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4권 조선 후기의 사회
  • Ⅰ. 신분제의 이완과 신분의 변동
  • 5. 노비신분층의 동향과 변화
  • 1) 노비 존재양태의 변화

1) 노비 존재양태의 변화

 조선 후기에 들어와 노비제에도 큰 변화가 일어났다. 그것은 노비제가 유지되고 있던 사회경제구조가 바뀐 데서 연유한 것이다.

 노비는 그들의 소유주에 따라 국가기관이나 개인에게 예속되어 노동력을 강제로 징발당하고 있었으나, 조선 후기에 들어와서는 점차 노동력 제공의무에서 벗어나고 있었다. 예컨대 공노비의 選上·立役이 폐지되고 身貢을 납부하는 경제적 부담을 지는 형태로 전환되었으며, 또 신공의 일부도 감액에 따른 급대를 통하여 전결 등에 전가되어 조세화되어 가고 있었다. 이러한 변화는 良 役에 있어서의 조세화과정과 궤를 같이하여 나타났다. 즉 군역이 번상·입역에서 代立 → 放軍收布 → 軍布收納으로 이행된 것이나, 요역이 노동력의 직접징발체제에서 雇立制로 바뀌면서 역부담 의무자에게 물납을 통하여 경제적 부담을 지우는 현상과 동일한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었다. 이러한 변화의 배경에는 말할 것도 없이 사회경제구조의 변화가 그 근저에 깔려 있었다.

 조선시대의 노비는 그들의 사회경제적 존재양태에 따라 크게 세 가지 유형으로 구분할 수가 있다. 첫째 率居·仰役(사노비)이나 선상·입역(공노비)의 형태로 노동력을 직접 수탈당하는 자, 둘째 外居하면서 상전의 토지(사노비)나 국가기관의 토지(공노비)를 경작하여 신분적·경제적으로 예속되어 있는 자, 셋째 외거하여 상전이나 소속관사의 경제기반과 관계없이 생활해 가면서 신공만을 납부하는 자, 즉 신분적으로만 예속되어 있는 자 등이 있다. 이러한 유형 가운데 조선 전기에는 첫째와 둘째의 유형이 대종을 이루었으나, 조선 후기에는 셋째의 유형이 우세해졌다.

 조선왕조에 있어서 노비도 다른 신분층과 마찬가지로 재산을 소유할 수가 있어서 전답과 같은 토지뿐만 아니라 노비까지 소유한 자들도 있었다. 재산을 소유한 노비는 신분적으로는 소유주에게 예속되어 있었으나, 경제적으로는 소유주나 소속관사의 예속에서 벗어나 보다 자유로운 위치에서 경제활동을 영위할 수 있었을 것이다.

 조선 후기에는 상품화폐경제의 진전과 농업생산력의 발전으로 계층분화가심화되어 한편에서는 ‘無土不農之民’, 즉 토지에서 유리된 자들도 많이 있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농업경영의 합리화와 廣作을 통해서 부를 축적한 자들도 있었다. 노비신분층도 이러한 변화에 예외일 수는 없어서 일부이기는 하지만 경제적으로 독립하여 상당한 규모의 토지를 소유하고 있는 자들도 나타났다. 조선 후기 노비제의 붕괴는 이러한 경제적 변화와 밀접히 관련되어 진행되었다.

 조선시대에 노비들이 소유한 재산은 노비에게 자녀가 있으면 자녀에게 상속되지만, 자녀가 없는 경우에는 공노비인 경우 국가기관에, 사노비인 경우 소유주에게 그 소유권이 귀속되도록 규정하고 있었다.416)≪經國大典≫권 5, 刑典 公賤. 이러한 법규에 따라 내 수사를 비롯한 각 궁방에서는 자녀가 없이 죽은 無後奴婢의 재산을 속공하고 그 토지만을 대상으로 별도로 전답안을 작성하고 있었는데, 이러한 전답안은 일반적으로≪內需司無後奴婢某記上田畓打量成冊≫이라 명명되었다.

 조선 후기에 있어서 무후노비 재산의 속공은 궁방전 확대요인의 하나로 언급될 정도로417)和田一郎,≪朝鮮土地制度及地稅制度調査報告書≫(朝鮮總督府, 1920), 155쪽.
安秉珆,<17·18世紀朝鮮宮房田の構造と展開>(≪朝鮮社會の構造と日本帝國主義≫, 龍溪書舍, 1977), 15쪽.
상당한 양에 달했던 것 같다. 무후노비의 재산이 무시할 수 없는 규모였음은 조선 후기에 국가에서 노비추쇄사업을 실시하면서 도망 또는 隱漏奴婢뿐만 아니라 무후노비의 재산도 빠짐없이 추쇄하고 있었던 것에서도 잘 드러난다.

