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4권 조선 후기의 사회
  • Ⅰ. 신분제의 이완과 신분의 변동
  • 3. 중간신분층의 향상과 분화
  • 3) 향리층의 지위상승과 분화
  • (1) 향리층의 분화

(1) 향리층의 분화

 향리층의 분화와 그에 따른 신분지위 상승운동의 전체적인 모습은 특히 18세기 말 19세기 전반기 향리층의 동향을 담고 있는≪掾曹龜鑑≫에 잘 드러나 있다.321)≪掾曹龜鑑≫은 향리의 사적을 집약·정리한 책으로서, 정조 원년(1777)에 李震興에 의해 간행되었지만 현전하는 체제로 정리되어 간행한 것은 헌종 14년(1848)경 이진흥의 증손자 明九에 의해서였다.
李基白,<19세기 韓國史學의 새 樣相>(≪韓㳓劤博士停年紀念史學論叢≫, 1981).
李勛相, (『掾曹龜鑑』의 編纂과 刊行>(≪震壇學報≫53·54, 1982).
향리층은 본래 사족이었는데 여러 가지 이유로 吏族으로 전락했다는 것이다. 不服臣罰定錄과 士族降吏錄이라는 항목에서는 그런 사정을 정리하는 가운데 양반으로서의 신분상승을 위한 절실한 희망을 담아내고 있다.

 향리는 본래 고려 말부터 조선 초기의 양반지배층이 성립하는 과정에서 분화하였고 다시 양반사회로 복귀하기를 희망하는 계층이었다. 이러한 향리층은 양반과 상·천민의 중간적 존재로서 일반민에게는 지방행정의 말단지배층으로 존재했다. 따라서 향리의 상층부에서는 본래 사족과 같은 지위에 있었던 것을 근거로 상승하려고 하고, 하층 상천민들의 경우에는 향리라는 직역을 통해 상승해 보려는 경우가 많아지게 되었다. 19세기 무렵 향리의 동향에 대해 茶山丁若鏞은 아전으로 다투어 나아가는 양상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지금은 향리로 들어가려는 자가 다투어 나서서 서로 싸우기를 과거와 벼슬길로 나가는 듯하여, 작은 고을의 衙前이 때로 1백 명에 가까워져 수용할 수 없게 되었다(丁若鏞,≪牧民心書≫권 4, 吏典 束吏).

 조선 후기의 향리는 고려시대나 조선 초기의 그것과 달리 지위나 역할 등에 있어 다양하게 분화되고 있었다.322)金弼東,<朝鮮後期 地方吏胥集團의 組織構造-社會史的 接近->(上·下) (≪韓國學報≫28·29, 一志社, 1982).
金俊亨,<朝鮮後期 蔚山地域의 鄕吏層 變動>(≪韓國史硏究≫56, 1987).
李勛相,<『安東鄕孫事蹟通錄』의 刊行과 朝鮮後期의 安東鄕吏-朝鮮後期 鄕吏集團의 地域과 家系에 따른 重層的 構造의 形成과 그 意義->(≪韓國史硏究≫60, 1988).
―――,≪朝鮮後期의 鄕吏≫(一潮閣, 1990).
이러한 과정에서 나타나는 향리층의 분화와 그에 따른 지위상승 형태는 사회전반의 변동과 어울려 나타난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향리는 신분이 고정되어 가면서 아전·吏胥·人吏 등으로 불렸다. 아전이라는 명칭은 지방수령이 근무하는 正廳 앞에 근무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행정단위에 따라 지방의 이서들은 營吏·邑吏 또는 驛吏라고도 불리었다. 영리는 감영리·병영리·수영리 및 진영리의 이서를 의미하며 보통 감영리를 지칭한다. 부·목·(대)도호부·군·현 등의 경우는 읍리로 불린다. 한편 假吏라고 하여 흔히 관아의 잡다한 공역을 수행하는 존재로서 향리의 보조역할을 담당하기 위해 충당된 이서배들이 있는데 이들은 지역에 따라서는 書員이나 貢生을 칭하기도 했다.323)假吏는 본래 향리가 부족한 지역에서 이를 보충하기 위해 官奴 등의 천민으로 충당한 것에서 비롯하였는데, 이후 상천민이 이서집단으로 편입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조선 후기에 가리의 증가는 상천민의 신분상승의 한 방편이 되었다고 볼 수 있으며 앞으로 더욱 많은 사례연구가 필요하다. 이서의 충원은 기본적으로 자질을 갖춘 자에 의한 세습으로 나타나지만, 아전의 증가가 급격해지는 18·19세기에는 불가피하게 가리에 의한 충원이 촉진되었다. 새로 들어오는 廳員들은 新禮錢을 납부하고서라도 이서가 되고자 했으며,324)≪掾房謄錄≫, 乙丑九月新定式. 가리인 서원의 경우에도 신례전을 납부하면 되었다. 이러한 이서의 인원수 증가는 이서층 내부의 갈등관계를 증폭시켰으며, 결국 이같은 대립 속에 음절을 조정할 수 있는 중요직임은 소수의 특정가계에 의해 독점되어 갔다. 이에 따라 이서층간에도 계층적분화가 나타났다.

