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4권 조선 후기의 사회
  • Ⅱ. 향촌사회의 변동
  • 4. 향촌자치체계의 변화
  • 2) 관 주도 향촌지배질서의 성격
  • (3) 19세기 관 주도 향촌지배질서와 「이향」의 발호

(3) 19세기 관 주도 향촌지배질서와 「이향」의 발호

 18세기 중엽 이후 사족중심의 향촌자치체계가 붕괴되어 나가게 됨에 따라 향촌사회는 관의 보다 직접적인 통제하에 놓이게 되고, 면리제를 비롯한 관의 행정기구가 그 기능을 강화하게 되었다. 그리고 수령권을 견제하던 일단이 제거되어 보다 철저한 관 중심의 통치체제가 확립되어 나가게 되었다. 관 주도의 향촌통제책이 강화될 수 있었던 것은 재지사족의 지배기반이 위축되고 분열되는 가운데 그들이 중앙권력으로부터 배제되게 되었던 점과 아울러 기존에 향권에서 소외되고 있었던 세력과 새롭게 아래로부터 성장해 나오고 있었던 사회세력의 성장이 배경이 되고 있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이 시기에도 마찬가지로 수령은 향촌사회를 통제하는 데 있어 재지세력을 이용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에, 사족의 향권을 부정함에 있어서 사족과의 대립적 위치에 있던 계층을 이용하게 되었다. 한편 기존의 향권에서 소외되고 있었던 층들은 수령권의 비호를 배경으로 하여 향권에 접근하면서 향권에의 접근을 통해 일정기간 자신의 지위상승을 도모할 수 있었던 것이라고 하겠다. 자연 그 과정에서 기존의 사족층과 새로이 향권에 접근하고 있던 사회세력간에는 마찰이 없을 수 없었고, 수령권을 배경으로 하여 새롭게 향권에 접근하고 있었던 세력 내부에서도 일정한 갈등이 일어나고 있었다.

 이러한 향촌사회 내부에서의 신구세력간의 대립을 포함한 모든 갈등과 대립은 왕권강화에 저촉되는 것으로 판단되어 철저하게 부정되고 관권 위주의 향촌통제책이 일방적으로 강요되게 되었다. 18세기 중엽 정부에 의해 제정되어≪속대전≫에까지 오른 향전률은 중앙권력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사족의 견제를 위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관권의 통제하에 재편된 향촌사회의 권력구조는 일단 왕조권력에 비판적인 사회세력들의 힘을 크게 약화시키고 이들의 사적 지배력을 억제하는 데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둘 수가 있었다.

 그러나 위와 같은 향전률의 적용에 의한 향전 금지조치는 향촌사회에서 관권에 비판적인 세력들의 존재를 전적으로 부인하는 것이 되어서, 중앙권력의 수령에 대한 통제기능이 약화될 경우 수령과 그에 결탁한 세력들의 발호를 막을 수 있는 장치가 마련되지 않는 한 취약성을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이 점은 우선 수령의 전횡이라는 문제로부터 터져 나오고 있었다. 영조 36년(1760) 司宰奉事 李存誠이 올린 다음과 같은 상소는 향촌사회에서의 비판세력의 부재에서 비롯된 수령의 전횡을 잘 지적한 것이다.

일찍이 수령을 보건대 스스로 한 읍을 전횡하여 다른 사람이 그 잘못을 교정할 수가 없다. 수령이 옳다고 하면 좌수 이하 모두 그렇다고 하고 좌수가 안된다고 하면 좌수 이하 또한 모두 안된다고 하니, 그리하여 어떤 이를 미워하여 죽이고자 하면 끝내 그를 죽이고 나서야 끝장을 보는 것이다. 이는 다른 이유가 아니다. 아래에 감히 간언하는 사람이 없어 자기 마음내키는 대로 하기 때문이다. 朝家에서 뒤에 소식을 들어도 해당 수령을 중한 죄로 다스리는 수밖에 없는데 그렇다고 죽은 사람을 살릴 수는 없는 법, 이미 그릇된 정사를 책임을 물을 수가 없는 것이니 조가에서 어쩔 수 없이 폐단을 고쳐야 한다(≪備邊司謄錄≫139책, 영조 36년 10월 27일).

