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4권 조선 후기의 사회
  • Ⅱ. 향촌사회의 변동
  • 4. 향촌자치체계의 변화
  • 1) 조선 중기 사족중심 향촌자치체계의 구조와 붕괴
  • (2) 조선 후기 사족중심 향촌자치체계의 붕괴

가. 향안파치와 향회의 부세자문기구화

 조선 초·중기 향촌사회에는 사족중심의 향촌지배기구와 관의 행정기구가 병존하고 있었다. 守令-鄕吏(將校)-面里任으로 이어지는 관의 행정체계와 병행하여 鄕會-留鄕所-洞契를 중심으로 하는 사족들의 자치기구(조직)가 성립하여 재지사족들의 이해를 대변하고 있었던 것이다. 초기 향회의 모습은 확인하기 어려우나 사족의 공론을 모으는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보이며, 이 향회의 결정사항을 집행하는 것이 유향소였기 때문에 유향소가 재지지배층의 집결소로서 주목의 대상이 되어 왔다.

 원래 이 유향소와 그 임원(향임)인 座首·別監 및 기타 監官들은 수령의 읍치를 보좌하는 직임이었고, 좌수 밑에 2명 또는 3∼4명의 별감이 질청(作廳)과 將廳을 통할하면서 수령의 임무를 돕고 각종 지방문제를 해결하도록 되어 있어서 수령의 귀와 눈이 되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었다.600)金龍德, 앞의 책. 수령은 그 임기가 제한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지방의 사정에도 밝지 못하기 때문에 지방품관층의 눈치를 보아야 했고, 그 품관층 가운데서 선출된 향임들의 도움을 받고 있었던 것이다.

 바로 이와 같은 조건을 이용하여 유향소 임원들은 그들 품관층의 이익을 대변하게 되고, 이 점이 경우에 따라서는 국가의 향촌지배정책과 배치되어 수령이 그들을 통제하기 어려운 문제를 일으키기도 하였다. 이러한 지방지배구조의 특성 때문에 수령과 품관층과의 마찰이 종종 문제되었고, 따라서 강력한 중앙집권책을 추구하던 태종 6년(1406)에는 수령권 침해라는 이유로 유향소가 혁파되기도 하였다.601)≪太宗實錄≫권 11, 태종 6년 6월 정사.

 이후 집권적 향촌통제책이 추구되는 가운데 세종대에 이르면 部民告訴禁止法·留鄕所作弊禁防節目·守令久任法 등 법적 보완과 京在所제도의 정비를 통하여 중앙의 고관이 연고지의 유향소를 장악하게 하였다. 이로써 경재소가 유향소 임원과 지방의 품관층을 지원·감독하는 기능을 행사하도록 하였으니, 그 결과 재지품관층이 자기보호의 수단으로 수령권과 결탁하여 오히려 부민을 침학하는 부작용도 뒤따랐다. 태종대의 1차 유향소혁파 이유가 수령능멸이었다는 것과는 반대로, 세조 말에 행해진 2차 유향소혁파 이유가 수령과 유향소와의 결탁에 의한 부민침학에 있었던 것은602)李泰鎭, 앞의 글, 147∼148쪽. 바로 위와 같은 현실을 반영한 것이었다.

 향촌사회에서 수령권이 강화될 수 있는 배경에는 건국 초라는 시대적 상황외에 향촌의 자치권 행사가 이족으로부터 사족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였으며 그로 말미암아 재지세력간 힘의 평형상태가 깨지고 있었다는 점도 고려되어야 하겠다. 이후 성종대 이래 재지사족이 이족을 누르고 향촌사회에서의 독점적 우위를 누리게 되었을 때 더 이상 수령권 위주의 향촌통제책은 가능하지 않게 되었다.603)李海濬,<朝鮮前期 鄕村自治制>(≪國史館論叢≫9, 國史編纂委員會, 1989).

 위와 같이 개국 초기에는 수령권과 유향소 품관들로 대표되는 재지지배층 사이에 상당한 마찰이 있었다. 그렇지만 조선 중기에는 적절한 타협이 이루어져 상호보완적 관계를 맺으면서 향촌사회 통제의 기능을 수행하게 되는 것이니, 이 때 향촌자치체계를 이끌었던 주도층은 재지사족이었다. 이들은 향안을 중심으로 결속하고, 향안의 구성원이 중심이 된 향회조직을 운영함으로써 그들 나름의 자치체계를 운영할 수 있었다.