 원래 노비가 소유한 전답이나 노비 등의 재산을 상전이 차지하는 경우 그 재산은 ‘奴某記上田畓’이나 ‘奴某記上奴婢’라고 표기되고 있었다. 기상전답을 중심으로 노비의 토지소유 상황을 살펴보면 공사노비를 막론하고 상당한 정도의 재산을 소유하고 있는 자들이 있었다.

 內奴婢의 경우≪무후노비기상전답타량성책≫을 분석하면, 자료의 한정에도 불구하고 토지를 소유하고 있던 자들이 함경도와 경기도를 제외하고 거의 전국적으로 분포하고 있다. 물론 현재 밝혀진 지역 이외의 곳에서도 내노비가 거주했으며, 이들 중에서도 토지를 소유하고 있던 자가 많이 있었을 것이다.

 내노비의 토지소유 내용은 계층분화가 심하여 최하 2負 2束을 소유한 자에서부터 최고 9結 6束의 광대한 토지를 소유한 자에 이르기까지 아주 다양하였다. 이들이 소유한 실제 경작면적에 따라 계층분화를 살펴보면, 전체 69명 가운데 25부 미만 22명, 25부 이상∼50부 미만 13명, 50부 이상∼1결 미만 19명, 1결 이상∼5결 미만 14명, 5결 이상 1명으로, 25부 미만의 토지를 소유한 자가 가장 많았다. 그러나 1결 이상의 토지를 소유한 자도 15명(22%)이나 되어 일반 군현의 양안을 분석한 결과와는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이들이 소유하고 있는 토지에는 밭이 많고 陳田의 비율이 아주 높았던 점을 감안하면 농업소득에 있어서는 일반 양인농민보다 결코 우위에 있지만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점을 감안하여도 69명의 내노비 가운데 49명(70%)은 자신의 소유토지만으로는 먹고 살기가 힘들었을 것으로 보이며, 10명(14%)은 생산성이 높은 논을 많이 소유하고 있어 부의 축적이 가능한 부농으로 간주될 수 있었다.418)全炯澤,≪朝鮮後期 奴婢身分硏究≫(一潮閣, 1989), 28∼30쪽 참조 이들은 내수사로부터 경제적 예속관계에서 벗어나 신분적으로만 예속되어 있었다. 조선 후기에 있어서 이들 내노비는 전기와는 달리 궁방전의 경작이나 관리에 동원되지 않았으며, 독자적으로 경제생활을 영위하면서 내수사에 대해서는 신공만을 바치고 살아가고 있었다.

 조건 후기의 고문서자료에서 확인된 「기상전답」을 소유한 사노비의 토지소유 경향을 살펴보면, 전체적으로 소유규모가 적어 50부 미만의 토지를 소유하고 있던 노비가 대부분이지만, 1결 이상의 토지를 소유하고 있는 자들도 있었다.419)全炯澤,≪朝鮮後期 奴婢의 土地所有-「記上田畓」을 중심으로->(≪韓國史硏究≫71, 1990), 67∼76쪽. 이 정도의 토지를 소유한 노비는 양인 또는 양반 못지 않을 정도의 재산소유자였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기상전답」의 소유주로 확인된 노비는 대부분 그들의 전체적인 토지소유의 규모가 밝혀지지 않았다. 전체적인 소유규모가 밝혀진다면 이들 가운데에는 더 많은 토지를 소유한 자도 있었을 것이다.

 조선 후기 노비신분층의 재산취득 방법으로는 일반 양인신분층과 마찬가지로 개간·상속·매득을 상정할 수 있다. 조선 후기 고문서자료에 의하면 사노비의 재산취득 방법으로는 상속과 매득이 중요한 기능을 했으며, 개간은 노비의 재산취득에 있어서 별로 중요한 수단이 못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개간을 할 때는 관으로부터 立案을 발급받아 소유권을 확보하여야 했는데, 노비신분으로는 그것이 거의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노비신분층의 재산취득에서 중요한 구실을 했던 상속은 특히 양반의 孼子女들에게 많은 재산소유를 가능하게 했다. 이러한 면에서 많은 토지를 소유하고 있는 노비는 양반의 얼자녀였을 것으로 보인다. 노비의 자녀가 상속받은 재산가운데 규모가 작은 경우는 대체로 노비의 아버지나 할아버지대에 매득한 토지가 많았을 것이다. 실제로 이들 토지 가운데에는 아버지대에 매득한 토지도 상당수 있었다.

