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4권 조선 후기의 사회
  • Ⅱ. 향촌사회의 변동
  • 1. 친족과 촌락구조의 변화
  • 2) 동족마을의 발달과 촌락조직의 변화
  • (1) 동족마을의 발달

(1) 동족마을의 발달

 조선 후기의 촌락의 변화상을 살피는 데는 조선 후기에 일반화의 추이를 보여주는 동족마을의 형성과 발전을 주목하게 된다. 물론 이제까지 많은 연구가 이루어진 동족마을은 대체로 班村인 경우가 많고, 그 때문에 일반 民村이나 役村의 동족적인 기반에 대하여는 크게 주목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양반가문의 동족기반 강화와 그로 인한 동족마을 형성은 조선 후기 전체적인 촌락구성이나 촌락간의 관계에 커다란 변화를 일으키는 또 다른 요인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동족마을은 친족적인 연대가 강한 반면 다른 성씨나 동족이 아닌 경우에 대하여는 폐쇄적인 성향이 강하였으므로 동족마을이 일반화되었다면, 이 역시 조선 후기 향촌사회에서 촌락구성의 모습을 크게 변화시킬 수 있는 요인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동족마을은 동성마을, 혹은 씨족마을로 불려지면서 사회학·인류학분야에서 많은 연구가 이루어져왔다. 동족마을은 대체로 하나의 지배적인 同姓同族集團이 특정마을의 주도권을 가지고 집단적으로 살아온 마을을 말하지만, 어떤 시각에서 보느냐에 따라 그 성격이 다양하게 정의되고 있다.483)동족마을이란 ① 동일한 선조, 동성동본자가 한 마을에 집단거주(善生永助, 앞의 책), ② 동조·동족의식을 기본으로 집합적 행동을 통하여 결속된 지연적 생활공동체, 즉 단지 동족의식에 기초한 靜的 共存態에 그치지 않고 선조제사, 친목, 경제적 협동, 자위자강의 기능을 다하기 위해 지연의 이해를 갖고 집합적 행동을 하는 생활공동체(金斗憲,≪韓國家族制度硏究≫, 서울大 出版部, 1969), ③ 마을에 존재하는 비교적 다수의 동성동본자들이 조직체를 갖거나 집단행동을 취하는 마을(崔在錫,≪韓國農村社會硏究≫, 一志社, 1975), ④ 촌락내의 조직과 씨족조직이 일치하거나, 지배적 영향력이 일치할 때, 수적 위세나 선조의 권위가 존속되는 경우 그 자손들의 사회적·경제적 권위가 보장되는 마을(鄭震英,<朝鮮後期 同姓마을의 形成과 社會的 機能>,≪韓國史論≫21, 國史編纂委員會, 1991) 등이다.
한편 이러한 동족마을의 일반적 성격에 대하여, 崔協은 동성마을이 대체로 이동이 없고 폐쇄적인데 반하여 비동성 마을(집성마을·각성마을)은 개방적이며, 평등성이 보인다고 비교를 하는가 하면, 李光奎는 친족을 X축으로, 공동체를 Y축으로 하는 구성을 가지고 있다고 정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각각 다르게 정의할지라도 동족마을의 형성배경이 대체로 적장자 중심의 가부장적 宗法體系의 진전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에는 일치하는 경향이다. 조선 전기의 친족체계가 새로운 종법질서의 정착으로 가부장적인 부계친족체계로 일반화되자 촌락의 주도집단 구성도 이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다는 논의가 바로 그것이다.484)李樹健,<良洞의 歷史的 考察>(≪良佐洞硏究≫, 嶺南大 民族文化硏究所, 1990). 그리고 조선 전기의 내외친족 관념과 이에 따른 자녀균분제 아래서 각 마을의 구성원들은 성씨는 다르지만 내외손 인척으로 동거하면서 가재와 전답, 산림과 水澤·墓山 등을 공유하는 서로 협조적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고 보는 것이다.485)조선 전기의 마을은 대체로 내외친족이 동거하면서 소수의 사족(양반호)과 다수의 평·천민호로 구성되는 모습이 일반적이었다고 생각된다.