 조선 후기 향리제도의 주요한 특징은 지방의 이서집단이 三公兄을 중심으로 운영된 데 있다. 삼공형은 가장 중시된 戶長과 吏房의 두 직임을 중심으로, 지역에 따라 首刑房 또는 頭刑房·副吏房·承發 등이 포함된다.325)고려시대의 三公兄은 戶長·記官·將校였다. 조선 후기에는 장교로서 직무를 수행하던 향리들이 탈락하고 일부가 병방이나 刑房·承發 등의 직임으로 분화되어 그 중 형방·승발 등이 삼공형에 포함되고, 기관 중에서는 吏房만이 주요 직임이 되어 戶長과 함께 삼공형을 구성하였다. 삼공형과 함께 都書員 같은 중요한 직책은 특정한 향리집안이 차지하며, 이들이 이족 가운데 주도적 가계를 형성하는 首吏집안이다. 지방 이서집단의 구성은 향리직의 최고위인 호장과, 중앙의 6조조직을 모방하여 이·호·예·병·형·공방으로 직무를 분담한 記官이 중심이 되며, 그 외에 醫生·律生·貢生·書員·通引 등으로 되어 있다.

 한편 조선시대에 들어 사족지배체제가 영향력을 발휘하게 되면서, 고려시대이래 호장들의 지방지배의 구심점이 되어온 邑司는 위축되고 그 대신 이방 중심의 作廳을 기반으로 한 지방행정체제가 나타나게 되었다. 이서들의 집무처인 작청(속음으로는 길청 또는 질청)은 星廳·人吏廳·吏廳 등으로도 불렸으며, 자신들은 이를 掾房 또는 掾曹라는 존칭으로 부르기도 했다. 이러한 작청체제로의 발전은 지방행정 실무를 수행하는 집단으로 전화한 것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각 군현에는 安逸房과 같은 형태의 원로들이 결성한 조직을 통하여 읍사에서 종래 수행한 지방사회의 역할을 대신하게 된다.326)李樹健,<朝鮮朝 鄕吏의 一硏究>(≪嶺南大 文理大學報≫3, 1974).
李勛相,<朝鮮後期 慶州의 鄕吏와 安逸房>(≪歷史學報≫107, 1985).
―――,<朝鮮時代의 邑司와 作廳>(≪아시아문화≫6, 한림대, 1990).
경주의 안일방은 耆老所에 불과하였으나 17세기 중엽 향리들의 향역기피와 假班들의 번성으로 향리사회의 기강이 해이해져 안일방에서 규범을 마련하기 시작했고, 18세기 이후에는 향리사회를 주도하는 구심점이 되었다. 이 과정에서 경주지역의 대표적 이족가계도 17세기 11개에서 18세기에는 9개로, 그리고 19세기 초에는 5개로 점차 줄어들고 있었다. 몇 백 년에 걸쳐 호장 및 이방 등의 명단을 수록한 경주의≪戶長先生案≫이나≪上詔文先生案≫및 남원과 상주 등에 남아 있는 각종 선생안이 이들 직임의 세습성과 그 중요성을 잘 보여준다.

