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4권 조선 후기의 사회
  • Ⅰ. 신분제의 이완과 신분의 변동
  • 4. 서민층의 성장
  • 1) 서민의 경제적 성장
  • (1) 농민의 경제적 성장

(1) 농민의 경제적 성장

 ‘農者天下之大本’이라는 산업관 아래서 국가나 서민의 주요 경제적 기반은 농업이었으며 서민의 대다수는 농민이었다. 따라서 서민의 경제적 성장은 맨 먼저 농업의 발달과 농민의 경제적 성장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임진왜란으로 인해 농토가 황폐해지자 농민층이 토지로부터 유리되는 현상이 심해졌다. 이에 국가는 경작지 확보를 위한 농지의 개간과 농업기술의 개량을 추진하는 등 전후 복구사업에 주력하였다.

 농지개간에 신분적 제한을 두지 않았고 개간지에 대해서는 일정한 기간 동안 면세하고 개간자의 소유지로 인정하는 등의 법적 조치가 취해졌다. 개간사업에는 막대한 재력이 필요하였기 때문에 개간에 참여한 계층은 궁방·아문·권세가 등 특권신분층이 더 많았지만 서민층에서도 경제력을 바탕으로 성장한 상인·부호 등이 개간에 참여하였다. 이들은 상품화폐경제의 성장에 따라 상업 또는 농작물을 상품화함으로써 획득한 화폐자본을 개간에 투여하였다. 또한 숫적으로 많지는 않았지만 소농민의 경우도 소규모로 개간에 참여하여 경작지를 확보하였다. 이렇듯 부를 축적하는 방편으로 개간에 참여한 소농민·상인·부호들이 서민지주로 성장하여 갔다.347)宋讚燮,<17,18세기 新田開墾의 확대와 經營形態>(≪韓國史論≫12, 서울大 國史學科, 1985), 261∼269쪽.

 농민들이 경제적으로 성장하게 된 주요 요인으로는 토지확보에 못지 않게 농업기술의 발달과 그로 인한 생산력의 증대를 들 수 있다. 농업기술의 발달은 곧 생산력의 증대와 결부되어 서민들의 경제적 성장에 밀접하게 작용하였다. 농업기술의 발달은 농법의 개량에서 비롯되는데 개량된 농법을 농민이 직접 실시함으로 해서 생산이 증대되어 이들의 경제적 성장에 터전이 되었다.

 조선 후기의 농업기술은 농법·시비법·농기구분야에서 전기에 비해 크게 발전하였다. 농업기술상 가장 두드러지는 변화는 水田에서의 移秧法의 보급이라고 할 수 있다. 이앙법은 제초작업이나 그 밖에 노동에 있어서 노동력을 절감할 수 있고 지력을 이용하고 불량한 묘를 선별할 수 있으며, 이모작의 시행, 穀種의 절약 등의 이점이 있다. 이앙법은 조선 초기에는 경상도와 강원도 남부지역에서만 부분적으로 행해졌으나 차츰 수리사업 등 권농정책을 통해 그 장점이 농민들에게 이해되어 숙종·영조대에 이르면 점차 중부·북부지방으로 확산되고 18세기 말에 이르면 전국적으로 보급되기에 이르렀다.348)金容燮,<朝鮮後期의 水稻作技術-移秧法의 普及에 대하여>(≪朝鮮後期 農業史硏究 Ⅱ≫, 一潮閣, 1974). 이앙법이 전국적으로 실시되는 시기는 17세기 전반이며 보급의 가장 큰 원인을 수확량의 증가로 보는 견해도 있다. 이앙법의 보급으로 노동력이 절감되고 단위면적당 생산량이 높아졌으며 稻麥二毛作이 가능하게 되어 전반적으로 생산력이 크게 증대되었다.349)金容燮,<朝鮮後期의 水稻作技術-稻·麥二毛作의 普及에 대하여>(위의 책).

