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4권 조선 후기의 사회
  • Ⅱ. 향촌사회의 변동
  • 3. 호구정책의 강화
  • 3) 호패법의 강화

3) 호패법의 강화

 조선 후기에 양역인구의 확보와 농촌사회의 안정을 도모하기 위하여 논의되고 시행되었던 또 하나의 시책은 號牌法이었다.579)號牌法에 대해서는 그와 관련된 분야의 연구에서 단편적으로 언급된 것은 많으나, 이를 주제로 한 연구로는 다음의 1편만이 보인다.
李光麟,<號牌考-그 實施變遷을 中心으로->(≪庸齋白樂濬博士還甲紀念國學論叢≫, 1955).
16세 이상의 모든 男丁에게 호패를 발급하여 지참하게 함으로써 신분의 확인과 아울러 모든 남정의 거주지별·신분별 구성양태를 파악하고, 나아가 유망 및 피역의 방지, 징병조역의 관리 등에 기여하고자 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 제도 역시 조선 후기에 이르러 비로소 마련되고 시행된 것은 아니었다. 이미 태조 7년(1398)에 그 실시를 논의한 바가 있고, 태종 13년(1413)에는 처음으로<號牌事目>을 제정·반포하여 3년간 실시한 바도 있었다. 그리고 이후 세종이 재위한 32년 동안에도 호구의 정확한 파악을 위하여 5차례나 그 시행이 논의되었지만, 실시되지 못하다가 세조 5년(1459)에 이르러 17개조의 사목을 새롭게 제정하여 10년 동안이나 강력하게 시행한 바 있었다.

 그러나 이들 호패법은 모두 목적한 대로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시행 초기에는 대체로 성공하였으나, 불과 2·3년 만에 누탈과 피역이 조장되어 오히려 농촌을 불안하게 하였고, 나아가 세조 때는 齊民 중 私賤이 열에 여덟·아홉이고 良民은 한·둘에 지나지 않는다고 표현될 정도로 역효과를 초래하고 있었던 것이다. 호패를 발급하기 위해서 호패안에 등록되면, 곧 군역을 지게 되었으므로 많은 양인들이 군역을 지지 않는 사천으로 투입하여 호패를 발급받았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성종 즉위년(1469)에는 호패법이 폐지되고, 대신 「許人陳告」의 법을 만들어 호패성적 때 사천으로 된 사람을 적발하는 조치를 취하기에 이르렀다. 여기서 호패법은 16세기에 전개된 군역제의 문란에도 불구하고, 임진왜란 후 급박한 상황을 맞기까지 더 이상 거론하지 못하게 되었다.

 임진왜란 후 조선정부는 한동안 향촌의 복구·안정과 군비의 확충·강화라는 상반된 정책에 주력하지 않을 수 없었다. 淸의 흥기에 따른 동북아의 정세변화로 향촌의 복구와 농민의 안정에만 주력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광해군 2년(1610)에는 軍丁의 확보를 위한 호패법이 다시 실시되고, 이를 철저하게 시행하고 감독·관리할 號牌廳까지 설치하였다. 이것은 군정의 확보에만 주력하지 않고 농민의 안정에도 기여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호패발급에 따랐던 몇 가지 부작용은 호패법의 폐지 또는 실시의 연기를 논의하게 하였고, 이것은 광해군의 대청외교책과 맞물려 점차 정론화되어 갔다. 그리하여 이 법은 실시된 지 불과 2년 만인 광해군 4년 7월에 호패청의 건의에 따라 폐지되고 말았다. 그 동안 한가로이 노니는 무뢰배들이 성균관에 적을 두거나 훈도·유생을 칭하며 피역하는 폐해만을 낳았던 것이다.

 그런데 反正을 통하여 즉위한 인조는 광해군과는 달리 강력한 친명배청정책을 폈다. 그리고 그에 따라 청의 침입에 대비하는 군비확충에 힘을 기울였다. 자연히 군적의 정비와 재정의 확보가 논의되지 않을 수 없었고, 이것은 다시 호패법의 실시로 귀결되었다. 그리하여 인조 3년(1625)에 다시 호패청을 설치하고, 지난날의 사목들은 보완·정비하여 새로운 사목을 마련하였으니, 조선왕조 호패법의 전형을 이룬 것으로 여겨지는 이≪호패사목≫35개조의 내용은 대체로 다음과 같았다.580)서울대학교 奎章閣 소장의≪號牌事目≫(奎章閣圖書 12344)에 의거한다.