 이들 선생안을 통해 볼 수 있는 현상은 이족 안에 몇몇 특정가계들이 호장이나 이방 등의 중요 직임을 독점한다는 점이다.≪安東鄕孫事蹟通錄≫의 분석에서도 안동향리의 감영리 진출양상은, 18세기 중반을 기준으로 하여 안동 권씨의 4파, 안동김씨의 3파, 의성의 3씨족(李·吳 金) 등이 그 전부가 되다시피 했다.327)李勛相, 앞의 글(1988) 참조. 이들은 수령출척에도 직접 관계할 정도의 위세를 지녔다. 이러한 가계분화와 함께 주도적인 가계가 등장했다. 이들은 신분상승을 위해 계속 노력하였으나 실제로는 상승을 이루지 못한 경우도 많았다.328)崔承熙,<朝鮮後期 鄕吏身分變動與否考-鄕吏家門古文書에 의한 사례연구->(≪金哲埈博士 華甲紀念史學論叢≫, 1983).
―――,<朝鮮後期 鄕吏身分變動與否考(2)-草溪卞氏家門 고문서에 의한 사례연구->(≪韓國文化≫4, 1983).
고려시대 이후 안동·경주·거창·밀양·합천·남원 등을 비롯하여 많은 군현에는 세거해 온 이족집안이 여전히 읍권을 장악하고 몇몇 집안 중심의 운영체제를 발전시켜가고 있었다는 점이 향리사회 중심부에 나타나고 있다. 이렇듯 주도적인 향리집안의 경우 장기적으로 세습성을 유지하는 가운데 고정화되고 있었다.

 한편 본래 같은 씨족이라 하더라도 吏族과 士族이 공존하는 경우도 찾아진다. 이 때의 이족가계는 자신의 고정화되어 가던 지위를 상승시킬 수 있는 방법으로서 사족계파의 족보와 합치려는 노력도 해보지만 여의치 않았다. 결국 이들은 뿌리가 하나라는 사실만을 확인하면서 사족의 차별을 감내할 수밖에 없었다. 반면 주도적인 향리층 주변 집안의 경우 상당수의 이족집안이 상층부에서 도태되거나 끊임없이 새로 편입되어 여러 집안이 경쟁하는 경우도 있었다. 또는 지역에 따라 주도하는 집안과 상관없이 새로운 집안이 등장하는 한편 일부 집안은 향리직에서 이탈하기도 한다. 그 양상은 향리직에서 벗어나 유학층 내지 새로운 중간층(업무·군관 등), 평민층 등 다양한 신분으로 다시 분화되어가는 경우이다. 이런 현상은 결국 혈연에 기초한 신분귀속성이 상당히 약화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329)金俊亨, 앞의 글. 즉 이들 집안 중에는 본관을 변경하면서까지 유학층으로의 상승을 꾀하는 집안도 보인다.330)幼學은 양반 未入仕者의 직역으로서, 常民이나 중간층이 신분을 상승시켜 가는 계기로 삼고 있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비록 그 수가 증가하더라도 정부는 昌錄者를 색출하는 방식을 통해 억제하고 있을 뿐이다(李俊九,≪朝鮮後期 身分職役變動硏究≫, 一潮閣, 1993, 159쪽 참조). 상·천민의 경우 향리로 진출할 때 「假吏」를 거쳐 상승할 수 있었으며, 나아가 향리직에서 벗어날 때는 다른 중인직역으로 나가거나, 유학으로 진출하는 경우가 가능했다.331)향리층 변동에 관한 연구는, 향리가문에 대한 연구를 통해 향리직이 몇몇 주도적인 가계에 의해 독점되어 가듯이 향리신분은 세습적이고 고정화되어 간다고 하여 신분변동과는 무관하다는 연구와, 다른 한편 세습적인 집안이 있지만 일부집안은 향리직에서 이탈되는 등 사회변동의 소용돌이 속에 휩싸이고 있다는 연구의 둘로 나뉘고 있다.≪속대전≫ 이전 천거조에 유학의 입사가 성문화되면서부터 유학이란 직역명으로 입사하려는 후보자가 결정적으로 더욱 늘어나게 된다. 이후 중인이나 양인층의 유학을 모칭하는 현상이 점점 늘게 되었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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