 종전까지 旱田에서는 밭이랑에 파종하는 壟種法이었으나 후기에는 밭고랑에 파종하는 畎種法으로 전환하게 되었다. 견종법은 노동력이 절약되고 시비가 잘되고 통풍이 잘되며 소출이 많아지는 장점이 있다. 견종법의 보급 속도와 정도에 지역차가 있었으나 차츰 견종의 경향이 늘어났다.350)金容燮,<朝鮮後期의 田作技術-畎種法의 普及에 대하여->(위의 책). 한전농업기술의 발전은 작부방식의 변화에서도 나타났다. 輪作農法이 보급되어 「一年再種」과 「二年三作」의 방신이 토착화되어 감으로써 토지생산력이 높아지게 되었다.351)閔成基,<朝鮮後期 旱田輪作農法의 展開>(≪朝鮮農業史硏究≫, 一潮閣, 1988), 189∼196쪽.

 施肥法 변화도 농업생산력을 증대시키는 데 작용하였다. 시비방식이 파종전이나 또는 파종 때에 시비하는 基肥法에서, 18세기에는 파종 후에 시비하는 追肥法으로 전환하여 갔다. 추비농법이 전개되면서 비료의 종류가 다양해지고 작물에 따라 거기에 맞는 시비법이 고안되어 나가고 있었다.352)閔成基,<朝鮮時代의 施肥技術>(위의 책), 244∼261쪽.

 17세기 이후 도시의 인구집중으로 인해 주변 농촌에서는 채소를 중심으로하는 상업적 농업이 발전하게 되었다.353)金玉根,≪朝鮮後期經濟史硏究≫(瑞文堂, 1977), 368쪽. 새로운 경제작물로 면화·삼베·모시·담배·마늘·채소·인삼 등이 대대적으로 보급되었고, 감자·고구마·고추·호박·담배·토마토 등의 외래작물의 도래와 확산으로 농산물의 상품생산이 진행되었으며 이에 따라 상업적 농업이 전개되었다.354)이호철,≪농업경제사연구≫(慶北大 出版部, 1992), 99∼101쪽.

 농기구 또한 용도에 따라 분화되고 종류가 다양해져 농업생산력의 발전에 영향을 미쳤다. 조선 후기에 간행된 농서나 어휘집에 나타나는 농기구에 관한 내용을 보면 그 수효나 기능면에서 크게 발전된 양상을 보이고 있다.355)金光彦,≪韓國 農器具攷≫(韓國農村經濟硏究院, 1986).

 이상에서 언급한 바 농업기술에서의 변화는 경영방식에도 변화를 초래하였다. 농업생산력이 향상됨에 따라 노동력이 절감되고 그에 힘입어 경작 가능한 면적이 확대됨으로써 17∼18세기에 이르면 廣作이 가능해지게 되었다. 광작은 지주·中畓主도 하였지만 자작농이나 작인이 중심이었다. 이들은 남의 토지를 빌려 경작하는 借地農으로서 광작을 경영하기도 하였다.356)宋贊植,<朝鮮後期 農業에 있어서 廣作運動>(≪李海南博士華甲紀念史學論叢≫, 1970).

 논농사와 밭농사에서 이루어진 이와 같은 발전은 농민들에게 광작이나 상업적 농업 등을 통하여 부를 축적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하여 농민층 내부에서는 토지소유 및 경영을 확대해 나가는 부농층이 형성되고 있었다. 이들은 시장의 발달과 상품유통의 활발한 전개와 더불어 농업생산물을 상품화함으로써 부를 축적하게 되었다. 경영형 부농이나 광작농, 또는 서민지주나 요호·부민이라 불리는 이들 계층의 성장은 농지에서 배제되는 다수의 농민으로 하여금 빈농으로 전락하게 하는 요인이 되기도 하였지만, 농민이 경제적으로 성장하는 면모를 잘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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