 호패의 발급

 ◦ 男丁 15세 이상은 귀천과 역의 유무를 물론하고 종실·백관으로부터 공·사천에 이르기까지 모두 單子式에 따라 입적하고 호패를 발급받는다(제1조).

 ◦ 이 사목이 각 관에 도착한 후 15일 이내로 기한하여 單子를 받도록 한다. 그리고 받은 바 단자의 수와 남정의 수를 우선 관찰사에게 보고하고, 관찰사는 이를 모아 국왕에게 보고한다(제17조).

 ◦ 京·外의 朝官·守令·邊將과 현재 서울에서 관청에 근무하고 있는 사람은 모두 그 가호가 입적된 곳에서 호패를 발급 받는다(제23조).

 ◦ 이미 소속이 있는 京·外의 軍民은 그 역명·거주를 그대로 한다. 그러나 이제 새로 나타난 사람은 현재 거주하는 곳에서 입적하여 호패를 발급받는다(제3조).

 ◦ 승려는 度牒과 상고하여 호패를 발급받는다. 그 중 有役者는 유역인의 호패양식에 따른다(제4조).

 ◦ 현재 上番 또는 赴防하고 있거나 공·사의 업무로 밖에 있는 사람은 집에 돌아온 후 2개월 이내에 호패를 발급받도록 한다. 군대에 있는 사람은 그 防戍處에서 軍中腰牌를 발급받는다(제5조).

 ◦ 兩界로 이주하여 온 사람은 사실대로 관에 고하면 죄를 묻지 않고 호패를 발급받는데, 作統 중에 들지 않으면 별도로 성책하였다가 정돈할 때 原籍으로 돌려보낸다(제8조).

  

  호패의 종류

 ◦ 2품 이상은 牙牌를, 3품 이하 朝官有職者는 角牌를 사용한다. 전직 품관도 같다(제25조).

 ◦ 生員·進士는 方木牌(小)를 사용한다.581)牌式에는 牙角牌·黃楊木牌·方木牌(小)·方木牌(大) 등 4종의 도형이 보인다.이로 보면 生·進과 忠義衛 등의 受祿者는 方木牌(小)가 아니라 黃楊木牌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이에는 단지 성명·생년·등과한 해를쓴다(제27조).

 ◦ 忠義衛·內禁衛·兼司僕·羽林衛로 녹을 받는 사람은 方木牌(小)를 사용한다. 이에는 단지 성명·생년과 口傳받은 해를 쓴다(제28조).

 ◦ 忠順衛·訓導·學生·校生·武學生·士族 중 閑良, 算員·吏文學官·錄事, 未經流品의 實職者, 內侍生徒·三醫司生徒·畵員·雜類 중 加設職, 司謁·寫字官·司鑰·典樂은 方木牌(小)를 사용한다. 이에는 단지 나이·거주지·疤記를 쓴다(제29조).

 ◦ 각종 군사 중 有廳有蔭者·庶孼·書吏·鄕吏는 方木牌(小)를 사용한다. 이에는 역명·용모·나이·疤記·거주지·신장 등을 單子대로 쓴다(제30조).

 ◦ 각종 軍兵 및 良丁·餘丁·公私賤은 方木牌(大)를 사용한다. 이에 쓰는 것은 위 제30조와 같다(제31조).

  

  호패의 제작

 ◦ 호패에 찍는 도장은 서울에서는 漢城府의 小篆을, 지방에서는 각 邑號의 小篆을 사용하는데, 이들 도장은 모두 號牌廳에서 만들어 보낸다(제24조).

 ◦ 아·각패는 호조에서 貿用하는데, 종실과 현직 동·서만 正職에게는 호패청에서 만들어 주고, 堂下 前銜과 出身·雜職堂上 이하는 스스로 마련하여 호패청에 납부하면 낙인·분급한다(제26조).