 이와 같은 우려는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었지만, 이후 더욱 심각한 것이 되고 있었다. 국가적 차원에서 각종 법전을 제정하고 형정운영의 개선을 꾀하였던 것이라든지,659)韓相權,≪朝鮮後期 訴寃制度硏究≫(서울大 博士學位論文, 1994). 이 시기 각종 수령들의 지침서(목민서)들이 활발하게 만들어지고 있었던 것 등도 변화하는 현실을 잘 반영하는 것이었다.

 수령의 전횡은 그것을 뒷받침하는 세력과의 결탁을 통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이고, 이를 뒷받침하는 것이 이향층이었으므로 수령의 전횡은 일면 이향층들의 발호로 나타났다. 18세기 후반 이후 연대기 및 지방관 지침서들에 본격적으로 나타나는 「奸鄕猾吏」의 문제는 그것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정부가 주목했던 이 간향활리의 발호와 그에 대한 제재조치는 위와 같은 향촌사회 권력구조내에서 수령권을 강화하는 가운데 개별 수령들이 이향층과 결탁하여 비리를 행하거나 그들의 농간에 놀아나지 않아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시기 빈번하게 파견되는 어사들에게 주는 「奉書」의 수령포폄 기준의 하나가 바로 수령의 「政委吏鄕」 여부, 즉 수령이 정사를 직접 돌보지 않고 이향층에게 맡기는가의 여부였다는 것이 그 점을 말하는 것이었다.660)숙종 34년 전국적으로 암행어사를 파견하면서 그 奉書에 政委下吏의 조건을 첨부한 것(≪繡衣錄≫, 平安道暗行御史 李縡新啓)이 그 예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는 「下吏」만 문제삼았지만, 어사들의 書啓에는 「政委鄕品(鄕任·奸鄕)」문제가 같이 보고되고 있다. 吏鄕층이 같이 거론된 경우는 정조 11년 경상도암행어사 李書九의 書啓(「委屬於吏鄕者」) 등에서와 같이, 정조대에 들어와서 빈번하게 보이는데, 吏鄕의 지위가 그만큼 동일시되어 나갔던 사정을 반영한다. 19세기에 가면 座首가 「首鄕」이란 명칭 위에 「吏鄕之首」란 칭호를 더 갖게 된 것은 이들 향임층의 향촌사회에서의 위상이 격하되고 있음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

 18∼19세기의 수령의 형태를 유형화하면 이향배들의 작간을 관정하여 민폐를 이정하거나, 자신이 주체가 피어 수탈을 자행하고자 하는 경우, 또는 이향배들이 하는 대로 따르는 경우 등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마지막 이향배들의 의견을 그대로 따르는 경우가 일반적이었고, 그렇지 않은 경우라 하더라도 이서·향임층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이들의 통제 및 조정이 수령에게는 아주 중요한 문제였다.661)高錫珪,<19世紀 前半 鄕村社會勢力間 對立의 推移>(≪國史館論叢≫8, 1989). 당시 수령은 가능한 한 문제를 일으키지 않기 위해서는 이향층의 입장을 적절히 받아들이면서 그들을 통해 향촌문제를 해결할 수밖에 없었다. 이향층이 향권에 일정하게 참여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그와 같은 조건 때문이었다.

 수령이 향촌문제를 다룸에 있어 처리해야 할 대상은 이른바 「守令七事」였고, 거기에서의 문제는 시기에 따라 각각 차이가 있는 것이었지만, 그 중심은 부세수취와 관련된 것이었다. 이 부세문제의 원만한 해결을 위해서는 소농경제의 안정 및 생산성의 향상을 통한 담세력의 증대가 기본적으로 전제되어야하는 것인데, 현실적으로 그것이 일개 수령으로서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고, 따라서 수령이 할 수 있는 영역이라는 것은 부세정책에 대한 향촌 내부 각 세력간의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것에 국한되는 것이 아닐 수 없었다. 그것을 통해 재정을 확보하는 것이 핵심적 내용이었다. 수령이 기존의 사족주도의 향회를 부정하고 향회를 부세자문기구로 확보하면서 지방민들의 입장을 부분적으로나마 이를 통해 흡수하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따라서 부세자문기구로서의 향회에는 항시 긴장관계가 존재할 수밖에 없었다. 향회의 구성원들은 아직까지 관권을 전적으로 부정할 수 없는 상황에 서 자신의 존립기반이 크게 위협받지 않는 범위내에서는 관의 그와 같은 재정확보책의 도구로서 이용되었지만, 그것이 한계에 부딪쳤을 때 이 향회가 관권과 대립적 입장을 취하게 되는 것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662)安秉旭, 앞의 글. 정부에서 「吏鄕의 발호」 문제를 크게 주목하였던 것은 그들이 바로 이 부세문제의 해결에 있어 중심적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볼 수 있다. 결국 여기에서 기본적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향촌사회에서의 담세력이 각종의 부세부담을 해결할 수 있는 것인가 하는 점과, 그 부세행정의 운영과정에서 각 계급들의 이해관계가 조정될 수 있는 것인가 하는 점이다.