 조선 전기 散村들이 점차 성씨를 주축으로 하는 혈연적 集村으로 새롭게 변모하게 되는데는 조선 건국 이래 사족들의 이거와 정착과정이 연관되어 있었다. 여말선초의 전환기에 사족들은 妻鄕이나 外鄕 등 연고지를 따라, 혹은 鄕·所·部曲 등 행정편제상 중앙정부의 통제가 철저하지 않은 지역을 확보하여, 자신들의 새로운 정착지로 선정하였다. 이들은 대개 입향조나 낙향조로 불려지는 이거사족으로서 이후 동족의 확대와 조직화과정을 통하여 그 지역의 후손들에 의하여 派祖나 중시조로 추앙을 받았다.

 16세기 이후 이들은 본격적으로 진행된 川防(洑)의 개발을 통해 농지를 확대해 갔으며 또 수전농과 이앙법의 발달에 힘입어 사회경제적 지배력을 확보하게 되었다. 농지가 평야 저지대로 확산되고 집약농법에 근거한 소농민경영의 생산방식으로 생산력이 증대되자, 이를 주도했던 재지사족들의 사회경제적인 지위가 향상되었고, 그들이 주축이 된 새로 생긴 촌락들은 급속하게 성장하였다. 촌락공동체적 생산방식의 도입이 촌락발전과 맥을 같이하고 있었던 것이다. 대체로 이러한 과정에서 경제력과 인력동원 능력을 지닐 유력사족층은 그 중심적 역할을 하게 마련이었고, 결국 이를 주도하는 사족들의 사회적 위상도 강화되었다. 그런데 17세기 후반 이후 이러한 사족들의 독점적 지위가 도전받게 되자, 사족가문들은 족적인 결속력의 강화를 도모하였고, 이것이 바로 조선 후기에 나타난 문중활동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16∼17세기 전반에도 사족들의 사회경제적 지위가 유지되었다고는 하지만, 족적 규모의 지속적인 팽창 속에서 특수하게 경제력을 계속 확대해 간 일부의 경우를 제외한다면, 장기간의 균분상속제 시행으로 말미암아 사족들은 가산이 분할되는 결과를 초래하였고, 생산력이 저하되고 생활이 궁핍해지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즉 조선 전기 내외친족이 동일시되는 친족관념하에서 재산의 자녀균분은 사족들이 재산확대의 수단과 과정으로 긍정적인 작용을 하지만, 계속적인 균분상속의 시행은 사족의 재산소유를 영세화시키는 결과가 될 수도 있었던 것이다. 결국 17세기 중엽 이후의 차등상속은 이에 대한 대응현상이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 아래서 조선 전기에 2∼3개의 이성친족이 동거하면서 혈연과 지연에 근거한 동족적 유대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과는 기본적으로 다른 마을의 구성과 운영방식을 채택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와 같이 동성동족의 族統과 경제적 근거가 중심이 되어 형성된 동족마을은 종가를 중심으로 하는 결속력과 이를 통한 사회경제적 특권의 유지와 존속을 도모하게 마련이었다. 따라서 이들 동족마을은 조선 후기 다양한 문중조직과 활동의 중심체 내지는 기초단위로서 존재하였고, 이를 통한 특정 성씨의 마을내 주도권은 더욱 강화되었다. 이 과정에서 이전 시기처럼 이해를 같이하던 이성친족이나 방계친족의 지위가 감소되었고, 이들이 점차 마을조직에서 이탈함으로써 보다 완전한 동성동족마을의 인상을 갖추게 되었다.

 결국 동족마을의 형성은 가부장적 종법질서의 일반화 경향과 일정한 관련을 가지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족적 기반의 확대와 이에 따른 대응방식으로 형성되었을 가능성도 크다. 동족마을의 형성시기에 대하여는 막연하게나마 지금까지 17세기 후반 이후로 보아왔다. 그러나 이는 각 가문의 족적 기반이나 그들이 향촌사회에서 차지하는 지위와 배경에 따라 많은 편차가 있으므로 일률적으로 말할 수는 없다.

