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4권 조선 후기의 사회
  • Ⅰ. 신분제의 이완과 신분의 변동
  • 3. 중간신분층의 향상과 분화
  • 3) 향리층의 지위상승과 분화
  • (2) 향리층의 신분지위 상승운동

(2) 향리층의 신분지위 상승운동

 지금까지 조선 후기 삼공형의 존재와 작청체제를 통해 특정한 집안이 주요직임을 독점해 가고 있었으며, 이와 더불어 향리층이 분화하는 양상을 살펴보았다. 이는 단순한 향리사회의 문제가 아니라 조선 후기 사회변동과 관련하여 중요하다. 즉 사회경제적 실력을 바탕으로 새롭게 등장하는 新鄕層의 동향과 그에 따른 향권장악 형태를 통해 향리층이 지방행정에 있어 어떤 지위를 차지하게 되는가와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이들 향리들은 우선 행정적인 실무를 장악하게 됨으로써 점차 영향력을 확대해 가는 가운데 신분지위를 보장받으려 하였다. 이들의 주요 업무는 전정·군정·환곡 및 잡역에 걸쳐 미치지 않는 곳이 없었다.≪연조귀감≫에는 한 지역의 화복과 왕화가 오직 향리에 달려 있다고 하였다.332)≪掾曹龜鑑≫권 1, 跋文(李彙載).

 지방의 이서층들은 향촌의 제반 실무를 담당했기 때문에 작청 외에 6방별로 별도의 청사를 가지기도 하는데, 刑吏廳이나 戶房所·工房所 등이 그것이다. 書員廳은 입추에 설치되어 수세를 담당하는 임시기구였으나 점차 상설기구화되었고, 그에 따라 도서원도 점차 중요한 직임이 되어 갔다. 향촌의 부세운영에서 차지하는 역할이 커졌기 때문이다. 이들은 전결에 대해 자세하고 향내 사정에 밝기 때문에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고 따라서 향리직 성격의 이서로 충원되었다. 戶籍廳도 호적편찬과 관련한 임시기구였으나 상설화되어 갔다. 이 밖에 각 창고에는 倉色·庫色이 설치되었고, 향교나 향청·서원 등에도 서원이 약간 명씩 배치되기도 했다.

 그들은 사족들이 鄕會를 운영하는 것에 대해 작청형태의 契조직을 중심으로 결속하고 있었고, 향안에 상대되는 壇案을 만들어 삼공형을 선발하는 기준을 세우는 한편, 향리에 대한 포폄과 승진 등을 관장했다. 그러나 이런 조직이 지나치도록 비대하게 되어 수령이나 재지사족에게 압박을 가하는 경우까지 나타났다.

영덕현령 洪鼎輔는 개혁에 뜻을 두고 엄중하게 단속하여 다스리니, 간사한 胥吏와 교활한 奴僕이 감히 쫓아내려고 하였습니다. 호장·이방·사령·관노 등이 밤에 읍성밖 요새의 도로를 점거한 다음 고을 백성들이 관가에 바치려고 싣고 가는 것을 쫓아 버렸고, 관아에 狀啓를 가지고 감영으로 가는 것을 막아 금할 뿐 아니라, 鄕所를 달래고 위협하여 자기 무리에 들어오게 하되 따르지 않으면 그의 아내를 결박하여 署標를 받았으며 또 병기를 가지고 관문에 돌입하여 흉언하고 위협하지 않은 바가 없었습니다(≪英祖實錄≫권 1, 영조 즉위년 9월 기사).

 영조 즉위년의 사건으로 이서배가 주동이 되어 읍을 장악하고 현령을 쫓아낼 뿐 아니라 향소까지도 달래고 협박하였다. 더 나아가 재상과 결탁하고 감사와 연통해 있어서 위로는 수령을 업신여기고 아래로는 생민을 수탈하니, 이러한 향리를 누를 수 있는 수령은 훌륭하다는333)丁若鏞≪牧民心書≫권 4, 吏典 束吏. 말이 나올 정도였다.

