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4권 조선 후기의 사회
  • Ⅱ. 향촌사회의 변동
  • 3. 호구정책의 강화
  • 2) 오가작통법의 시행

2) 오가작통법의 시행

 위와 같은 누적·탈역이 증대와 농촌의 불안·동요를 극복하기 위해서 조선 후기의 위정자들이 채택한 방책은 주로 五家作統法과 號牌法의 강화·실시였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오가작통법은 당시 지식층들이 추구하여 마지않던 三代의 유제라는 점에서, 또 이미 선왕들이 시행한 바 있고≪경국대전≫에도 규정되어 있다는 점에서 가장 선호하고 우선하였던 방책이었다.575)오가작통법에 대해서는 다음의 연구들이 있다.
申正熙,<五家作統法小考>(≪大丘史學≫12·13, 1977).
李能和,<五家作統法의 沿革>(≪李能和全集 續集≫, 永信아카데미 韓國學硏究所, 1978).
吳永敎,<朝鮮後期 五家作統制의 構造와 展開>(≪東方學志≫73, 延世大 國學硏究院, 1991).
―――,<19세기 사회변동과 五家作統制의 전개과정>(≪學林≫12·13, 延世大 史學會, 1991).
鄭震英,<조선 후기 국가의 對村落支配와 그 한계>(≪嶠南史學≫4, 嶺南大 國史學會, 1994).

 일정한 수의 가호를 단위로 하여 隣保조직을 편성·운영하자는 건의는 조선 초기부터 제기되고 있었다. 태종 6년(1406)에는 「鄕舍里長之法」이, 이어 다음해에는 「隣保正長之法」이 건의된 바 있었고, 세종 10년(1428)에는 漢城府가≪周體≫의 鄕遂制와 唐의 隣保法들을 거론하면서 比里制의 실시를 건의한 바 있었다. 한성부내 각 坊의 하부조직으로서 5家를 1比로, 100家를 1里로 편성하여 比長과 里正을 두고, 城底 각 面에는 30가를 1리로 편성하여 勸農을 둠으로써 “相保相守 以成禮俗”하게 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들 건의는 모두 논의로만 그쳤을 뿐, 그 어느 하나도 실시되지 못하였다. 그리고 세종 32년 정월에도 梁誠之가 備邊 10策의 하나로 5가를 小統으로, 10가를 1統으로 편제하여 호구성적을 강화하자고 건의하였지만, 역시 시행되지 못하였다.

 그런데 문종 즉위(1450) 이후 단종 2년(1454)에 이르는 그 어느 시기에 오가작통제는 전격적으로 제정·시행되었다. 단종 3년 정월에 강도·절도의 방지책으로써 이들을 은닉하는 경우 그 가호가 속한 통 전체를 변방으로 이주시키는 조치가 내려지고 있고, 이어 그 해(세조 원년;1455) 9월에는 세조가 같은 조치를 다시금 확인하면서 추가로 統主에게 貯水灌漑의 조정업무를 맡기고 있는 기록들이 보이기 때문이다. 성종 16년(1485)에 반포된≪經國大典≫에서 규정하고 있는 다음과 같은 조문이 바로 이 오가작통제의 조직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서울과 지방 모두에 5가를 1통으로 하고 통에는 統主를 둔다. 그리고 지방에는 5통마다 里正을, 面마다 勸農官을 두고, 서울에는 1坊마다 管領을 둔다(≪經國大典≫권 2, 戶典 戶籍).

 그러나 그 목적이나 기능에 대해서는 규정하고 있지 않아 알 수가 없다. 다만 그것이 호적조에 나타나고 있는 것으로 보아서 호구의 파악, 유민의 방지, 균역의 확보 등을 주목적으로 하고, 그에 더하여 신분의 분별, 재난의 구조, 도적의 방지, 鄕風의 교정 등도 수행하도록 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다시 말해서 조선왕조의 군현제가 지녔던 對民지배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여러 기능이 갖추어졌을 것으로 여겨진다.

