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4권 조선 후기의 사회
  • Ⅰ. 신분제의 이완과 신분의 변동
  • 4. 서민층의 성장
  • 2) 서민의 신분상승운동

2) 서민의 신분상승운동

 서민은 조선사회 구성원의 근간을 이루며 국가에 대해 부세를 담당하는 중심계층이다. 그러나 신분상 많은 제약과 차별을 받아야 했다. 특히 役의 과중한 부담은 서민들로 하여금 군역을 피하고 신분상승을 꾀하도록 유발하였다. 조선 후기에는 경제력을 바탕으로 신분상승이 어느 정도 가능했기 때문에,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일정하게 부를 축적할 수 있는 여건이 갖추어진 서민들은 합법적이든 비합법적이든 가능한 모든 방법을 이용하여 신분상승을 이루고자 하였다.

 여기에는 서민들의 신분상승 욕구와 더불어 당시 정부의 사회정책이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의 전후 복구사업에 필요한 재정과 흉년·재해 등으로 인한 진휼사업에 필요한 재정을 확보하기 위하여 국가가 정책적으로 納粟策을 실시하거나 空名帖을 발행하여 신분상승의 길을 열어 놓았던 것이다. 그런가 하면 호적을 담당하는 籍吏와의 결탁 등 비합법적인 방법으로도 면역 내지 신분상승이 가능하게 되었다. 이처럼 정부의 공인 또는 묵인하에 서민들은 선분상승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다.

 서민들의 신분상승운동의 양상을 그들이 이용했던 몇 가지 방법을 통해서 살펴보기로 한다. 먼저 향교에의 冒屬을 들 수 있다. 서민의 자제는 향교에 입학할 수 없었던 조선 전기와는 달리 16세기 이후가 되면 군역을 피하는 수단으로, 또는 신분상승을 위한 방편으로 향교에 입학하는 경향이 보편화되었다. 인조 22년(1644) 落講校生充軍法이 시행되자 양반들은 額內校生으로서의 입학을 회피하고 대신 서얼·평민의 자손들이 입학하게 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시대가 내려올수록 더욱 심해져 향교의 생도는 東齋生과 西齋生으로 신분이 구별되었으며 서재생들은 군역을 피하기 위해 향교에 모속한 평민들로 채워졌다. 「교생」이라는 용어가 서재생만을 지칭하는 말로 고착화될 정도였다. 일정한 양의 돈이나 곡물 등을 납부하고 원납교생이라는 명목으로 이름을 校案에 등록하였는데 그 수가 한 군현에 무려 수백 혹은 수천에까지 달하였다.377)全炅穆,<朝鮮後期 校生의 身分에 관한 再檢討>(≪宋俊浩敎授 停年紀念論叢≫, 1987). 225∼228쪽.

 인조대부터 이미 경제력이 있는 평민이 교생신분을 가지게 되었으며378)≪仁祖實錄≫권 14, 인조 4년 11얼 경인. 18세기에 이르러서는 교생의 대다수를 이들이 차지하게 되었다.379)尹熙勉,≪朝鮮後期 校生硏究≫(一潮閣, 1990). 경제력이 있는 서민들은 교안에 모속하거나 免講帖을 구득하여 신역을 면제받기도 하였다. 교생이 됨으로써 본인인 군역과 잡역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그 후손 또한 면역을 도모할 수 있었다. 이들은 교생신분을 계제로 하여 향족이 되었을 경우 다시 掌議·色掌과 같은 校任 진출을 꾀할 수도 있었고 또 軍任·鄕任으로 진출하여 신분상승을 이루기도 하였다.380)徐漢敎,<英·正祖代 納粟制度의 實施와 締粟富民層의 存在>(≪朝鮮史硏究≫1, 伏賢朝鮮史硏究會, 1992), 330∼331쪽. 아주 드문 예이지만 교생신분을 계제로 생원·진사시를 통해서 신분상승을 이룩한 예를≪司馬榜目≫에서 확인할 수 있다.≪사마방목≫에 의하면 인조 26년(1648)에서부터 정조 7년(1783)에 이르기까지 23명이 교생신분으로 생원·진사시에 합격하였다.381)崔珍玉,≪朝鮮時代 生員進士 硏究-司馬榜目의 分析≫(韓國精神文化硏究院 韓國學大學院 博士學位論文, 1994).

