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4권 조선 후기의 사회
  • Ⅱ. 향촌사회의 변동
  • 2. 지방행정체제의 변화
  • 1) 중앙통제적 지방제도의 강화
  • (1) 감영체제의 발전

(1) 감영체제의 발전

 양란 이후 정부는 체제붕괴의 위기의식 속에서 다각도의 국가재건 방안을 모색하였다. 사상적으로는 성리학적 규범을 강화하여 공적 질서의 회복과 거듭된 패전으로 실추된 권위를 만회하려 하였다. 그러나 조선사회가 농업을 기반으로 했던 점에서 농경지의 황폐화, 인구의 유리·감소라는 인적·물적 토대의 상실이 더욱더 커다란 문제가 되었다. 이에 따라 기저로부터 흔들리는 조선사회를 복원하기 위해서 다각적인 노력이 기울여졌다. 생산력 복원책으로서 陳田과 신전개간, 대대적인 감면·감세조치가 시행되었고, 농업노동력이자 부세부담자인 양민의 확보를 위해 호적작성, 號牌(紙牌)·軍籍사업, 奴婢推刷 및 奴婢從良法 등이 시행되었다. 또한 부세제도 개혁의 일환으로 양전사업과 大同法이 전국적으로 실시되었다. 이어 별도로 국가재정의 확보방안으로 둔전의 확대, 納粟策의 추진, 기저의 유통경제의 발달에 대응한 상공업정책, 화폐주조사업 등이 시행되었다.

 그런데 위와 같은 여러 정책이 시행되는 곳은 향촌사회이며 시혜의 당사자는 농민들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정책이 지속적이고 효율적으로 시행되기 위해서는 통치와 수취의 하부단위인 향촌사회의 제도적 정비가 수반되어야만 했다. 이에 따라 정부는 국가재건을 위한 법제의 완성으로써 지방제도 및 행정에 관한 새로운 조치를 취해 나가지 않을 수 없었다.502)吳永敎,≪朝鮮後期 鄕村支配政策의 轉換-17세기 國家再造와 관련하여-≫(延世大 博士學位論文, 1992), 32쪽.

 물론 제도적으로나 외양적인 면에서 큰 변화는 없었고 조선 전기≪經國大典≫적인 체제의 틀이 조선 말기까지 기본적으로 유지되고 있었다. 그러나 뒤에 언급되듯이 감영체제의 강화 및 수령권의 강화로 특징지워지는 중앙정부의 제반 통제책의 전개와 향촌사회내에서의 자연촌의 발전과 농민층의 점차적인 성장, 이에 수반된 기존 재지사족의 향촌지배의 약화로 지방제도의 실질적 운영질서는 새로운 모순구조를 잉태하면서도 지방제도의 체계화를 지향함과 함께 피라미드식 중앙통제체제의 강화의 성격을 띠어 갔다.

 우선 중앙과 군현 사이의 매개적 역할을 하는 道制의 변천에 대해서 살펴보자. 도의 장관인 觀察使의 권한과 기능은 이미 고려 말부터 강화되어 왔다. 고려시대에는 감사의 직함이 말해 주듯이 임기 6개월의 按察使의 역할은 관내 수령의 치읍을 주로 안찰·염찰하는 데 있었지만, 고려말 威化島回軍 이후 李成桂가 실권을 장악하고 안찰사를 都觀察黜陟使로 개칭하면서 감사의 권능이 한 도의 행정·군사·사법을 포괄한 도정 전반을 관찰하고 수령의 근무성적의 고과와 포폄을 행하는 것으로 강화되었던 것이다.503)李樹健,≪朝鮮時代 地方行政史≫(民音社, 1989), 201쪽.

 그러나 조선 전기에는 전국이 8도체제하에 있으면서도 도에 따라 감영과 감사의 직제에 차이가 있었다. 평안·함경도는 양계지방이란 특수사정으로 인해 처음부터 임기 2년으로 ‘率眷兼尹’(가솔을 거느리고 부임하여 감영소재 읍의 수령을 겸하는 것)한 데 비하여 이남 6도는 도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있으나 처음에는 임기 1년에 ‘單身到界’하여 감영에 별도의 읍관을 둔 채 임기 동안 계속 도내 여러 읍을 순력했던 것이다.504)李樹健, 위의 책, 189∼190쪽. 宣化堂·澄淸閣과 같은 상설 관아시설은 필요없었고 다만 감사가 도내 제읍을 순력하는 과정에서 부유하고 넉넉한 界首官이 主營 또는 留營으로 존재하면서 도내 각종 공사집행의 중심지, 進上封上, 監試 및 도내 각종 公簿의 보관소(監庫)로서의 기능을 가진 데 불과하였다. 조선 전기의 감사는 수령의 도임과는 다르게 그 道界에 발을 디디면 곧 해당 도의 감사로서의 직무가 시작되므로 감사의 부임을 「到界」라 하였다. 따라서 신구 감사의 교대는 수령처럼 관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도계지점에서 이루어졌다.505)李樹健, 위의 책, 47∼48쪽.