 ◦ 疤記는 얼굴에 지적할 만한 것이 없더라도 사지 중에 표할 만한 흔적이 있으면 이를 실제대로 기록한다. 無疤로 기록해서는 안된다. 신장은 束伍軍身長尺으로 쓴다(제33조).

  

  호패의 개급

 ◦ 포패는 2식년마다 다시 발급한다. 그 사이에 용모가 바뀌어진 사람은 관에 고하여 다시 발급받도록 한다(제20조).

 ◦ 호패를 분실·파손한 사람은 杖一百에 贖價를 징수하고 새 호패를 발급하여 준다(제21조).

 ◦ 호패를 받은 후 부득이 이사하는 사람은 그 이유를 관에 알리고 統主가 확인한 후에 공문을 발급받아 이사간 部·邑에 즉시 제출하고 원하는 統籍에 등록한 다음, 전의 호패를 반납하고 새 호패를 받도록 한다. 2개월을 지연하면 杖一百에 5개월을 지연하면 謀避人의 죄로 논단한다(제6조).

  

  작 통

 ◦ 京·外의 士·庶·大·小·主·客戶를 물론하고 5호로 1통을 만든다. 지방에서는 5통에 里正을 두고, 서울에서는 5통에 下有司를 둔다. 坊과 面에는 都有司를 두는데 반드시 有職品官이나 생원·진사 중에서 정한다. 하유사 이하는 도유사가 정하는데 사족집안일 경우에는 그 집의 奴로 대신 통주를 삼는다. 단자를 받아 성적할 때는 한결같이 거주 부근에 좇아 순서를 정하여 作統하고 字號의 배열은 成冊式582)京·外의 각 부·각 면에서는 단자를 받은 후 천자문을 써서 天字로부터 1자마다 5가로 1통을 만든다.과 같이 한다(제2조).

 ◦ 成籍 후에 추가로 나타나거나 이사온 사람들은 입거하는 통의 제 6가∼9가로 삼되 10가가 차면 두 통으로 나눈다. 이거하여 감축될 경우에는 5가가 모두 없어져야 그 통을 없앤다. 追入戶와 減縮戶의 수는 별도로 성적하여 연말마다 보고하도록 한다(제7조).

  

  정 역

 ◦ 京·外의 양반자제로 業文·業武하여 향교에 들어가기를 원하면 武學者와 더불어 액수의 구애없이 허락하되, 정해진 햇수를 수업해도 재능을 이루지 못하는 사람은 定役한다(제9조).

 ◦ 전토가 없어 사방으로 유이하는 사람에게도 군역을 지우는데, 이들은 餘丁으로 하여 정돈된 후부터 매년 布 1필씩 거둔다(제13조).

  

  벌칙 및 부칙

 ◦ 호패를 위조한 사람이나 다른 사람의 호패를 지니고 다니는 사람은 목베어 죽인다. 이를 고발한 사람에게는 신역을 면제하여 준다(제15조).

 ◦ 호패 발급기한이 지난 후에는 호패가 없는 사람을 관문·나루터·장시·도로에서 검문·검색하여 잡아 가둔다(제19조).

 ◦ 피역·은루자와 호패를 받은 후에 공문없이 이사하는 자는 온 집안을 변방으로 옮기게 하고, 통내에서 이를 즉시 고하지 않는 사람은 변방의 군사에 충당한다. 직역을 변조한 자는 杖一百하고 本役으로 돌린다. 누락자가 대읍에서는 20명 이상, 소읍에서는 10명 이상이면 수령을 영구히 서용하지 않도록 하고, 色吏는 온 집안을 변방으로 옮기게 한다(제2조).

 ◦ 京·外의 사대부로서 良丁을 숨기거나 양정을 억지로 천인으로 삼거나 다른 사람의 奴를 자기 노로 삼은 사람은, 다른 주인을 자기 주인으로 하거나 성명을 바꾸어 피역한 사람과 같이 그 자신과 主戶 온 집안을 모두 변방으로 옮기게 한다. 관직에 있는 사람일 경우에는 고하를 막론하고 杖一百에 충군한다. 그러나 자수하는 사람은 면죄한다(제12조).