 다음 신분상승 수단으로 납속제도를 들 수 있다. 임진·병자 양란으로 인한 재정궁핍과 잦은 흉황을 만나 국가에서는 飢民·賑恤을 위한 賑資 확보, 산성의 축조와 보수, 관청의 부족한 재정 등을 관작을 팔아 보충할 목적으로 납속제도를 실시하였다. 조선 후기에 들어 계속 실시된 납속제도는 현종·숙종대에 이르러 각종 「募粟別單」이 제정되어 공명첩이 남발되고, 영조 8년(1732)에<富民勸分論賞別單>이 제정되면서 법제화되기에 이르러≪續大典≫·≪대전통편≫에 반영되었다.<부민권분논상별단>에 의하면 1,000석 이상자에게는 실직을 제수, 500석 이상자에게는 賞加, 100석 이상자에게는 散職帖 成給, 50석 이상자에게는 納粟通政帖 성급, 10석 이상자에게는 3년 동안 烟役이 면제되었다. 납속제도는 재해와 기근의 반복으로 정조대에도 계속 시행되었다.382)徐漢敎, 앞의 글, 295∼307쪽.

 같은 願納人이라 해도 공명첩을 성급하여 모곡할 때 納米價는 직첩에 따라 달랐고 같은 직첩이라도 사족과 양민의 납미가에는 차등을 두었다.383)≪新補受敎輯錄≫, 禮典 惠恤. 공명첩은 비록 授職者의 성명이 기록되지 않지만 정부로부터 공명첩에 명시된 직위를 합법적으로 취득하는 것이다. 그러나 납속에 의해 취득한 관직은 제도상으로는 실직과 엄격한 차별이 있어 正科 출신이나 東西班 正職人들과는 달리 취급되었다.384)≪受敎輯錄≫권 5, 刑典 推斷.

 납속제도의 주 대상은 富民·饒戶層이었다. 부민이란 茶山에 의하면 “그 집안에 저장한 곡식이 여덟 식구가 먹고도 오히려 남는 것이 있는 자”나, “흉년이 들었을 때 최고 1,000석에서 최하 20석을 낼 수 있는 자”였다.385)丁若鏞,≪牧民心書≫권 13, 賑荒六條 勸分 참조. 부민·요호층에는 대지주·서민지주·상인 등 다양한 계층이 있었지만 하층신분의 부민들은 당시 사회경제적인 변화에 힘입어 부를 축적하여 새로운 계층으로 성장한 사람들이었다.

 납속수직으로 바로 양반신분을 획득하는 것은 아니었다. 납속을 통한 면역은 납속자 1대 또는 10년 내지 3년만 가능했기 때문에 일시적이었다. 양인납속자들이 향촌사회에서 사족이 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였고 그보다는 경제력을 이용하여 국가권력구조 안에 포섭되어 사회적 지위향상을 꾀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교·원생이 되거나 군관으로 진출하거나 또는 향임·면임을 장악하는 등의 방법을 통해 중인으로의 신분상승을 기도하였던 것이다.386)徐漢敎, 앞의 글, 325∼331쪽.