 물론 세종·중종·선조대에 걸쳐 감사의 久任과 겸윤·겸목문제가 조정에서 누차 거론되어 한때 양계감사와 동일한 제도를 실시한 적도 있었으나 그러한 시기는 모두 잠시였다. 양란을 격고 난 이후 급격하게 달라져 가는 향촌사회를 안정된 지배체제내에 끌어들이기 위한 정부의 새로운 시도가 자주 이루어지면서 감사의 구임과 겸관문제가 더욱 절실하게 논의되었다. 그 결과 영조 30년대에 접어들면서 이남 6도도 약간의 시간적 선후의 차이는 있었지만 양계와 동일한 감영과 감사직제를 갖게 됨으로써 비로소 8도는 명실상부하게 일체화된 도제가 확립되었던 것이다.506)李樹健, 위의 책, 187∼192쪽.
충청도와 경상도는 영조 34년(1758)에 각각 公州와 大丘에, 전라도는 영조 35년 全州에, 강원도와 황해도는 영조 36년 原州와 海洲에 감영을 설치함으로써 감영체제가 이루어졌다. 경기도는 漢城 주위라는 특수성으로 인해 다른 도와는 달랐다.

 이남 5도의 대구·전주·공주·원주·해주가 각기 해당 도의 감영소재 읍으로 감영의 기존시설을 모방하여 19세기 이후와 같은 규모를 17세기부터 갖추어 갔던 것이다. 그래서 각 도의 감영마다 명나라의 布政司를 모방하여 감사의 근무처를 布政堂, 그 문을 포정문이라 명명하였고, 감사의 기능이 ‘承流宣化’·‘澄淸’에 있다는 데서 선화당·징청각과 같은 감영의 대표적인 건물들이 갖추어지게 되었다. 이러한 감사의 관아를 비롯하여 都事·中軍·檢律·審藥 등 관원의 집무실, 營吏·營奴婢의 거처, 각종 창고 등이 설치되었다.507)李樹健, 위의 책, 231∼233쪽.

 물론 이러한 보좌기구들은 이미 감사의 권능이 강화되기 시작하던 고려 말부터 점차 갖추어져 가고 있었다. 도가 행정구역으로 정착되고 관찰사가 도의 장관으로서 수령에 대한 규찰과 도내 제반행정을 처결하게 되면서, 관찰사를 보좌하고 행정실무를 담당할 사무기구의 설치가 필요하였다. 그리하여 도관찰출척사가 처음 파견되던 고려의 창왕 원년(1388)에 이미 감영기구가 설치되었고 그 이후 어느 정도 구조적 변화를 거쳐≪경국대전≫의 완성으로 감영기구는 관찰사의 보좌관격인 도사·판관·심약·검률과 행정실무를 담당하는 영리로 그 구조적 고착을 보게 되었다.

 도사는 여말 이래 經歷과 함께 首領官으로 통칭되던 관찰사의 보좌관으로서 세조 12년(1466) 경력이 혁파된 이후에도 조선 말기까지 각 도에 한 사람씩 배치되어 여러 가지 중요한 직임을 담당하였다. 도사는 관찰사의 직임을 보좌할 뿐만 아니라 조선 전기에는 관찰사와 수령들의 불법을 규찰하여 直啓論彈하는 外臺로서의 기능을 담당하였던 것으로 생각되며, 감사의 유고시에는 감사의 직임을 대행하기도 하였다.508)李羲權,<朝鮮後期의 觀察使와 그 統治機能>(≪全北史學≫9, 1985), 103쪽.

 그러나 명종 이후부터 사정은 달라져서 도사의 지위는 불안해지고 신분은 잘 보장되지 않아서 사소한 과오나 조그마한 사건으로도 징계를 받아 파직되는 예가 많았다. 특히 후기에 올수록 징계로 인한 교체가 많아짐에 따라 辭遞로 인한 퇴임도 급속히 증가하였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8도 감사가 17세기 이후부터 양계와 같이 솔권겸윤함에 따라 도사는 감사와 판관의 중간에 끼이게 되었고 또 감영체제가 종전의 行營에서 留營으로 바뀜에 따라 도사의 기능이 위축되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17세기 이래 도사가 담당하고 주관하는 사무는 점차 상관인 감사에게 침식되어, 도사는 유명무실한 빈자리나 다름없어 앉아 하는 일이 별로 없었다.509)李樹健, 앞의 책, 223쪽. 언제부터인가 도신과 수령을 탄핵하던 외대로서의 기능은 상실하고 관찰사의 속관으로서 감영에 기식하는 한직으로 전락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변화와 함께 도사들이 부임을 기피하는 일도 많아져서 정부는 엄벌로 다스릴 것을 거듭 천명하기도 하는 등 대책에 부심하였지만, 이러한 추세는 이후 계속되었다.510)李羲權, 앞의 글, 103∼104쪽.