 ◦ 앞서 도망했던 각종 軍民으로서 고향에 돌아온 사람에게 일족과 이웃 중 그가 도망했을 때 대납한 役價를 내놓으라고 하는 사람이 있으면 관에 알려 죄를 다스린다. 옛것은 일체 묻지 말고 입역하게 한다(제14조).

 ◦ 오는 병인년(인조 4;1626) 정월 초하루부터 모두 호패를 차도록 한다. 호패가 없는 사람은 조사하여 참형에 처하고, 이를 고발한 사람에게는 신역을 면하게 해준다(제18조)

 ◦ 私賤으로 주인의 성명을 모르는 사람은 … 주인이 나타날 때까지 餘丁으로 치부한다(제11조).

 ◦ 죄를 짓고 도망하여 숨은 사람은 모두 자수하게 하되, 죄가 가벼운 사람은 면죄하여 주고 무거운 사람은 감해 준다(제10조).

 ◦ 擧案 및 都目은 서울에서는 10월 1일까지, 가까운 도에서는 10월 말일까지, 먼도에서는 11월 말일까지 일제히 올리도록 한다. 기한 안에 올리지 않으면 수령은 파직하고 色吏·監官은 杖一百에 변방으로 충군한다(제16조).

 ◦ 호패를 발급받은 사람이 사망하면 그 호패를 관에 보내 태워버린다(제22조).

 ◦ 병으로 폐인이 된 사람은 도목에 그 이름 아래 실태를 자세히 기록한다(제32조).

 ◦ 擧案과 都目은 성책하여 한 부는 備邊司에, 한 부는 당해 부 또는 군현에, 한 부는 한성부 또는 감영에 각각 비치한다(제34조).

 ◦ 미진한 조건은 그때그때 맞추어 시행한다(제35조).

  * 單子式(14개조), 成冊式(1개조), 牌式(16개조)은 위의 사목과 중복되는 것이 많으므로 생략함.

 인조 3년에 실시된 호패법은 불과 1년 동안에 226만여 丁을 성적하는 커다란 성과를 올렸다. 그러나 아직도 누적·잠닉한 사람이 많다는 보고에 따라 御史를 파견하여 가면서 이들의 색출에 노력하자, 민심은 더없이 어지러워졌다. 더욱이 이러한 가운데 정묘호란을 맞게 되면서 호패법은 또다시 폐지되고 말았다. 민심을 수습한다는 명목에서 취하여진 조치였다.

 이후 호패법은 숙종 원년(1675)에 오가작통법에 편입되어 紙牌로 대행될 때까지 복설되지 못하였다. 효종 때 북벌정책과 관련하여 그 실시가 한때 논의되기도 하였으나, 오가작통법의 실시가 보다 효과적이라는 의견으로 귀결됨에 따라 논의에서 그치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다가 현종 말년에 이르러 明의 遺將 吳三桂의 부흥운동과 관련해서 군정확보 방안으로 다시 호패법을 택하게 되었지만 현종의 승하로 시행되지는 못하였다. 숙종 원년에 실시된 오가작통법이 호패(지패)를 수용하게 된 것도 이러한 연유에서였다.

 숙종 원년 오가작통법에 포함되어 실시된 호패법은 이후 곧 지패가 인조 때와 같이 牙·木牌로 환원되어583)牙·木牌로의 개정은 숙종 3년과 11년에 각기 사대부와 상민으로 나뉘어 실시되었는데 그 종류는 다음과 같았다.
 象牙牌;東·西班 및 內官 2품 이상
 角 牌;3품 이하 및 雜科登第者
 黃楊木牌;生員·進士
 小木牌;雜職·士庶人·書吏·鄕吏
 大木牌;公私賤·假吏
고종대에 이르기까지 지속되어 갔다. 그러나 오가작통법이 그러하였듯이 호패법 또한 유명무실함을 면하지 못하였다. 18·19세기 조선사회의 실정으로 말미암아 그것이 지녔던 가혹한 벌칙에도 불구하고 목적했던 漏丁의 방지 내지 색출이나 군정의 확보·증대에는 거의 기여하지 못하고 말았던 것이다.

<韓榮國>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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