 오가작통법은 이같이 하여 16세기 중엽에 조선왕조 행정 말단의 法定 인보조직으로 성립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제도는 그 법적인 위상과는 달리, 향촌현장에서는 제대로 실시·운영되지 못했던 것으로 나타난다. 실시 당초에는 어떠하였는지 살필 길이 없으나, 성종 말엽 이후로는 법규대로 시행되지 못하고 지역과 수령에 따라 설행되기도 하고 폐지되기도 하였으며, 또 양반사족이 작통에서 제외되기도 하고 10가로 작통·운영되기도 하였다.576)숙종 원년(1675) 이전의 호적대장 중에는 作統이 찾아지지 않는다. 다만 광해군 원년(1609)과 현종 13년의<蔚山府戶籍大帳>에서 대체로 10호 간격으로 ‘統’字가 朱書되어 있는 것이 보일 뿐이다. 이로써 보면 숙종 원년 이전에도 군현에 따라서는 10家作統 등의 변형으로 작통법을 계속 시행하여 온 곳이 있었지 않았나 생각된다. 한편 한성부에서는 군현의 경우와는 달리 오가작통이 계속적으로 시행되었으리라 여겨지는데. 현종 4년(1663)의<漢城北部戶籍大帳>에는 작통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오가작통법이 井田制를 바탕으로 하였던 周代의 향수제와는 달리, 일정한 경제적 기반과 연계됨이 없이 다양한 존재양태를 이루고 있는 향촌 가호들을 무조건 5가 단위로 편제하고 운영하고자 한 데에 원인하지 않았나 생각되고 있다. 그리고 이와 함께 당시 사회가 양반 위주의 신분제사회였음에도 불구하고 구성가호의 신분적 상이를 고려하지 않았다는 점과,577)단종 3년(1455)에 강도·절도의 방지를 위해 범인을 은닉하는 가호가 있을 경우, 그 가호가 속한 統 전체를 徙邊하도록 조치 할 때는 사족(流品·蔭子弟)을 제외하고 작통하게 한 경우가 있었다(≪端宗實錄≫권 13, 단종 3년 정월 을축). 혈연 및 생산관계로 일정한 유대를 맺고 있는 촌락의 질서·관행들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였다는 점 등이 그 원인을 이루었을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그리하여 오가작통제는 그 상부조직으로 마련된 面里制가 당시의 실정에 맞지 않아 17세기에 이르도록 정비·시행되지 못했던 것처럼, 숙종 원년(1675)에 이르러 다시 정비·강행될 때까지 제대로 시행되지 못하였다.

 16세기 말에 일어난 임진왜란은 이미 흔들리고 있던 조선의 지배체제 전반에 커다란 동요를 가져왔다. 그리고 이러한 동요는 뒤이은 병자호란으로 더욱 확대·연장되었다. 조선의 지식인과 위정자들은 ‘國家再造’로 표현할 정도로 심각한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실제 정치에서는 근본적인 대응책보다는 부세제도의 개선 등을 통해 우선 농민의 안정과 재정의 확보를 도모하는 임기적이 고도 미봉적인 방법으로 대응하여 갔다. 그러한 속에서 무너진 사회기강·질서도 다시금 확립시켜 보고자 하였다

 오가작통제는 이러한 추세 속에서 호패법·향약 등과 함께 또 다시 거론되기 시작하였다. 우선 강제적으로나마 농촌의 안정, 재정의 확보, 사회기강의 수립을 꾀하는 데 도움이 되는 적절한 제도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광해군 때 잠시 실시되었다가 폐지된 호패법이 인조 3년(1625)에 다시 강화·실시되자 이의 구속력을 더하기 위해 오가작통법의 시행이 거론되었다. 하지만 정묘호란으로 인하여 불과 2년 만에 호패법의 시행이 중단되자, 그 논의도 가라앉고 말았다. 그리고 인조의 지적대로 일정한 생업과 거처가 없어서 흩어지는 농민들에게 먼저 생계를 해결하여 주지 못하면서 구속적인 제도만을 강제해서는 효과를 얻을 수 없다는 인식 아래 이들 제도는 더 이상 거론되지 못하였다.

 효종이 즉위하면서 표방·추진한 北伐정책은 양역인구의 확보와 함께 유민의 규제·방지를 다시금 시도하게 하였고, 그것은 다시 오가작통제와 호패법의 시행을 거론하게 하였다. 그리고 그 결과, 호패법보다 오가작통법의 시행이 우선은 적절하다는 데로 의견이 모아져 효종 9년(1658)에는 그 절목이 작성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연이은 흉년으로 그 실시는 연기되었고, 효종은 승하하고 말았다.

