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4권 조선 후기의 사회
  • Ⅱ. 향촌사회의 변동
  • 1. 친족과 촌락구조의 변화
  • 1) 친족·문중조직의 변화
  • (2) 문중활동의 전개양상

(2) 문중활동의 전개양상

 조선 후기, 특히 17세기 중엽 이후를 분기점으로 조선 전기와는 다른 친족의식이 일반화됨에 따라 그러한 기초단위조직들이 모여 이루어지는 향촌사회의 조직과 구조도 변화되기에 이른다. 즉 향촌사회에서 문중조직이 활성화되자 족계의 조직이나 족보의 편찬, 동족마을의 형성발달, 문중서원·사우의 건립과 같은 다양한 문중활동들이 전개되는 배경이 되었다. 이러한 문중활동의 기본적 모체는 역시 인적인 조직으로서 族契(花樹契·門中契)의 마련과 동족마을의 형성일 것이다. 족계는 선영의 수호와 봉제사를 원활하게 수행하기 위한 목적으로 조직되어 문중결속력의 강화나 문중재산의 형성 등 경제적인 기반을 마련하는 구심체였고,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기초적 기반이 바로 지연과 혈연으로 얽혀진 동족마을이었다. 조선 후기의 문중활동은 결국 족적인 기반인 족계 및 동족마을과 향촌사회조직인 서원·사우를 구심점으로 하면서 여러 형태의 문중활동들을 병렬적, 혹은 순차적으로 이루어냈다.

 그런데 문제는 이같은 조선 후기 문중이 지니는 의미와 그 결속의 범위정도를 어느 선으로 규정할 것이냐 하는 점이다. 왜냐하면 지금까지는 사용하는 쪽의 입장에 따라 편차가 매우 컸기 때문이다. 예컨대 문중의 범위가 작게는堂內家族의 의미로 쓰여질 수도 있고, 크게는 姓과 本을 같이 하는 동족 전체(오늘날의 대동보 범위)를 의미할 수도 있다. 이처럼 문중활동의 주체나 그 범위가 다양하게 적용됨으로써 그 연구결과로 나타나는 사회사적 성격 또한 많은 편차와 혼란을 가져올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477)「門中」의 범위를 만약 유서가 보다 오랜 16∼17세기의 堂內家族의 활동(종가나 사당)이나 19세기 중후반이나 일제시기에 집중적으로 재결속되는 양상을 보이는 大宗中과 같은 전국적인 규모의 동족조직의 활동(대동보, 시조추숭)까지로 확대할 경우, 조선 후기의 사회변화과정에서 생성되었고 기능하였던 「門中」의 시대적 동인 성격도 불분명해질 우려가 있다. 그러나 조선 후기의 문중활동은 그 내용상 향촌사회에서 특정 성씨집단(家門)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활동의 구체적 적용장 역시 동족마을이나 몇 개의 동족마을이 연계되어 이루어내는 향촌(군현)단위였다. 또 문중조직이 기대하는 바나 조직강화의 목적, 활동내용 역시 향촌사회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따라서 문중과 문중활동의 범위는, 첫째 몇 개의 당내가족이 연계된 혈연·생활공동체적인 동족마을의 문중활동과, 둘째 군현단위의 지역적 배경과 그 사회적 기반에서 자신들의 족적인 지위를 확보하기 위하여 入鄕祖·中始祖·派祖를 정점으로 군현내 隣親的 여러 동족마을의 조직들이 집중적으로 모여들고 맺어지는 향촌사회구조와 직결되는 문중활동으로 제한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478)李海濬,≪朝鮮後期 門中書院 硏究≫(國民大 博士學位論文, 1993). 그리고 내용적으로 첫째의 경우는 문중활동이 촌락공동체 조직의 성격 및 운영문제와의 연관479)예를 들면 「同族集團:異姓親族」, 「宗孫:支孫」, 「族契:大同契(村契)」, 「門中財産:村落財産」, 「齋室:書堂」 등과 같은 비교구도가 그것이다. 속에서 파악할 필요가 있고, 둘째의 경우는 향촌사회의 지배구조나 역학관계와 보다 크게 연계하여 그 결속력의 편차나 위상문제480)이와 관련된 비교구도로는 대소문중(계파별)편차, 타성과의 관계, 향권주도나 영향력의 문제, 정치적(당색)인 활동문제, 서원·사우건립 등 향촌활동이 주목될 수 있을 것이다.를 중점적으로 파악하여야 한다고 생각된다.