 따라서 향안의 정상적인 운영여부와 향회의 성격은 사족들이 중심이 된 자치체계의 변화의 핵심을 이룬다고 하겠으며, 그것이 어떻게 변화되어 나갔는가 하는 점은 향촌자치체계의 변화의 내용을 잘 보여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그러므로 여기에서는 사족중심의 향촌자치체계의 붕괴를 鄕案罷置와 향회의 성격변화를 통해 확인하기로 한다.

 향안은 유향소 품관들의 명단(座目)을 지칭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지금까지 알려진 향안으로 가장 오래된 것은 함흥의<成化五年己丑鄕座目>인데,604)≪鄕憲≫, 璿鄕憲目序, 태조 7년 및 成化五年己丑鄕座目, 예종 원년. 이 좌목은 유향품관의 성명을 기재하였다. 이후 향안은 유향소의 구임원과 현임원은 물론 일반 향원을 포함하게 되었으며, 특히 16세 중엽 후에는 일향의 공론에 의해 작성된 사족명단으로서의 성격을 갖게 되었다.605)安東鄕案의 경우 16세기 중엽까지 향리출신이 기재되고 있다가 16세기 중엽을 전후하여 그들이 배제되고 있었다. 이같은 사실에 비추어 볼 때 향안은 16세기중엽 이후에 사족조직으로서의 성격이 확연해짐을 알 수 있다(鄭震英, <朝鮮後期 安東府 在地士族의 鄕村支配>,≪大丘史學≫27, 1985 참조). 그 명단을 「鄕案」이라고 하였던 것은 서울의 해당 경재소에 비치하였던 각 고을의 품관명단을 「京案」이라고 구분해서 불렀던 데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順天경재소에서 내린 지시 가운데 순천유향소에 문제를 일으켰던 인물들을 “경안에 다시 기록하였으니 향안에도 다시 기록할 것”606)柳希春,≪眉巖日記≫, 선조 6년 10월 2일.이라는 내용이 보이는데, 이는 「향안」이 「경안」과 대비되어 쓰여졌음을 보여준다.

 이 향안은 지역에 따라 일정한 성격상 차이를 갖고 있었고 그 작성에 많은 문제들이 수반되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삼남지방의 경우 재지사족 중심의 향촌질서가 잡혀지게 되는 16세기 후반에는 사족명단으로서의 성격을 분명히 하게 되었으며, 대부분 임란을 거치면서 소실되었음에도 불구하고 17세기에 들어서면서 거의 모든 지역에서 다시 만들어져 예전대로 그 기능을 회복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607)鄭震英,<사족의 향촌 재건과 자치조직 정비>(≪한국사≫31, 국사편찬위원회, 근간예정).

 16∼17세기의 향안에 이름이 오르기 위해서는 부·모·처족에 모두 신분적 흠이 없어야 한다는 데서 알 수 있듯이 향안조직은 신분적 폐쇄성을 갖고 있었고, 향안이 일향의 공론에 의해 작성되고 있었다는 점에서 그것은 재지사족의 신분적 권위의 상징이었다. 이 향안에 오른 향원들이 중심이 되어 향회를 구성하고, 이 향회가 향규를 만들어 사족 내부의 결속을 다지고 이민을 통제하고 있었으니 향안은 재지사족이 군현단위에서 자신들의 향촌지배를 실현하는 데 모체가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향안에는 18세기 중엽을 전후하여 커다란 변화가 나타나고 있었다. 이후 대부분 지역에서 향안이 더 이상 추가로 작성되지 못하고 파치되었으며, 존속하는 경우라고 하더라도 그 성격은 이전과는 사뭇 다른 것이었다. 지금까지 향안이 작성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 지역 76개 가운데 그 입록현황을 파악할 수 있는 50개 지역의 경우를 볼 때, 우선 외형상으로 두드러진 특징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이 시기를 전후하여 대부분의 지역에서 향안입록이 중단되고 향안이 파치된다는 점이다.608)金炫榮,<조선시기 사족의 향촌지배연구와 자료>(≪조선시기사회사연구법≫,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3), 167∼170쪽. 내용면에서 보면 18세기 중엽을 전후하여 상당수 지역의 향안에 입록하는 숫자가 급격히 증가하다가 더 이상 추가입록이 중단되었던 것이다.609)金仁杰, 앞의 글(1983).