 효종의 뒤를 이은 현종은 군비의 증강보다는 피폐한 농촌을 수습하는 데 주력하고자 하였다. 淸의 위치가 이미 확고해진데다가 그들의 침입도 당분간은 없으리라고 본 까닭이었다. 곧 大同法의 설행을 확대하고 量田을 단계적으로 실시하는 한편, 부세부담의 균등을 기하면서 농민의 결집을 도모하기 위한 방법의 하나로 오가작통법과 함께 호패법·향약들을 다시금 거론하게 되었다. 그 결과, 현종 5년(1664)에 또 다시 오가작통법이 채택되어<五家統詳定節目>을 제정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번에도 흉년으로 인하여 실시되지 못하고 뒷날로 미루어졌다.

 효종과 현종년간에 시도한 오가작통제의 실시는 숙종대로 이어졌다. 현종대에 이 제도의 실시를 적극 건의하였던 尹鐫가 숙종 원년(1675)에 戶籍式年을 맞이해서 또 다시 강력하게 건의하고 나섰던 것이다. 그의 노력은 마침내 그해 9월에<五家統事目>을 제정·반포하게 하였고, 「乙卬式 戶口成籍」도 이에 의거하여 시행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오랫동안 유명무실한 가운데 그 정비·시행이 논의되기만 하여 왔던 오가작통법은 숙종 원년에 비로소 전국에 일률적으로 실시하게 되었으니, 21개조로 이루이진 그 시행세칙(事目)은 대체로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578)≪備邊司謄錄≫30책, 숙종 원년 9월 26일.

 조직·편제

 ◦ 모든 民戶를 가구의 다과나 빈부에 관계없이 그 隣聚에 따라 5家로 1統을 만든다. 그리고 5가 가운데 지위와 나이가 있는 사람으로 統首를 삼아 통내의 일을 관장하게 한다(제1조).

 ◦ 5가로 作統하고 남는 집이 있으면 다른 面으로 넘기지 말고 남는 수대로 작통하여도 무방하다(제3조).

 ◦ 5통∼10통의 里를 小里로, 11통∼20통의 리를 中里로, 21통∼30통의 리를 大里로 하고, 각 리에 里正과 里有司를 정하여 里內의 일을 관장하게 한다(제 4조).

 ◦ 統·里는 면에 속하는데 각 면에는 都尹과 副尹 각 1인을 둔다. 리의 호구가 많은 순서대로 제1리, 제2리로 한다(제5조).

 ◦ 里正과 面尹은 반드시 그 고을에서 지위와 명망이 있는 사람으로 한다. 만약 이를 피하고자 하는 사람이 있으면 徒配의 律로 다스린다(제6조).

 ◦ 面尹은 里正을 거느리고 里正은 統首를 거느리는데 각기 3년에 교체한다. 면윤으로 공적이 많은 사람은 상부에 천거하여 상을 주도록 한다(제21조). 統牌·紙牌의 작성

 ◦ 각 통마다 가호의 순서대로 民戶의 이름을 한 장의 종이에 적거나 牌를 만들도록 한다. 統牌式은 다음과 같다(제7조).

   某邑  某面  第幾里  第幾統

        某戶  某役

         :

 ◦ 그리고 각 戶 아래 거느리고 있는 男丁의 職役과 技藝 등을 적고, 부녀의 수와 가옥의 間數 등을 적는다(제8조).

 ◦ 季朔마다 각 통에서는 이 패를 조사하여 바로잡아 里任에게 보고하고, 이임은 이를 수령에게 보고한다. 만약 나이가 틀리거나 패에 올라 있지 않거나 役名이 거짓이면<戶籍事目>에 의하여 논죄한다. 그리고 통내에 의심스러운 사람이 보이면 수시로 수령에게 보고하도록 한다(제9·15조).

 ◦ 통패에 등록되지 않은 사람은 民數에 들어 있지 않으니 살해되어도 살인죄로 묻지 않는다(제13조).

 ◦ 이사가 잦은 각종 匠人들은 거주지에 가까운 통에서 통패 끝에 올려 통수를 늘 검사하여 바로잡도록 한다(제12조).

 ◦ 16세 이상의 남정은 거주지와 역명·성명·나이 등을 종이에 적어서 이정과 이유사의 差銜과 官司의 印을 받아 출입할 때 지니고 다니도록 한다. 이것이 없는 사람은 관청에 들어갈 수도 없고 송사에 나아갈 수도 없다(제10조).

 ◦ 지금부터 戶口單子 머리에도 戶籍에서와 같이 某里·某統·第幾家를 적어 위조를 방지하도록 한다(제11조).

