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4권 조선 후기의 사회
  • Ⅰ. 신분제의 이완과 신분의 변동
  • 4. 서민층의 성장
  • 1) 서민의 경제적 성장
  • (2) 공장의 경제적 성장

(2) 공장의 경제적 성장

 조선시대의 공업은 官匠制 수공업체제로 운영되었다. 즉 관부나 궁중에서 필요로 하는 물건을 身役으로 생산노동에 동원된 匠人이 제조하여 공급하였다. 수공업제품의 생산담당자인 이들 工匠은 각 사에 등록되어 있었고 중앙관청에 속해 있는 京工匠과 지방관청에 속해 있는 外工匠으로 구분되었다. 工曹·尙衣院·軍器寺·校書館·司饔院·繕工監 등 30여 개의 중앙관청에 129종류의 경공장과 각 도에 26종류의 외공장이 등록되어 있었다. 공장은 성격에 따라 각각 해당아문에 소속, 등록되었다. 예를 들면 綾羅匠·草笠匠·紗帽匠·網巾匠은 상의원에, 漆匠·鑄匠·弓人·矢人·冶匠은 군기시에 속하였다. 각 사의 장인에 대한 명단을 작성하여 공조와 해당아문에서 보관하도록하였다.357)≪經國大典≫권 6, 工典 工匠.

 공장의 신분은 양인과 公賤으로 구성되어 있었다.358)≪大典後續錄≫권 6, 工典 工匠. 私賤은≪경국대전≫의 규정에 의해 공장에 소속시키지 않았다. 공장은 匠籍에 등록되어 일정기간 동안 부역해야 하며 부역일 이외의 나머지 시간에는 사적 생산에 종사할 수 있었다. 入役匠人의 상품제조·판매의 실례를 사옹원 분원의 장인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일정기간 동안 분원에서 관수용 사기제조에 종사하였으며 동원되지 않은 기간에는 사옹원에 공장세를 납부하였다.359)姜萬吉,≪朝鮮時代商工業史硏究≫(한길사, 1984), 112쪽.

 관영수공업은 시설·원료를 관청에서 부담하고 제품도 전부 관청소유이며 제품의 양과 규격을 관청의 필요에 따라 결정하였다. 관영수공업 외에 민간수공업은 직물류의 생산을 위주로 하는 농가의 부업에 지나지 않는 영세한 단계였다. 이처럼 조선 전기의 수공업은 거의 국가통제하에 운영되어 사적 생산활동이 저해되었는데 비해 조선 후기에 이르면 17·18세기에 일어난 일련의 사회경제적 변화와 맞물려 수공업체제에 변화가 오게 된다.

 종래 국가에서 필요로 하는 물품을 현물공납으로 조달하다가 대동법의 실시, 화폐의 유통, 상품경제의 발달 등에 힘입은 이후로는 貢人 등 상공업자를 통해 조달하였다. 따라서 관공장에서 물품제조를 위한 시설을 계속 유지할 필요가 없게 되어 관영수공업체제가 해체되어 갔다.360)劉元東,<18世紀 後半期의 手工業發展과 商業>(≪韓國近代經濟史硏究≫,一志社, 1979), 271쪽. 관장제 수공업체제가 무너지게 된 가장 중요한 원인의 하나는 공장의 이탈이다. 화폐의 유통과 상업의 발달로 시장수요가 늘어감에 따라 관청에 의존할 필요가 없어지게 되고 국가재정의 궁핍으로 관장에 대한 대우가 불충분해지자, 관장들이 관영수공업의 조직에서 이탈하여 私匠化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관장의 사장화현상은 인조대에서 숙종대에 이르는 17세기 후반에 심해졌다.361)姜萬吉, 앞의 책, 110∼111쪽.

 정조 9년(1785)에 편찬된≪大典通編≫에서는 司贍寺·典艦司·昭格署·司醞署·歸厚署의 5개 아문의 공장이 혁파되고, 內資寺·內擔寺 등 10개 아문에는 공장이 소속되어 있지 않았다. 이처럼 수공업자를 가지고 있는 아문의 수가 조선 전기의 30개에서 15개로 줄어드는 현상을 보일 만큼 관영수공업은 점점 해체되어 갔다.

 관청수공업 내부에서 일어난 이와 같은 변화는 관영수공업의 운영체제면에서도 나타났다. 장인의 부역제가 점차 고용제로 바뀌고 공장들에게 사적 제조와 판매가 허가되었다. 대부분의 관설 제조장이 점점 해체되어 갔고 존속하더라도 몇몇 특수한 분야의 제조장을 제외하고는 유명무실하게 되었다. 남아 있는 몇몇 분야의 관설 제조장의 경우도 점점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다. 17세기 이후 관수용 기와의 경우 대부분이 私營製瓦場에서 조달되었으며, 관수용 사기제조장인 분원의 경우도 순수한 관영수공업체로서의 성격을 잃게 되었다.362)姜萬吉, 위의 책, 111∼129쪽. 관영수공업의 쇠퇴로 관에 예속되어 있던 공장들이 관의 통제에서 풀려나 자유수공업자로 전환하면서, 사영수공업자인 私匠이 크게 증대되어 이들에 의해 전업적 생산이 이루어져 생산활동이 활발해졌다.

 한편 각 지방에서 현물로 공납하던 많은 관수품을 대동법의 실시로 인해 공인이 민간에서 구입하여 납품하도록 함으로써 공인들은 생산비를 먼저 대주어 수공업자들을 지배하기에 이르렀다. 이른바 先貸制的 수공업조직이 성립되었다. 상인들이 자본을 투자, 생산에 참여하여 그 생산품을 판매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들 商人物主의 출현으로 상업자본이 생산에 투입됨으로써 수공업생산의 규모가 확장되어 장인의 사적 제조 및 판매의 규모가 확대되면서 민간수공업이 크게 발달하였다. 상인물주의 분원장인지배로 분원이 민영화되기에 이를 정도였다.

 민간수공업에서 전업적 생산이 이루어지며 생산장의 규모가 커지게 되자 18세기 후반에는 미약하나마 공장제 수공업의 형태로까지 발전하였다. 鍮器店·水鐵店·砂器店·漆器店 등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유기점의 경우 분업적 협업에 의해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한편 수공업자들은 刀子廛·床廛·薪鐵廛의 경우에서처럼 자기 생산품의 판로를 위해 시전을 개설하여 경영하기도 하였다. 그런가 하면 冶匠·驄匠·毛衣匠 등 일부 장인들은 원료제품의 독점판매권을 행사하기도 하였다.363)宋贊植,≪朝鮮後期 手工業에 관한 硏究≫(서울大 韓國文化硏究所, 1973). 18세기 후반에 나타난 수공업분야에서의 분업적 요소는 광범위하게 전개되어 19세기에는 초기 자본주의적 수공업체제로 발전하기에 이르렀다.364)劉元東, 앞의 글.

 이상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조선 후기 수공업의 변화는 상업자본의 수공업지배와 관청수공업의 민영화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관장제가 붕괴되고 사장이 나타나게 됨으로써 수공업생산에 구조적 변화를 초래하여 공장제 수공업, 분업적 협업에로까지 발전해 갔다. 그 과정에서 공장들은 관영수공업체제하에서 보다 성장한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전업적 생산이 이루어지고 사적 생산장의 운영, 市廛개설, 원료의 독점판매 등의 현상은 공장들이 경제적으로 성장한 결과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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