 조선 후기의 일반적인 문중활동 양상을 몇 개의 커다란 유형으로 나누어 보면 대체로 ① 족계창립 ② 종가와 사당건립 ③ 서당(정사)과 학계마련 ④ 樓亭과 齋室건립 ⑤ 서원·사우건립과 운영 ⑥ 족보와 선조문집이 발간 ⑦ 旌閭포장과 추증 등이 있다.481)李海濬, 앞의 글(1993).

 이러한 조선 후기 문중활동의 가장 기본적 조직이 바로 족계(화수계·문중계)이다. 족계는 선영의 수호와 봉제사를 원활히 수행하기 위한 목적으로 문중의 공동재산 형성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어 위에서 든 모든 활동들이 이를 토대로 병렬적, 혹은 순차적으로 이루어지게 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각 가문의 상징적 배출인물(顯祖)의 유무, 문중활동이 집중되는 시기를 주도한 인물의 성격과 위상(정치·학문·향촌활동), 사회경제적 지위와 기반에 따라 시기별 및 활동내용상의 차이가 나타나게 마련이다.482)이러한 지역적 문중활동의 상황과 특정가문의 문중결속의 모습, 그 결과 각 가문별 사회적 권위의 유지와 경제외적 강제의 창출과정이 이 시기의 향촌사회구조를 밝히는 주된 관심의 대상일 수 있다.

 그러면 조선 후기 향촌사회에서 경쟁적으로 일어나는 이러한 문중활동의 양상(경향)을 계열화하여 보자. 그 기초는 역시 ① 가문지위를 현양할 구체적인 현조의 존재, ② 문중활동이 이루어지는 시기의 사회분위기와 주도인물의 역량(향촌활동·정치력·연속성)이 있어야 가능했다. 이러한 조건이 갖추어진 경우라도 이를 가능하게 하는 ③ 인적·조직적·경제적 기반이 없으면 불가능하였으며, 그런 의미에서 최근까지도 계속되는 문중활동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를 시기별 특징과 비교하면서 구도화하면 대체로 다음과 같이 일반화할 수 있다.

첫째, 顯祖의 행적이나 유적을 중심으로 문중활동을 전개하는 경우 둘째, 시기별 향촌사회구조의 변화와 경쟁적 문중활동과 연계되는 경우 셋째, 동족의 인적·조직적 기반을 주된 근거로 문중활동을 전개하는 경우

 첫째, 현조의 행적이나 유적을 중심으로 문중활동을 전개하는 경로로는 ① 행적 재평가(추숭·정려·신원·추증) ② 유적의 현창(유허비·신도비·행장·누정·재실·정사·영당) ③ 향촌사회 및 국가인정(서원·사우건립) ④ 문중권위의 홍보(파보·족보·문집〔世稿·實記〕간행)로 연결된다. 이 과정에서 각 시기별로 주도한 인물의 활동범위나 지위, 동족의 경제력, 인적 조직력이 주요 인자가 된다.

 둘째, 시기별 향촌사회구조의 변화와 경쟁적 문중활동과 연계되는 경로로는 모두 일률적인 것은 아니나 대체적으로 ① 15∼16세기:내외친족(족계·내외보), 사족결사체(향약계·동계·누정), ② 16∼17세기:부계친족, 족계(동계·문중계), 종가·선영·재실·서당, ③ 17∼19세기:족보(파보)·정려·서원(사우)·문집, ④ 18∼19세기:대동보·세고·실기간행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특히 향촌단위 사회에서 이루어지는 문중활동의 궁극적인 귀착점으로 주목되는 서원(사우)의 건립활동도 이와 관련하여 주목된다. 문중을 중심한 서원·사우의 건립과정은 시기별로 볼 때, 16세기∼17세기 초반에는 국가적 도학자나 충절인의 제향이 일반적이고 문중은 영당이나 사당(재실)을 건립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17세기 후반∼18세기 후반에는 서원보다 사우건립이 증가하고, 국가적 +문중적 인물의 제향이 증가되어 결국 서원을 남설하는 주된 요인이 된다. 이 시기에 문중결속력이 미약한 2∼3개의 가문이 협력하여 서원·사우를 건립하거나, 遠祖(始祖·中始祖)를 추배하여 제향하는 경향도 엿보인다. 18세기 후반∼19세기 이후는 문중별, 혹은 파별로 서원·사우가 분립되는 양상을 보이면서 제향인도 다수가 추배되는 경향을 보여준다.