 또 다른 피역방법은 호적의 개변이었다. 납속첩을 소지한 자는 대개 지 방에서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자들이었으므로 호적을 담당한 관리와 결탁하여 신분직역의 모록을 통하여 호적상의 신분상승을 꾀하였다. 공명첩 구득으로 인한 면역은 일시적이지만 호적에 납속품계를 기입하여 몇 대가 지나면 영구히 면역하게 되었다. 이들은 군관직 내지 관작을 모록한다든지 또는 幼學·業儒를 모칭하여 호적상 신분상승을 꾀하였다. 신분상승을 이룬 서민층이 구체적으로 얼마나 되는지는 알 수 없으나 울산의 경우, 상민호의 비율이 영조 5년(1729)에는 59.78%였던 것이 고종 4년(1867)에는 33.96%로 격감하고 있다.387)鄭奭鍾,<朝鮮後期 社會身分制의 變化-蔚山府 戶籍臺帳을 중심으로->(≪朝鮮後期社會變動硏究≫, 一潮閣, 1983), 249쪽. 이러한 현상은 조선 후기의 호적대장을 분석하여 일반적으로 밝혀진 양반호구의 격증, 상민호구의 격감, 노비호의 실질적 소멸이라는 결과를 통해서 잘 나타나고 있다.388)대구 울산·단성 등의 호적을 분석한 결과는 전반적으로 신분상승 현상이 일어나 신분제의 붕괴를 초래하였다고 한다. 이와는 달리 서울 북부호적과 金化호적을 분석한 연구에서는 17세기에는 오히려 신분하강 현상이 지배적이었다는 견해가 나오고 있다(E.W. Wagner,<17세기 朝鮮의 社會階層-1663년의 서울 北部戶籍을 중심으로->, 1974;梨花女大 史學科硏究室編譯,≪朝鮮身分史硏究≫, 1987와 Susan Shin,<17세기 金化地域의 社會構造>, 1974;위의 책).

 이처럼 다른 신분에의 모속현상은 영·정조대 이후에 더욱 심해져 갔다. 호적제도의 문란으로 인한 호적의 개변이나 재력있는 농민들이 이른바 換父易祖의 방법으로 몰락양반에게 대가를 지불하고 족보에 끼어 들어가는 방법 등이 가능해져 재력있는 서민층들의 상당수가 신분상승을 이룩하는 통로가 열려있었던 것이다.389)金容燮,<朝鮮後期에 있어서 身分制의 動搖와 農地所有>(≪朝鮮後期 農業史硏究, Ⅰ≫, 一潮閣, 1970).

 이와 같은 방법으로 신분상승을 꾀한 서민층의 성장한 모습은 鄕會의 운영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중기 이래 향회는 지방민의 통제책으로 향약을 보급하고 향촌지배층의 통치기구로 기능하였는데 영조·정조대에 이르면 여론을 중시하여 신분적인 구별없이 대소민 모두의 의견을 묻게 되었다. 18세기 중엽부터 향회에 일어난 새로운 경향은 기존의 교화 위주의 향촌자치체계에 변화를 가져다 주었다. 전적으로 양반중심이었던 것에서 일부 평민들까지도 참가하는 향회가 되었다.390)安秉旭,<朝鮮後期 自治와 抵坑組織으로서의 鄕會>(≪聖心女大論文集≫18, 1986), 105∼109쪽.

 양반지배층이 중심이었던 향회에 일부 평민들까지도 참가하게 되어 향회를 구성하는 향임층의 성격이 달라지게 되었다. 향안 작성과정에서 願納·賣鄕 등의 방법으로 어느 정도 재산이 있는 자 즉 요호들이 쉽게 향임을 맡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요호는 농업뿐 아니라 상업·광업 혹은 특수한 貢市人이나 主人·邸吏 등 다양한 분야에서 부를 축적한 사람들이다. 19세기에는 요호들이 사회적 지위를 확보하기 위한 방편으로 향임직에 적극적으로 나아갔다. 전곡이 많은 평민 가운데는 진휼할 때 出財나 매향을 통해 좌수나 별감자리를 노리는 자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고 한다.391)安秉旭,<19세기 壬戌民亂에 있어서의 「鄕會」와 「饒戶」>(≪韓國史論≫14, 서울大 國史學科, 1986), 116∼203쪽. 조선 후기의 일부 경제력이 있는 서민들은 실질적으로 신분상승을 이룩하고 그 혜택을 누리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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