 1930년대 한 조사에 의하면 당시 전국적으로 동족마을이 모두 1만 5천여 개소가 존재하고 있었으며, 이는 전체 마을의 3분의 1 정도를 점유하는 것이다. 이 가운데 저명한 동족마을 1,685개를 형성시기별로 보면, 500년 이상 207개소, 300∼500년 646개소, 100∼300년 351개소, 100년 미만 23개소, 그 밖에 불명한 곳이 458개소로 나타나고 있다.486)善生永助, 앞의 책. 이 자료를 통해서 보면 대체로 300∼500년전, 즉 15∼17세기에 동족마을이 집중적으로 형성된 것처럼 보여진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로 볼 때 이같은 동족마을의 형성시기는 문제가 많다. 왜냐하면 동족적 기능을 발휘하거나 동족적 기반이 확보된 연대는 이와 매우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현지조사를 통해 이러한 통계상의 동족마을 형성시기는 대개 현재의 동족마을 주민의 직계혈조로서 특정한 인물이 처음으로 입향하는 시기를 代數(대개 1代 30년)로 소급하여 추정하는 수준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따라서 위의 통계는 동족마을의 형성기반을 마련한 선조나 입향시조의 정착기로 보는 것이 사실에 가깝다. 즉 이 통계는 촌락의 분화나 이주경향을 살필 수 있는 자료는 될 수 있지만, 그것을 바로 동족마을 형성시기로 이해할 수는 없다. 가문별로 사회경제적 지위나 기반확대의 과정에서 편차가 있기 때문에 일률적으로 말할 수 없으나, 장흥 傍村의 사례를 보면 長興魏氏의 입 향시기는 1510년대 전후이다. 그러나 실제 이들의 문중활동은 18세기 중엽 이후 본격화되고, 촌락내에서 주도권을 갖는 시기는 빨라야 1734년 어간을 소급할 수 없음이 자료로 확인된다.487)李海濬,<朝鮮後期 長興 傍村의 村落文書>(≪邊太燮博士華甲紀念 史學論叢≫, 1985).
―――, 앞의 글(1993).
다시 말하면 동족마을에서 문중기반이 작용할 수 있는 상대적 지위의 인정과 보장, 인물의 배출, 족원의 증가 등이 가능하려면 위의 「유서마련 시기」보다 적어도 2세기(혹은 5∼6代 이상) 정도가 지나야 실질적으로 동족기반이 확보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보여진다. 따라서 일괄 적용에 문제는 있으나 앞의 통계를 150∼200년 정도 내려 시기를 잡는다면 동족마을의 형성시기는 대체로 맞을 것으로 보여진다.

 결국 동족마을의 형성은 문중활동이 보편화되는 시기와 연관시켜 이해할 수 있지만, 이는 17세기 중엽 이후에 나타나는 가부장적인 친족관념의 폭넓은 정착과 진전의 결과로 시차를 두고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488)물론 이 경우도 양반사족가문의 경우에 한정되는 논의이고, 특수민촌(역원이나 장인촌)을 제외한 일반민촌의 경우 동족마을의 형성은 훨씬 후대에나 가능했다고 보여진다. 부연하면 조선 전기의 사족의 이거와 정착으로 이루어진 새로운 사족촌락의 발생, 그리고 이를 사회경제적으로 뒷받침하는 농지의 확대과정, 여기에 더하여 친족 및 가족제도의 변화가 연계되면서 1∼2세기의 시차를 두고 동족마을이 발달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제 조선 후기의 이들 동족마을은 족계조직의 모체로서 다양한 문중활동의 기초단위이자 중심처로 기능하였다. 그것은 우선 동족마을이 종가를 중심으로 족적인 전통이나 경제적 기반을 대표할 뿐만 아니라, 문중의 활동목적이 「顯祖의 追崇과 그 권위의 재활용」에 있었다는 점을 염두에 둘 때 동족마을의 족적 전통과 유서는 다른 어느 것보다 먼저 선택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동족마을의 기반이 형성되면서 (혹은 형성 과도기에 그 결집력을 확보하는 수단으로써) 문중활동은 다양한 형태로 전개될 수 있었던 것이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