도모함에는 지략이 있어야 하니 노성하고 경륜있는 사람을 뽑아 지휘를 받을 것, ④ 복합 때는 의관을 단정히 할 것, ⑤ 복합 때 疏章은 유학을 뽑아 바치게 할 것, 끝으로 ⑥ 중인자제들이 투전과 주색으로 소일하지 말고, 經史의 학문에 힘쓰게 하여 인재를 길러야 통청문제가 스스로 해결될 수 있다는 점 등을 제시하였다. 투서에서는 일이 중도에 좌절될 것을 우려하여 8월 18일 이전에 복합상소부터 올려야 할 것을 주장하였다. 일을 맡은 사람들이 현직에 있으므로 일의 형편을 보아가며 온건하게 추진하려는 반면, 한편에서는 이를 비판하며 빠른 해결을 촉구하는 재야세력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7월 13일에는 총책임자가 최필문으로 바뀌고,書寫를 맡을 사람을 뽑고, 거사자금을 각 기관에 할당하였다. 이를 보면 다음과 같다.

통례원(鴻臚) 105명 10兩
관상감(雲監) 246 24
사역원(譯院) 435 40
전의감(醫監) 210 20
혜민서(惠署) 266 20
내의원(藥院) ? 30
형 조(律學) 85 20
호 조(算學) 176 20
도화서(圖書) 79 20
사자청(寫廳) 53 20
검루청(漏局) 15 10
1,670+?명 234兩

 위에서 보면 기술직 참여자 1,670명 중에 의·역관계 관원이 911명 이상으로 통청운동에서 인원과 모금 양쪽 다 과반수를 차지한 듯한데 실제로는 중인독지가의 모금도 한 몫을 차지했을 것으로 보인다. 위와 같이 준비를 거쳐 윤8월 18일 철종이 景陵에 행차하는 길에 올리려 만들어진 상소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저희들이 諸學을 世業하여 地處가 비록 낮고 미천하나 본래는 國初 이래 구별, 界限된 자들이 아니고, 재능에 따라 수용한다는 것이 옛 상식이었습니다.≪大典通編≫에도 醫·譯·律·曆 등에 정통한 자는 京外顯官을 啓受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 문헌을 훑어보면 한 구절도 枳塞한다는 글귀가 없는 것입니다. 인조반정 이후 醫譯은 그 업을 세습하게 되고 비로소 中人의 명칭이 생겼습니다(≪象院科榜≫, 辛亥閏八月十八日 景陵幸行時上言草).

 곧 중인의 顯官채용이 막힌 것은 제도가 아니고 관습에 의한 것으로, 그 시기는 인조반정 이후 직업이 세습되면서 중인이라는 칭호를 얻고, 士夫와 다르게 차별대우를 받게 되었다고 주장하였다. 이 상소문은 유학 金光洙 등 1,872명의 이름이 연서되어 있어 그 참여규모를 알 수 있다. 또한 투서에서 요청한대로 중인 가운데 경사를 공부하는 유학을 대표로 내세워 시대적인 요청에 따라 중인을 청현직에 올려줄 것을 당당히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당시의 연대기에는 위의 기록이 실려 있지 않은 점으로 보아 저지되거나 묵살된 것으로 보인다. 다만≪실록≫에는 철종 2년(1851) 8월 18일 왕이 경릉(헌종릉)과 健元陵(태조릉)으로 친히 제사를 올리려 행차하였던 사실을 적고 있다.314)≪哲宗實錄≫권 3, 철종 2년 윤 8월 신축. 이후 이들의 활동은 침체하여 같은 해에 상소하려고 다시 꾸민 모의상소문으로 辛亥擬疏草만315)이것은 윤8월 18일자 上言草와 비교하여 논지가 휠씬 부드러우나 별 차이가 없다. 여기에는 자신들의 족보에 보아도 10대 이상은 淸顯에 오른 이가 많아 본래는 士族이었다고 주장하였다. 정조 때 차별철폐교지가 있었지만, 문과에 합격하면 교서관(外館), 무과에 합격하면 수문청(守部) 이상으로 출세가 허용되지 않는 현실을 한탄하였다. 文槐·武宣과 詞訟(수령)직을 요구하며 그쳤다. 남게 된 상황으로 보아, 이들의 통청운동은 제동이 걸렸거나 실패한 것으로 보인다. 西洲散人이라고 자처하던 한 기술직 중인인사는 순조 23년 이후 中庶가 이미 通望되지 않고 있으니 지금은 존망의 때라고 규정하고, 중인계층 인사들에게 개인의 이해를 초월하여 적극 일을 촉구할 것을 각성시키기도 하였다.316)≪象院科榜≫, 輿誦條 評說. 그러나 19세기 중반에 와서 경제력과 문화적 역량의 향상으로 모처럼 힘을 결집하여 일어났던 기술직 중인들의 통청운동은 열매를 맺지 못하였다. 당시 서얼들의 통청운동이 성공한 데 비하여 결과적으로 기술직 중인들의 통청운동이 좌절된 원인은 다음과 같이 지적할 수 있겠다.

