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4권 조선 후기의 사회
  • Ⅰ. 신분제의 이완과 신분의 변동
  • 4. 서민층의 성장
  • 3) 서민의 문예활동
  • (2) 미술에서의 활동

(2) 미술에서의 활동

 숙종대 후반에 해당하는 1700년 무렵을 전후해서 미술에서 새로운 경향이, 나타났다. 새로운 화법의 전개와 회화관의 탄생으로 나타나게 된 이 시기의 주요한 조류로는 南宗畵가 본격적으로 유행하게 된 점, 진경산수화가 대두한점, 풍속화가 풍미하게 된 점, 서양화법이 수용된 점, 서민들 사이에 민화가 유행한 점을 들 수 있다.404)安輝濬,<朝鮮王朝 後期 繪畵의 새 傾向>(≪韓日近世社會의 政治와 文化≫, 韓日文化交流基金, 1988), 5쪽. 이 가운데 서민들과 관련이 되는 것은 풍속화의풍미와 민화의 유행이다. 이러한 경향은 조선 후기에는 회화를 향유하는 경향이 사대부에 머무르지 않고 다소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서민들에까지 확대된 데에 연유하였다.

 18세기경부터 조선 후기의 시대적 정신이나 사회경제적 여건에 연유하여 풍속화가 유행하게 된다. 풍속화는 사대부화가들의 참여로 시작되었으나 화원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되면서 꽃을 피우게 되었다. 뛰어난 풍속화가인 김홍도·金得臣·신윤복 등은 모두 화원이었고 이들이 풍속화의 창작에 참여함으로써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초반에 이르는 기간은 풍속화가 가장 융성했던 시기였다.405)鄭炳模, 앞의 책, 104∼105쪽.

 풍속화는 김홍도·김득신의 활약으로 그 전형화풍이 정립되면서 본 궤도에 오르고 신윤복에 와서 주제나 화풍에서 더욱 발전하게 되었다. 풍속화의 주인공들은 대부분 서민들이었다. 김홍도는 서민들의 생활 속에서 재미있는 소재를 포착하여 해학과 정감이 넘치는 미의 세계로 구체화하였다. 소재는 기와이기·주막·빨래터·자리짜기·벼타작·점심·대장간·논갈이·서당·무동·씨름·길쌈·활쏘기 등 대부분 농민이나 수공업자와 같은 서민들의 일상생활이나 생업에 종사하는 모습을 소재로 하고 있다.406)金元龍·安輝濬,≪新版 韓國美術史≫(서울大 出版部, 1993), 297쪽.

 이처럼 김홍도는 민간의 통속적인 모습을 그렸는데 부녀자나 아이들도 일단 그의 畵券을 펼치기만 하면 입이 딱 벌어지고 고개를 끄덕이지 않는 이가 없었다고 한다.407)鄭炳模, 앞의 책, 26쪽. 그만큼 그의 그림은 서민들에게 공감이 가는 대상이었다.

 단원이 서민들의 소탈한 삶의 모습을 그린 것과 달리 혜원은 풍류와 춘정에서 느끼는 애틋하고 솔직한 아름다움을 그렸다. 신윤복의 그림에는 남녀간의 애정이나 주막의 정경 등 서민사회의 모습을 소재로 하면서 애정이나 감정의 표현이 좀더 자유롭고 노골화되기에 이르른다. 김홍도와 신윤복과 같은 화원들에 의해 풍속화가 많이 그려진 것은 전에 비하여 일반적으로 서민들의 생활에 여유가 생기고 그에 따른 그림의 수요가 증대된 데에 기인하였다.408)安輝濬, 앞의 글, 20∼21쪽.

 19세기 중반 이후 풍속화는 민간에서의 수요가 증가하고 실용화되어 생활속에 깊이 뿌리박게 된다. 서민들이 어느 정도 구매력을 갖추게 되면서 이해하기 쉽고 친근감이 넘치는 풍속화를 선호하는 방향으로 나가게 되었다. 풍속화가 어느 신분계층까지 확산되었는가에 대해서 만족스러운 해답을 얻기는 힘든 실정이지만 19세기 한양의 거리풍경을 묘사한<한양가>에 의하면 광통교 아래의 병풍전에는 병풍으로 꾸밀 耕織圖가 놓여 있다고 한 것으로 보아 경직도가 상품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경직도는 원래 궁중 수요의 그림이었으나 이제는 누구나 경제력만 갖추면 구입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종전처럼 필요에 의해서 그림을 주문하는 것이 아니라 시장에 나와 있는 것을 구입하는 상품생산으로의 전환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求禮 雲鳥樓 소장의 회화자료에서 밝혀진 바에 의하면, 지방의 사대부가에는 떠돌이화가가 제작한 것으로 보이는 민화풍의 풍속화가 포함되어 있다. 이처럼 어느 정도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서민계층과 지방의 士人들이 새로운 수요계층으로 떠오르면서 회화의 수요층이 확산되어 풍속화의 저변확대가 이루어지고 있었다.409)鄭炳模, 앞의 책, 153∼155쪽.