 셋째, 동족의 인적·조직적인 기반을 주된 근거로 하는 경우도 생각할 수 있다. 초기 동족적 결속력이나 향촌사회에서의 지위가 강고하지 못한 상태에서는 결사체적 사족계나 내외친족이 망라되는 족계를 조직하였다가 동족마을로 성장하면서 동성동족적인 족계(화수계·문중계)를 마련하여 동족적 기반을 강화한다. 그리하며 선영수호를 위한 규약이나 경제적 기반으로 노비·전답·산림을 마련하고 재실·종가·문중서당 같은 관련기구를 갖추기도 하고, 그들의 축적된 권위와 기반을 향촌사회에 투영시키는 활동, 예컨대 동족연대 및 선조현창을 위한 족보(파보)·행장·비석건립, 나아가 정려포장이나 서원·사우의 건립활동을 벌여나간다.

 물론 이러한 문중세력의 성장과정은 각 가문별로 상징적 배출인물의 유무, 문중활동을 주도하는 인물의 지역적 위상(정치·학문·문중활동), 사회경제적 지위와 기반, 그리고 이를 가능하게 하는 지역의 사회분위기에 따라 차이가 나타난다. 이를 향촌사회의 구조변화와 연결하여 각 시기별로 추이를 살펴본다면 대체로 다음과 같이 이해할 수 있다. 즉 15∼16세기에는 친족체계상으로 내외친족이 망라되는 족계나 이념적·사상적으로 동질성을 강조하는 사족의 결사체 들이 향촌사회에서 일반화되었다. 이는 고려말 이래의 토성이족에 대한 사족의 상대적 지위확보나, 성리학적 이념을 바탕으로 지방통제에 사족들을 이용하려는 중앙정부의 이해와 결부되어 留鄕所·社倉·鄕約 등의 자치적 기구들이 갖춰지고 기능했던 것과 연관된다. 사족들은 군현단위의 유향소나 향규(향안)조직에 가담하기도 하고, 학문적 성향이나 학연을 모체로 하는 同榜契·師友契·詩契 등을 조직하여 상대적 구별과 지위를 보장받으려 하였다. 그런가 하면 지연적인 기반 위에서 서재나 정사를 지어 講學을 통한 학연을 만들기도 하고 또는 정자나 누각을 통한 詩情의 교환과 현실에 대한 의논도 하였다. 이렇게 사족결사체의 결성과 운용은 이에 참여하는 개인의 능력이나 활동이 가문의 지위형성에 결과적으로 영향을 미쳤으나, 조선 후기와 같은 정도의 영향력이나 활용은 불가능하였다.