 한편 19세기까지 향안작성이 지속되는 경우라고 하더라도 庶孼의 입록을 놓고 대립이 일어나 결국 그 입록이 중단되는가 하면, 향안입록자 내부에 분열이 일어나 상당수 가문이 스스로 자신의 선대 성함을 향안에서 파내는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 서북지방의 경우 18세기 후반에 들어와 향안입록 자체가 매매의 대상이 되고, 그 입록을 둘러싸고 기존의 입록자인 「舊鄕」과 새로 들어가려고 하는 「新鄕」간에 대립하는 현상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위와 같은 현상은 군현단위에서의 사족분열로부터 비롯하였지만 국가의 향촌통제책 강화에서 비롯되기도 하고, 그 이면에는 향촌사회 내부에서 새로운 세력의 도전이 자리잡고 있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향안이 사족 내부의 분열에 의해 더 이상 만들어지지 못하게 되거나, 지속되는 경우라 하더라도 향안입록을 둘러싸고 「구향」과 「신향」간에 대립이 심화되는 상황에서는 사족의 공론에 의해 운영되어 오던 향회가 과거의 기능을 유지하기란 불가능하였다. 더욱이 서북지방 등과 같이 향안에 오르는 자격이나 향임자리가 수령에 의해 매매되는 경우에 있어서는 더 말할 나위도 없었다.

 사족의 자치기구로서의 향회가 수령의 부세자문기관으로 변질되고 있던 모습은 영조 30년(1754) 湖南釐正使로 내려갔던 李成中이 조사를 마치고 올린 다음 보고의 내용 가운데 잘 드러난다.

이른바 향회라고 하는 것은 애당초 一鄕 士民의 공론에 따른 것이 아니고, 좌수·별감이라는 자들이 수령의 턱 아래 놀면서 … 통문을 돌려 불러 모은 것에 불과합니다. 그 향회에서는 혹은 관의 비용이 부족하다는 핑계로, 또는 民役을 마감해야 한다는 명목을 들어 제멋대로 가렴하고 손이 가는 대로 법을 만드니 일의 원통함이 이보다 심한 것이 없습니다(李成中,≪質菴遺穚≫권 1, 湖南釐正使書啓).

 여기에서 당시 호남의 향회는 수령의 턱 아래서 노는 수령의 부세자문기구로 묘사되고 있다. 이같은 현상은 비단 호남에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영남의 경우에도 향안에 오른 향원들이 중심이 되어 향론을 이끌고, 이 향회에서 향임을 차출하고 향내의 대소사를 결정하였던 과거의 향회는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영조 20년 밀양에서는 상하 수백 인이 돈을 모으고 무리를 지어(聚錢結黨) 骨董契라 이름하고, 이 골동계가 수령을 갈아치우고 향임을 마음대로 차출하는 등 폐단을 야기하다가 수령에 의해 타파된 사실은610)≪承政院日記≫926책, 영조 17년 정월 8일. 그간의 수령과 향회와의 갈등에서 수령의 우위가 확립되어 가는 것을 보여준다. 상주의 경우에 영조 22년(1746) 당시 수령이 향청의 추천에 의해 별감과 도감을 차출하였지만 차출된 자가 병을 칭탁하고 끝내 나가지 않았던 것은611)≪商山錄≫乾, 爲牒報事(서울大 古5120-42;≪韓國地方史史料叢書≫3, 報牒篇, 驪江出版社, 387∼389쪽). 수령의 시녀화된 좌수·별감이 중심이 된 향회의 「향중공론」이 사족 내부에 통하지 않게 됨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사족의 공론이 모아지지 못하는 상황에서 향청의 향임추천은 제약받게 되고, 이어 향임차출에 있어서 수령의 자의적인 개입을 심화시켰다. 이제 삼남의 경우에도 서북과 마찬가지로 향임자리가 수령에 의해 매매되는 현상이 일반화되었다.

 수령의 부세자문기관 이상의 의미를 갖지 못하게 된 향회가 어떠한 모습으로 운영되었는가 하는 점은 19세기 전반 永川의 향회사건에서 잘 볼 수 있다. 헌종 3년(1837) 영천에서 당시 수령은 隣徵·洞徵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곳 「老成之人」의 의견을 듣고자 향회를 소집했다.612)≪牒移≫, 惺齋文牒, 永川鄕會事下帖. 당시 군포의 상납문제를 해결하고자 한 것이지만 정작 소집된 향회에서는 향교장의로 있던 柳某가 전세납부와 관련된 色吏의 양반침해를 문제삼아 분란이 야기되었다. 이에 수령은 다음과 같이 지시하였다.