 판관은 조선 전기에는 府·犬都護府·牧과 일부 도호부 등 대읍에 설치되어 각각 감사와 수령을 보좌하던 종5품 관직이었다. 그 뒤 冗官이라는 이유로 모두 혁파되었으나 관찰사의 구임법의 실시와 함께 관찰사의 겸목이 전국에 확대실시되면서, 판관은 관찰사를 대신하여 관찰사가 겸직하는 읍의 행정을 맡아 수행하던 관찰사의 보좌관적 지위를 확고히 하게 된 것이다.511)李羲權, 위의 글, 105쪽.

 이러한 보좌관 이외에 감영에는 일찍부터 행정실무를 담당하는 영리와 영노비가 있었다. 상설관아를 갖지 않았던 고려시대의 안찰사 밑에도 영리가 존재했었다. 영리는 감사가 순력할 때 향도 내지는 안내자로서 또는 감사의 명령을 받아 수령의 치읍과 민정을 염탐하는 역할도 맡았다. 영리의 존재상태와 기능은 도제의 변천에 따라 경기·양계 및 남부 5도가 서로 달랐다. 감사가 후기처럼 감영소재 읍관을 겸하고 있을 때는 서울의 京邸吏와 같이 각 영문에 파견된 營邸吏가 있었지만, 전기의 이남 6도 감사는 각 읍의 戶長層에서 차출된 영리만이 존재했던 것이다.

 영리의 인원수는 영노비와 함께 각 도와 시기에 따라 서로 달랐지만, 대체로 전기에 비해 후기로 올수록 증가했다. 영노비는 감사가 감영의 소재읍관을 겸임하지 않을 때는 필요성이 별로 없다가 양계감사부터 솔권겸윤하게 되자 군현의 관노비처럼 확보되기 시작했다. 후기로 올수록 감영의 기구와 시설이 커짐에 따라 감영노비도 계속 늘어갔다.512)李樹健, 앞의 책, 225∼229쪽.

 조선 후기로 내려오면서 관찰사의 통치행태가 순력에서 유영으로 변화해 갔던 것은 관찰사의 기능이 外憲的인 규찰기능보다 方伯的 기능, 즉 행정장관으로서의 기능이 더욱 중시되어 갔던 것513)李羲權, 앞의 글, 112쪽.으로 파악할 수 있을 것이며, 결국 중앙과 지방군현을 연결시켜 주는 중간기구의 확실한 정착으로서 지방행정제도의 발전을 의미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감영체제의 발전과 함께 나타나는 현상으로서 주목되는 것은 감사에 임용되는 관리의 품계가 낮아지는 경향을 보인다는 점이다. 원래 감사의 법정품계가 종2품이기 때문에 거기에 상당하는 관인이 감사에 선임되는 것이 원칙이지만, 실제 각 도 감사의 관품을 조사해 보면 종2품을 중심으로 그 이상인 정2품 이상과 그 이하인 정3품이 많은데, 이럴 때는 京官職과 마찬가지로 行守法이 적용되었다. 대체로 조선 초기에는 종2품 이상이 많이 임용되었고 중기에는 법정의 관품대로 종2품이 주류를 이루다가 후기에는 정3품 通政이 감사로 임명되는 경우가 많아졌다. 경기·경상·평안도와 같이 국가가 매우 중시하는 도에는 정2품 이상이 선임되었고 황해·강원도와 같은 작은 도에는 종2품 이하가 임명되는 경우가 많았다.514)李樹健, 앞의 책, 195∼196쪽.

 이것은 감영체제의 안정된 발전으로 인하여 굳이 이전처럼 수령과 지방토착세력을 위압하기 위해 높은 품계의 관리를 감사로 파견해야 할 필요성이 적어졌다는 점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수령에 대한 감사의 殿最기능이 유명무실화된 데 따른 빈번한 어사의 파견, 八道句管堂上制와 같은 지방군현에 대한 중앙정부의 직접적인 통제기능의 강화조치에서 기인되기도 하였던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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