 그러나 사족지배체제가 국가의 통치이념이나 제도상으로 고착되는 16세기 후반 이후 17세기에는 우선≪주자가례≫에 입각한 예제가 보급됨에 따라 친족의식이 적장자를 중심으로 하는 부계친족체계로 정착되고, 세대가 내려오면서 가문의 인적 확대의 결과로 小宗적인 가계의 형성도 이루어졌다. 이는 다시 몇개의 소종을 연결하는 계파나 동족마을의 형성을 가능하게 함으로써 족계(동계·문중계), 종가·선영·재실·서당 등 족적 기반에 토대를 둔 여러 기구들이 만들어지게 하였다. 그러나 이 시기에는 아직 경쟁적인 문중성향이 필요할 만큼 사족들의 사회적 지위가 불안하지도 않았고, 또한 그것을 용납할 만큼 사회의 공론과 의식도 해이되지 않았다. 이 시기의 서원조직이 본연의 「士者藏修」와 「先賢奉祀」라는 기능을 수행하면서 사족들의 공적 기구로 향론의 중심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런 사회분위기가 지속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양란 이후 급격한 사회경제적 변화는 향촌사회에서 더욱 심각한 현실로 다가왔다. 물론 이에 대하여 사족들은 그 나름대로 기존의 사족지위와 이념을 재확립하려는 노력을 다각도로 모색하고, 조정의 관인들도 대응책에 부심하였다. 16세기 이래 확립된 사족 지위는 양란 이후 급격한 사회경제적 변화와 함께 점차 위축되었고, 특히 양반신분층의 급격한 증가로 인한 양반권위의 축소와 자체 분열현상은 종래와 같은 사족들의 향촌지배를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조선 전기의 토향적 성격이 강했던 사족 가운데 많은 세력들이 양란의 와중에서 기반을 상실하였을 뿐 아니라, 그 복구과정에서 기득권을 지키려는 성씨들간에도 이해의 대립으로 인한 갈등이 표출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이렇게 점차 사족 중심의 향촌지배체제가 이완되고 새로운 향촌세력의 대두로 사족들이 누리던 지위가 도전을 받게 되자, 사족들은 이전과는 다른 형태로 자신들의 지위와 기득권을 유지하려 하였다. 이제 사족들은 과거의 향안·향규·향약 등과 같은 一鄕의 지배보다는 혈연적인 족계를 만들어 문중의 결속력을 확보하기도 하고, 혹은 지연과 혈연(동족)적인 촌락을 중심으로 자기방어를 모색하였다. 각 문중별로 족적인 기반과 유대, 조직을 강화하는 수단으로 족보(파보)를 간행하기도 하고, 동족마을을 중심으로 하는 동성동족적인 족계(화수계·문중계)를 조직하여 입향조나 계파시조, 혹은 현조의 묘소와 제각을 건립하기도 하였다. 선영수호를 위한 규약이나 경제적 기반으로 노비·전답·산림이 마련되며, 재실·종가·문중서당 같은 관련기구들은 바로 이 같은 사회적 배경 속에서 활발하게 건립·운영된 것들이었다.

 이같은 현실대응의 방안으로 마련되고 축적된 문중의 권위는 그 기반과 배경을 달리하는 문중간의 상대적 경쟁을 유발시키고, 향촌사회의 변화과정에서 우위권을 확보하기 위한 여러 형태의 문중활동, 예컨대 선조현창을 위한 족보(파보)·행장편찬, 비석건립, 나아가 정려나 서원·사우건립 등을 통해 문중의 지위를 홍보하고 그 기능을 확대하고자 하였다. 특히 서원·사우의 건립과 이를 통한 가문의 결속, 선조의 추숭은 다른 어느 활동보다도 주목되었다. 서원·사우의 건립은 향촌단위 사회에서 이루어지는 문중활동의 궁극적 귀착점이었던 것이다. 문중 중심의 서원·사우 건립과정을 시기별로 볼 때, 16∼17세기 초반까지만 하여도 공론을 바탕으로 도학자나 儒賢, 또는 국난 때 충절인이 아니면, 각 가문이 원하는 형태로의 서원건립은 어려웠다. 그리하여 각 가문은 家廟를 확장하는 선에서 그들 현조의 영당이나 사당을 마련하거나, 혹은 그의 활동근거지나 묘역에 제각을 겸하는 재실을 건립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들은 후대에 문중의 역량이 보다 완비되고 사회 분위기가 유리하여졌을 때 서원·사우로의 건립유서로 이용되었다.

 그러나 17세기 후반 이후 특히 숙종대를 분기점으로 당파적 서원의 건립이 확산되면서 제향인물의 기준이 모호해지고, 道學·유현을 제향하던 서원보다는 氣節이나 行誼를 실현한 인물들이 대거 제향되는 사우의 건립이 일반화되는 추이 속에서 시조나 원조·입향조·파조·중시조·현조 등 문중인물의 제향도 보다 쉬워졌다. 바로 이러한 경향은 갑자기 문중서원을 늘어나게 만들었고, 결국 이는 곧 조선 후기 서원남설의 주요 요인이 되었던 것이다. 18세기에 들어와서 향촌사회에 문중기반을 마련한 문중세력들은 거의 빠짐없이 경쟁적으로 서원이나 사우를 건립하였고, 만약 그와 같은 조건이 마련되지 못한 경우에는 비슷한 조건의 몇 개의 문중이 합력하여 서원을 건립하거나, 기존의 서원에 추배하고 제향하는 길을 모색함으로써 서원을 통한 향촌사회에의 영향력 행사와 참여를 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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