금번의 이 향회는 學宮의 일인가 士林의 일인가 … 무릇 몇 수년 사이에 읍의 풍습이 점차 투박해지고 선비의 습속이 더욱 어그러져, 한 가지 일만 있으면 모이고 한 가지 명령만 내리면 모여 士類를 위협하고 민심을 소란케 한다.. … 선동한 자나 따라 모인 자나 鄕品은 물론이고 진실로 爭任의 마음을 가진 자가 아니면 필경 戶首輩로서 王稅(田稅)를 끝내 거납하려는 자이니 어찌 한심스럽지 않은가. 향교掌議柳는 그 이름을 떼고 一鄕 중에서 근정한 자로서 대신시킨다. 그 밖에 모임에 모인 자는 모두 귀가하여 자기 업에 충실하고 큰 죄망에 걸리지 않도록 하라(≪牒移≫, 永川鄕會中下帖).

 위 수령의 지시는 원래 향회가 수령의 부세자문을 목적으로 소집되었지만 향회에 모인 상당수의 인원이 전세납부와 관련된 양반침해를 문제삼음으로써 수령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불만을 토로한 것이었다. 수령은 결국 향회가 끝난 뒤에 다음과 같은 지시로 사태를 마무리 지었다.

금일 향회에 모인 자는 과연 어떤 사람들이며, 의논한 바는 과연 무엇인가. 모인 사람들이 부녀자도 아니고 의논이 향당의 미세한 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종일 회의하였으나 끝내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다. 이 무슨 향례이며 민습인가 . … 관에서는 100명의 군관을 내어 査正(軍布缺縮分의 충당)을 도왔고, 천금의 廩捧을 염출해서 (부족분을) 메꾸었으니, 여기서 내 도리는 다한 셈이다. … 鄒魯之鄕이란 점을 생각치 않고, 義를 잊고 財를 중히 여김이 이같이 심할 수가 있는가. 필경에는 稟目을 올려 말하길, 혹자는 戶에서 충당하자고 하는가 하면 혹자는 結에서 충당하는 것이 가하다고 하고, 또 혹자는 호결이 모두 불가하다고 한다. 이것이 가위 報辭인가 농담인가. 심지어 혹자는 着啣을 하기도 하고 아니하기도 하니, 일의 성실치 못함이 극에 달했다. 관에서는 다시는 그러한 수모를 당하고 싶지 않다(≪牒移≫, 鄕會後下帖).

 여기에는 군포의 부족부분을 충당하는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소집된 향회의 구성원이 수령의 요구에 응하지 않고 오히려 향회에서 자신들의 이해를 관철시키고 있음이 잘 드러나 있다.

 위의 영천향회에 관한 기록에서는 향회의 참가자들이 鄕品·戶首(班民)·齋任 등 그 성격이 다양하며, 그들의 관심사도 이전시기 향회의 그것과는 판이함을 알 수 있다. 이 향회는 과거 향안입록자가 중심이 되어 향내의 중대사를 결정하던 그런 향회가 아니라 수령의 부세자문기구로 변질된 향회 바로 그것이었다.

 이상과 같이 18세기 중엽이 되면 재지사족의 공론에 의해 향안입록자를 선발하고 향임을 선출하며 吏民을 다스리는 등 향내의 대소사를 처리하던 기존의 향회는 수령의 부세자문기관이 되고 그 운영의 주체도 달라지고 있었다. 이같은 사실은 사족의 향권에서의 소외를 확연히 보여주는 것인 동시에 사족중심의 기존의 향촌자치체계가 붕괴되고 수령(관) 주도의 향촌지배질서가 새롭게 형성되어 가는 것을 의미하였다.

 재지사족들은 조건의 변화에 상응하여 그들 나름의 대응책을 모색하였다. 문중중심의 족계의 강화, 동성촌락 확대 등이 그것이다. 이 시기 서원이 문중서원을 중심으로 발전해 간 것도 마찬가지 사실을 반영하는 것이었다.613)李海濬,≪朝鮮後期 門中書院 硏究≫(國民大 博士學位論文, 1994). 그렇지만 사족들의 자구책으로 인해 향촌사회에서 그들의 권위가 부정되는 상태에까지 나아가지는 않았다고 하더라도 그 자구책이 향권에서 소외되어 가는 대세를 역전시킬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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