 18세기 중엽 이후에는 수령권을 중심으로 한 수습책이 정부의 기본방향으로 나타나고, 관 주도의 향촌통제책이 강화되는 가운데 향권이 사족에서 이향층으로 넘어갔다.334)鄕村社會史硏究會,≪조선후기 향약연구≫(民音社, 1990).
金仁杰,≪朝鮮後期 鄕村社會 變動에 관한 硏究≫(서울大 博士學位論文, 1991).
이에 따라 이서층이 부세수취 등에 있어 주요 역할을 담당하게 되면서 신분지위가 이전보다 한층 격상하게 된다. 숙종 38년(1712) 양역변통절목의 이정법이 마련되면서 부세수취에 미치던 사족의 영향력이 감소하고 그 다음해는 비변사 八道句管堂上制·有司堂上制의 실시 등을 계기로 수령의 절대적 권한이 보장된 것이다. 吏鄕이란 이서와 향임, 또는 이족과 향족을 의미한다. 뿐만 아니라 기존의 항촌질서내에서 주요한 행정실무를 담당하던 이서층이 대두되는 가운데 기존의 사족에서 향반화한 부류는 물론, 전통적인 향임층과 새롭게 향임이 되거나 품계를 획득한 부민층을 함께 지칭하는 용어이기도 하다. 향촌의 주도권이 이들 신향에게 넘어가는 과정에서 사회적으로 지위향상을 꾀하는 것은 당연했고 이런 가운데 舊鄕과 新鄕간에 향전이 치열해져 갔다. 한편 향리층들의 격상된 역할과 지위는 19세기에 들어 위기에 처하게 된다. 즉 이전에는 이서나 신향들이 買鄕·買任을 통해 신분지위를 성장시켜 갈 수 있는 통로가 넓었으나, 19세기 전반기의 都結335)安秉旭,<19세기 賦稅의 都結化와 封建的 收取體制의 解體>(≪國史館論叢≫7, 1989).과 공동납 형태로 발전한 각종 부담이 증가하면서 그들에 대한 압박도 심해지고 나아가 경제기반도 크게 제약을 받았다.336)金仁杰, 앞의 책.
高錫珪,≪19세기 鄕村支配勢力의 變動과 農民抗爭의 展開≫(서울大 博士學位論文, 1991).
도결은 갈수록 감소하는 조세원을 확보하고자 각종 조세를 토지에 부과한 것인데 오히려 조세부담의 불균형을 심화시켰다. 즉 관이 직접 화폐로 징수한 후 시가가 쌀 때 현물(쌀이나 면포)로 바꾸어 국가에 수납하는 것인데, 이 과정에서 생기는 잉여분을 조세 부족분에 충당한다는 명분이다. 문제는 계절별·지방별로 쌀값의 차이가 크다는 점에 있었고, 결국 도결은 結價 상승을 막지 못한 채 지방관의 착취수단이 되어버리는 가운데 부민들은 가장 먼저 수탈대상이 되었다.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향리의 신분지위 상승을 위한 노력은 우선 향리의 기본적인 역할과 기능을 배경으로 나타났고, 나아가 향촌통제책이 변화하는 가운데 한층 격상된 지위를 갖는 결과를 가져왔지만 곧 이어 위기를 맞게 되었다. 이러한 와중에서 결국 향리층의 사회적 지위와 신분을 뒷받침해 줄 수 있는 것은 그들의 사회경제적 기반이었다. 그들은 든든한 사회경제적 배경을 바탕으로 바야흐로 적극적인 신분지위 상승운동을 벌이게 된다.

 향리에게는 祿이 지급되지 않았다. 조선 초기만 하더라도 지급되던 外役田도 세종 27년(1445) 철폐되었고, 대신 군현 자체내의 수입 가운데 일정한 삭료만을 지급받게 되었다 향리들은 주장하기를, “왕도정치에 있어 백성의 恒産을 유지케 하는 것이 우선이라면, 그러한 制産에 있어 무엇보다 시급한 것은 吏祿이다”라고 하여337)≪掾曹龜鑑≫권 1, 跋(洪直弼). 향리에게 녹을 지급하는 것이 시급하고 나아가 근본적인 문제임을 천명하고 있다.

 이서배들은 조선 후기에 들어와 향임층과 더불어 수령과 결탁하여 부세수취기구에 참여하면서 여러 가지 방식으로 부를 축적하고 있었다. 그러한 양상은 수령이 재앙을 만나 세를 감면한 것을 도둑질하거나 방납하면 아전이 그 100배는 더 하지만 막을 수가 없다고 하여338)丁若鏞,≪牧民心書≫권 4, 吏典 束吏. 수령이 솔선해야만 막을 수 있다고 경계할 정도였다. 한편 경비부족을 빙자한 賣鄕·賣任이 더욱 치열해지는 가운데 특히 이서직에 대한 매임액수가 커진다는 점이 이서층의 이권과 그에 따른 권한이 어느 정도인가를 말해 주고 있다. 이방에 대한 매임가는 이 시기에 있어 가장 높았으며 座首직임 등에 비교가 안될 정도였다.339)高錫珪, 앞의 책, 112∼113쪽.