 첫째, 조선 후기에 嫡子보다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던 서얼 중에서도 권귀시얼들의 상승운동은 자금·조직과 정치적 배경 등에서 무시할 수 없을 만큼 강성하였으므로, 조정에서는 정치적 배려로서 그들을 무마하기 위하여 통청을 허용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기술직 중인은 특수신분층으로 구성되어 나름대로의 구실과 안정을 이루고 있었다.

 둘째, 중앙 전문직 중인층 자체내의 무사안일주의 때문이었다. 세습된 전문기술을 습득하여 자부심을 갖고, 관료체계내에 한 부분을 이루어 분수를 지키려는 풍조가 있어, 이것이 체제를 탈피하려는 과격성을 감소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이런 데서 재야인사가 건의한 복합상소는 실현되지 못하였고, 철종이 경릉에 행차하던 날 상언조차 실현되었다는 확증이 없다.317)鄭玉子, 앞의 글(1986), 63쪽. 정가의 압력을 받았거나 자제한318)김필동, 앞의 글, 251쪽. 것으로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중인들은 운동이 실패할 것을 우려해서 자제할 만큼, 현실적으로 누리고 있던 특권이나 이익 또한 적지 않게 가지고 있었다는 반증이 된다. 또한 중인들이 생활화하고 있던 행동양식 자체에 결코 무리를 범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었다. 한편 중인계급의 역할과 문화에서 중인들의 이중성을 지적하는 학자도 있다. 그들은 실무에 대한 지식과 기술을 갖추었으며, 경제력과 권력을 소지하여 재산에서는 양반을 능가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신분적으로는 양반 밑에서 견제와 억압을 받고, 일상업무에서는 늘 양반관료들의 명령을 받아 시행했고, 시행착오가 있을 경우에는 양반과 달리 가차없는 처벌을 받았다. 그들은 언제나 양반계급에 불만을 품고 대항하여야만 하는 사회적 성격을 갖고, 지배엘리트인 양반계급에 대항하는 대항엘리트(counter-elite)였다.319)송 복, 앞의 글, 492쪽. 이러한 양반과의 미묘한 위치에서 그들의 신분상승운동은 말 못할 내적인 갈등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그 동안 기술직 중인들의 상승운동은 주로 경제적 분야에서 주축을 이루어 왔고 정치적 분야에서는 17세기 숙종대에 개인적 차원에서 정변에 관여했으나,320)金良洙, 앞의 책, 103·142∼143쪽 참조.
鄭奭鍾,≪朝鮮後期 社會變動硏究≫(一潮閣, 1983).
정치적 권리를 얻지는 못하였다. 19세기 중반에 중인통청운동 또한 비록 중도에 좌절되기는 하였으나 시도만으로도 상당한 효과를 올렸다고 볼 수 있다. 계획이 주도면밀하고, 참가인원이 대규모였으며, 이후 그들이 단합하고 결속하는 계기가 마련되어 다음 시대의 주인공으로 성장하는 과정이 되었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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