 매득에 있어서는 토지규모가 작지만, 많은 노비들이 이를 이용하여 재산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렇게 볼 때 노비신분층이 재산을 취득하는 일반적인 방법은 상속보다는 매득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물론 노비신분층이 토지를 매입하기 위해서는 그 값을 치를 수 있을 만큼의 부를 축적해야 했을 것이다. 이것은 조선 후기의 사회경제적 변화에서 가능했을 것이다.

 이렇게 하여 조선 후기로 올수록 노비의 재산 소유경향은 늘어나고 있었지만, 노비신분층은 그들 자신이 남의 재산으로 소유되고 있었으므로 그 소유권에는 일정한 한계가 있었다. 그렇다고는 하여도 노비신분층의 재산소유 경향의 증가는 일부이기는 하지만 노비들로 하여금 신분의 질곡에서 벗어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이와 같이 조선 후기에 들어와 일부이기는 하지만 노비 가운데서 경제적 부를 축적한 자들이 나타났다는 것은 노비제 변동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사실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신분적 예속관계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경제적 예속관계의 유지가 필요한데, 이들은 이미 경제적 예속관계에서 벗어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라에서는 납속책 등을 통하여 이들을 신분적 예속관계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주었는데, 이러한 면에서 노비신분층의 경제적 성장이 조선 후기의 노비신분 변동에 한 배경이 될 수 있었다.

 고문서 분석을 통하여 조선 후기 노비신분층의 존재양태를 살펴보면 조선전기의 그것과는 사뭇 달라지고 있었다.

 조건 후기의 주요 노비소유계층인 양반들의 노비소유 경향을 살펴보면 조선 전기에는 솔거·앙역노비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았으나, 조선 후기에는 외거노비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아지고 있음을 볼 수 있다.420)金容晩,<朝鮮後期 奴婢에 關한 一硏究>(≪嶠南史學≫2, 嶺南大, 1986), 11쪽. 이러한 외거노비 비율의 증가는 노비소유주의 농업경영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즉 조선전기에서 후기로 감에 따라 농장경영에 부역노동을 주로 제공하던 솔거·앙역노비의 비중이 격감하는 대신 並作半收에 기초한 佃戶로서의 외거노비의 비중이 더욱 증대되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또 조선 전기에는 외거노비의 상당수가 상전의 전답을 경작하여 생활해 가고 있었으나, 조선 후기에는 상전의 전답 이의에 자기 자신의 전답이나 제3자의 전답을 경작하면서 생활하고 있는 노비가 늘어나고 있어, 점차 소유주로부터 경제적으로 독립하게 되고 신분적으로만 예속되는 경향이 증가하고 있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그것은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노비의 재산소유 경향이 조선 후기에 증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사노비 거주지와 상전이 소유한 토지의 소재지가 거의 일치하지 않은 경향과 노비들이 상전의 토지를 경작하고 바친 賭地額이 다른 소작인과 거의 차이가 없었던 것으로 미루어서도 알 수 있다.421)全炯澤, 앞의 책, 67∼72쪽. 이는 외거노비가 상전이 아닌 다른 사람 소유의 토지나 자신의 토지를 주로 경작하고 있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조선 후기에는 이러한 노비가 점차 늘어나면서 이들 노비에 대한 상전의 지배력이 약화되었다. 따라서 노비들의 끈질긴 도망에 대해서도 사실상 추쇄가 지극히 어려웠으며, 추쇄를 실시하는 경우에도 겨우 도망지역을 확인하는 데 그치는 일이 많았다. 말하자면 노비소유주의 노비통제에 한계성이 드러났고, 이제 노비의 거주지를 상전이 자의로 결정할 수 없는 상황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실제로 조선 후기에 작성된 고문서를 보면 추쇄에 의하여 還現된 도망노비의 대부분이 외거노비로 존재하고 있었다. 또한 매득한 노비들의 대부분이 외거노비로 존속하고 있었으며, 방매한 노비들 역시 외거노비가 대부분이었다. 추쇄한 노비나 매득한 노비를 외거의 형태로 소유하고 있었던 것은 방매한 노비가 대부분 외거노비였던 것과 아울러 노비들의 가족구성이나 경제기반을 해치지 않고 노비소유를 재편한 조선 후기 노비소유의 경향을 반영한 것으로 이해된다.

 조선 후기의 노비들은 대체로 가족단위로 같은 거주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이것도 노비들이 가족단위로 거주하면서 생활하고 있던 현실의 반영으로 생각된다. 이와 같이 조선 후기의 노비는 가족을 생활단위로 하여 독립적인 생활기반을 갖고 상전으로부터의 경제적 예속상태에서 벗어나 신분적으로만 예속되어 신공만을 바치면서 살아가고 있는 자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상전의 노비에 대한 지배력은 약화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것 또한 조선 후기 노비제 변동의 한 배경이 되기에 충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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