 이러한 상황을 통해 상층 향리층의 경우 아주 확고한 경제적 기반을 갖게 된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여러 대에 걸쳐 세거하던 이족의 경우는 물론이려니와 새롭게 등장하는 향리집안의 경우도 향촌내 자신들의 기능과 역할을 배경으로 부를 축적하기란 상천민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토지집적을 통한 경우는 물론, 상업적 농업을 통한 부의 축적도 상천민보다 수월했다. 그러한 동향은 대구부 호적의 분석결과에 나타나 있는 雇工의 고용형태를 보면 잘 알 수 있다.340)韓榮國,<朝鮮後期의 雇工-18·19세기 大邱戶籍에서 본 그 실태와 성격->(≪歷史學報≫81, 1979). 도회와 농촌지역 5개 면을 분석한 결과 농촌보다 상공업이 발달한 도회지역에서 압도적으로 많이 확인되었으며, 18∼19세기 초엽 고공의 보유율이 가장 높은 계층은 중서층으로 전시기(1705∼1858)에 걸쳐 약 8호당 1호 꼴이었다. 보유율이 가장 낮은 양반의 35호당 1호와 비교하면 높은 비율이다. 또한 군관층(業儒·業武·出身·閑良·校生·武學·各色軍官·旗牌官·將官·諸衛者등)보다 이서층(戶長·記官·貢生·鄕吏·人吏·府吏·下吏·假鄕所·律生·書史·書員·小童등)에 해당하는 아전호의 보유율이 6∼7호당 1호 꼴로 더 높고, 고공 보유의 대표적인 예에 해당한다고 한다. 그들은 남의 노동력을 이용하여 부를 축적하는 방식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이러한 상황 아래서도 자신들의 지위를 항상시키는 직접적이고 적극적인 방안을 모색하고 있었다. 영조 4년(1728)에는 무신란 이후 수습책의 일환으로 얻어낸 것이기는 하지만 경상도 향리에 한하여 復戶의 특전과 함께 잡역을 면제받게 되었다.341)≪掾曹龜鑑≫권 1, 復戶獻議. 그 후 영조 50년 경상도 각 읍 향리 374인이 모여 호장에게 녹봉을 지급하고 나아가 그들의 官階에 부합되는 예우를 취해 주도록 건의하기도 하였다.342)≪掾曹龜鑑≫권 1, 戶長疏. 이러한 움직임은 성과를 거두지 못했지만 나아가 각 집안의 신분에 대한 자각을 토대로 향리에 대한 傳記가 집성되기 시작했다.≪尙山吏蹟≫이나≪연조귀감≫이 그것이다.≪연조귀감≫이 다시 간행된 것은 처음 편집된 이후 고조된 향리들의 신분상승에 대한 관심과는 대조적으로 사회적 제약이 더욱 엄격해지면서 이를 극복하려는 일련의 노력이 확산되는 추세 속에 나왔다.343)李勛相, 앞의 책, 231∼235쪽. 19세기를 전후해서는 한 집안의 전승을 위한 것에서부터≪襄陽耆舊錄≫·≪안동향손사적통록≫과 같이 한 지역의 향리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것으로 확산되어 갔다. 또한 향리들의 사적을 편찬하는 사업 이외에 향손들을 배향한 사우를 건립하거나 중건하는 작업도 시작된다. 거창의 彰忠祠라던가 예천의 毅忠祠, 또는 상주의 壯節堂 중건이 그것이다. 이제는 일정지역을 중심으로 자신들의 위업을 과시하는 형태로 확대하여 갔다.

 이상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중엽까지의 시기를 중심으로 향리층의 분화와 신분지위 상승운동에 대해 살펴본 것처럼, 이 시기는 신분제 동요가 심해지고 있었고 당시 향리층도 사회경제적 성장을 토대로 소극적인 방법이긴 하지만 자신의 기능과 역할을 중심으로 신분지위 상승을 꾀하고 있었다. 나아가 자신들의 권익을 향상시키기 위해 직접적이고도 적극적인 방법을 모색하고 있었다. 이러한 향리층의 성장과 의식변화는 이후 사회발전과 더불어 더 적극적이고 치열하게 나타나게 된다.

<金良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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