 서민들의 미술활동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민화의 유행이었다. 서민들의 회화라고 할 수 있는 민화는 18세기 이후에 성장한 서민문화의 다양한 면모를 잘 보여주고 있다. 농업생산의 증대, 수공업의 발전과 시장경제의 확대 등 경제적으로 성장한 서민들의 회화에 대한 욕구에 부응하기 위하여 제작되었다.410)金元龍·安輝濬, 앞의 책, 318∼319쪽. 민화는 일반대중에게 깊숙히 파고들어 새로운 장르로 발전하였다. 우리의 자연에서 볼 수 있고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이 그림의 대상이었고 소재나 표현방법에서 아무런 구애나 구속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그림의 내용이 수백을 넘고 종류도 수천을 헤아릴 정도로 다양하다.411)정양모,<18세기의 민간예술>(≪18世紀의 韓國美術≫, 國立中央博物館, 1993).

 민화는 화원에 의해 그려진 고급민화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전형적인 민화는 떠돌이 서민출신의 화가들이 서민들을 위하여 그린 것이다. 민화를 그린 사람들은 이름 없는 화공들이었다. 시골 장터를 떠돌아다니면서 가죽에 물감으로 革筆畵를 그리고 인두를 불에 달구어 烙畵를 나무나 종이에 그려준 유랑화공 같은 무리들이었다.412)金哲淳,<民畵란 무엇인가>(≪韓國民畵≫, 中央日報, 1979), 184쪽.

 민화는 그림의 양식이 도식화되어 실용적 목적에 따라서 집안 또는 환경을 장식하는 데 잘 어울리는 그림이다. 집 안팎의 장식과 민속에 의한 관습에 따라 사용되고 생활화되었던 것이다. 이 점은 옛날 사람들이 집을 짓거나 이사한 뒤에 무당들이 와서 부른 成造歌의 黃帝풀이 중에서 그림에 관계된 부분이 있고 수영들놀음이나 봉산탈춤 등 민속극에도 방안에 붙인 그림에 대한 묘사가 있으며,≪東國歲時記≫·≪洌陽歲時記≫·≪京都雜志≫에 나오는 그림에 관한 대목 등에서 잘 알 수 있다.413)金哲淳, 위의 글, 185∼186쪽. 李圭景의≪五洲衍文長箋散稿≫에 의하면 이른바 俗畵가 여염집 병풍·족자 또는 벽에 널리 걸리거나 붙여졌으며 그러한 그림들은 틀에 박은 듯 유형이 고정되어 있다고 했다.414)金鎬然, 앞의 책, 19∼20쪽.

 18세기 후반에 성행한 풍속화와 19세기에 유행한 민화에 속화라는 호칭이 붙은 것은 속화를 민간의 회화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전에는 민간의 회화가 하나의 장르로 호칭될 만큼 성장하지 못하였으나 후기에는 구체적으로 지칭하는 개념으로 발진할 정도로 성장하였음을 말해 준다.415)鄭炳模, 앞의 책, 31쪽.

 이처럼 민화는 서민들의 생활과 깊은 연관을 맺으면서 서민들의 생활상·생각·미의식 등을 반영하였다. 민화는 정통회화를 구하기 어려운 서민대중들의 회화적 욕구를 충족시켜 주기 위하여 활발하게 제작되었던 것으로 주제와 표현기법 등은 정통회화를 많이 참조하면서 인물화·풍속화·산수화·영모화·화조화·문자화 등 폭넓은 주제들을 다루었다.

 이상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문학과 미술에서 서민들의 활동은 창작 주체로서 혹은 향유층으로서 그 어느 시기보다 활발하였다. 이는 서민들의 경제적인 성장과 사회신분의 변화 등 조선 후기에 있었던 사회경제적인 변화와 관련하여 예술에 대한 인식의 변화와 무관하지 않은 것이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기고 신분상승이 가능해진 서민들은 예술을 창작하고 감상할 수 있는 여유를 갖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총체적으로 서민층이 성장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崔珍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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