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4권 조선 후기의 사회
  • Ⅰ. 신분제의 이완과 신분의 변동
  • 5. 노비신분층의 동향과 변화
  • 2) 노비정책의 전환
  • (2) 신공의 감액

(2) 신공의 감액

 조선 후기에 들어와 공노비의 선상·입역이 폐지됨에 따라 이들은 이제 신공납부의 의무만을 지게 되는 납공노비로 바뀌었다. 말하자면 선상·입역의 의무에서 납공외 의무로 신역부담의 형태가 전환된 것이다. 선상·입역의 의무를 지고 있는 노비가 납공의 의무만을 지게 된 것은 양역의 부담이 직접적인 번상·입역 대신 경제적 의무인 군포의 납부로 바뀌는 軍丁收布의 경우와 그 궤를 같이하여 나타났다. 이것은 중세사회에 있어서의 부역제 일반이 무너져가는 과정에서 나타난 현상이었다. 또한 도성에 거주하는 사람의 일부가 고용되어 노비가 하던 일을 대행하게 되었다는 것은 조선 후기에 고용노동이 일반화하는 사회경제구조의 변화와도 일치하는 것이다.

 납공노비의 부담은 원래 1년에 奴는 면포 2필, 婢는 1필 반을 각각 그들의 소속에 따라 각기 司贍寺나 尙衣院·養賢庫 등에 바치도록 되어 있었으나, 현종 8년(1667)과 영조 31년(1755)에 각각 반 필씩 감액된 뒤 영조 50년에 비의 신공을 완전히 없앰으로써 노만이 良丁과 같이 1필의 신공을 바치게 되어 신공에 관한 한 양인과 노비의 부담이 동일하게 되었다. 신공 감액조처는 공노비뿐만 아니라 사노비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었다.

 노비의 신공을 감액하여 준 것은 노비의 부담이 과중하여 노비들이 이를 면하기 위하여 도망하거나 모피하는 현상이 만연하여 이들의 부담을 덜어줌으로써 이를 막아보기 위함이었다. 특히 영조 31년의 감공조처는 균역법이 실시된 직후에 단행된 것으로 양역변통으로 양인의 부담이 경감된 후 노비의 부담이 상대적으로 더 무겁게 되자 다시 양역변통의 예에 따라 노비의 부담을 덜어주려고 한 것이었다.

 노비신공의 감액으로 노비를 소유하고 있던 관청에서는 그만큼 수입이 줄어들기 마련이었다. 따라서 정부에서는 이를 일반재정에서 보전하여 주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리하여 정부에서는 중앙 각사의 노비는 상의원과 성균관소속 노비를 제외하고는 모두 호조에 이속시키고, 이속시킨 인원의 신공에 해당하는 양은 호조에서, 감액된 신공에 해당하는 양은 균역청의 재원으로 각각 감액된 액수만큼 급대해 주도록 조처하였다.425)≪內寺奴婢減貢給代事目≫(서울大 奎章閣圖書 No. 17203) 참조. 내노비의 감공액도 궁별로 감액된 신공액만큼을 균역청의 재원으로 급대하도록 조처하였다. 또 婢貢혁파에 대한 급대는 賑穀 150만 석을 떼어주어 그 耗穀으로 충당하도록 하였다.426)≪承政院日記≫1,349책, 영조 50년 3월 14일. 이렇게 감액된 노비신공을 국가의 다른 재원으로 급대해 줌으로써 노비신공의 일부가 일반조세로 전가된 셈이다.

 노비신공의 감액과 비공의 혁파로 노비신분층의 공식적인 부담이 양인과 다름이 없게 되어 국가로서 볼 때는 노비나 양인이 수취대상으로서는 동일하게 되었지만, 재정적인 면에서는 감공에 따른 급대량의 증가로 국가의 부담은 오히려 증가하고 있었다. 이것도 국가재정에 압박을 가하여 노비제의 변통을 불가피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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