  

  기능·권장

 ◦ 5가는 반드시 모여 살면서 서로 농사를 돕고 출입을 지키며 질병을 구한다(제2·17조).

 ◦ 통·리의 사람들은 서로 돕고 관리한다. 서로가 혼사와 상사를 돕고 환난을 걱정하며 착한 일을 권면하고 악한 일을 경계한다(제14조).

 ◦ 里에서 내를 치고 제방을 보수하고 길을 닦고 다리를 만드는 일이 있으면, 작은 것은 1리의 힘을 모으고, 큰 것은 1면의 힘을 모아 때를 놓치지 않도록 한다(제18조).

 ◦ 1면 중 여러 사람이 모이기 좋은 곳을 골라서 봄·가을로 모여 尊卑分等을 講信하고 부형들은 동리 자제들을 가르쳐 삼가도록 한다(제19조).

 ◦ 社에 倉이 있는 것은 古制이다. 각 리와 각 통에서는 가능한 한 財穀을 모으고 본 읍에서도 힘닿는 대로 도와서 常平의 제도를 행하도록 한다(제20조).

 ◦ 이제부터 모든 민호는 다른 읍으로 이사할 때 그 이유와 이사할 곳을 적어 관의 허락을 받은 후 옮기도록 한다(제16조).

 숙종 원년에 실시된 오가작통법은 이처럼 5가를 단순히 작통하는 데만 그치지 않고, 조선 건국 이래로 논의·실시되어 왔던 다양한 향촌운영·통제책과 「均役除弊」의 방책들을 종합·수렴한 것이었다. 면리제와 유기적인 관계를 구축하면서 인보제와 향약이 추구하는 바를 널리 수용하였는가 하면, 한편으로는 호패법과<호적사목>에서 추구하고 있는 누적·탈역의 방지와 이를 통한 균역 및 재정확보의 구현을 수렴하기도 한 것이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조선의 향촌지배의 기본원리·제도가 모두 농축된 성격의 제도였다고 하겠다.

 이러한 오가작통법은 이후 숙종 3년에<寬恤事目>의 제정·반포를 통해 보완되고, 紙牌가 牙木牌로 환원되는 강화책들이 뒤따르기도 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사회·경제적 실정은 「균역제폐」를 이루지 못하게 하였을 뿐 아니라, 향촌의 통제도 이루지 못하게 하였다. 오가작통법은 도리어 탐관오리의 가렴주구를 돕는 혹독한 제도로 비판될 만큼 여러 가지 물의만을 일으켰던 것이다.

 숙종 37년(1711)에는<良役變通節目>이 마련되고 里定法이 시행되었지만, 오가작통제는 여전히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하여 영조 5년(1729)에는 다시<五家統法申明舊制節目>(10개조)이 반포될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오가작통법은 날로 유명무실하여졌다. 영조 25년에는 좌의정趙顯命이 오가통의 명목은 있으나 절목에 따라 거행하는 일은 없으니 진실로 개탄할 일이라고 상소할 정도였다.

 하지만 당시 정부에서는 수령의 善政만을 당부할 뿐, 달리 대처할 방도를 지니지 못하였다. 자주 닥쳤던 기근과 전염병에다가 이속들의 가렴주구마저 겹쳐 농민의 유망·이동이 광범하게 전개되지 않을 수 없는 실정에서 오가작통이 지향했던 결속과 책임과 의무를 요구하는 것 자체가 무리였던 것이다.

 오가작통법은 이후 정조 15년(1791)에 면·리임의 지위와 권한을 강화하는<尊位成冊>으로 또 한 차례 보강되기는 하나, 끝내 법에서 정한 위상과 기능을 희복하지 못하고 유명 무실한 제도로 전락하고 말았다. 외척의 세도로 인하여 정치·사회기강의 문란이 한층 더하여 갔기 때문이다. 누적·탈역을 저지하고, 나아가 양역인구를 증대시켜서 균역을 이루어 보고자 하는 시도가 그 기반에서부터 좌절되었음은 부언할 필요가 없겠다.

 그러나 오가작통제는 명목으로나마 꾸준히 존속되어 고종 때인 건양 원년(1896)에 새로운 호적제도가 실시될 때 十家作統으로 전변·수용되었다. 그리고 이에 이르는 과정에서 한때 천주교와 동학을 금압하고 그 교도를 색출하는 방편의 하나로 기능하기도 하였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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