 그런데 이 시기에는 농민층 분해의 결과 향촌사회의 계급구성이 크게 변모하는 가운데 대다수의 농민층들이 농지로부터 유리하고 있었고, 그 가운데 성장하고 있었던 층들은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하여 봉건적 부담으로부터 빠져나가고 있었다.663)金容燮,<朝鮮後期에 있어서의 身分制의 動搖와 農地所有>(≪朝鮮後期農業史硏究≫Ⅰ, 一潮閣, 1970). 기존의 지배층 역시 그들이 누렸던 각종의 특권을 놓치려하지 않았고, 봉건정부 역시 그것을 전적으로 부정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런 조건하에서 최소한의 수입을 확보하기 위해 취해진 공동납적인 부세행정은 그같은 현상을 더욱 가속화시키고 있었다. 이는 봉건적 부세운영원리를 청산하지 않은 위에서 그 부담만을 가중시키고 있던 정부의 부세정책의 위기적 상황을 초래하는 것이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 그와 같은 모순은 19세기 중엽 「民亂」이라는 형태로 사회 전면에 표출되었다.

 그러면 사족중심의 향촌자치체계가 붕괴되고 대신 들어서게 된 지배질서는 어떠한 내용을 갖는 것인가. 19세기의 향촌사회 지배질서는 수령을 정점으로 하여 그를 보좌하는 이서와 향임층이 중심이 되는 구조를 핵심 내용으로 하고 있었다. 향임층의 임면이 전적으로 수령의 권한하에 놓이게 됨으로써 이향층의 권력 재생산기반이 매우 축소된 것이기는 하지만, 이향층 역시 그들 나름의 충원방식을 모색하고 있었고 부세운영 등에 있어서 그들이 행하는 독자적 역할 등으로 인해 이향층들의 군현단위에서의 영향력 역시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다.

 게다가 당시 수령은 재임기간이 점점 짧아지고 있었고,664)李羲權,≪朝鮮後期 地方統治行政硏究≫(全南大 博士學位論文, 1989). 그 실무능력에 있어 많은 한계가 있었으므로 읍의 행정은 거의 이서층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것이 일반적 현상이었다. 「壬戌民亂」 때 정부에서는 민란의 원인이 탐학한 수령의 침학과 간향활리의 주구에 기인한다고 보고 있었는데,665)金炳始,≪龍湖閒錄≫13책, 又 5월 25일. 그같은 문제의 해결을 위해 장령 鄭直東이 철종에게 올린 상소는 개혁의 방향으로 국가가 허물이 없는 사람을 신중히 선택하여 백성들이 따를 수 있도록 해서 침어의 폐단과 간활한 이서들의 사주를 끊음으로써 읍권이 오로지 수령으로부터 나오도록하여 혜택이 백성들에게 돌아가도록 할 것을 건의하였다.666)金炳始,≪龍湖閒錄≫13책, 掌令鄭直東上疏. 이는 수령과 이향층의 결탁에 의한 민간침해가 일상적인 일로 되고 있었고, 그 가운데 행정권이 수령만이 아닌 이향층에 집중됨으로써 문제가 발생하고 있음을 말해 주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향촌사회의 지배구조는 이른바 수령 - 이향지배체제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었다.667)高錫珪, 앞의 책.

 이 수령-이향지배구조는 수령-감사-중앙세력가로 이어지는 중층적 권력구조 아래 그 수탈적 성격을 드러내었다. 그 지배구조 아래 수행된 부세운영은 잡세(상공세)·군정·환곡의 결렴화, 즉 都結을 주요 특징으로 하고 있었다. 군역이 軍摠制로 시행되자 농민은 피역하거나 歇役에 들어가고자 하였는데 요호부민층은 주로 피역을 도모하였다. 수령·이서·향임은 바로 이 점을 이용하여 사리를 채우고 부족분은 토지에 전가(도결)하고, 그 결과 호포법·군포법이 등장하기도 하였는데, 이것은 결과적으로 신분에 따른 차별적 운영을 부정하는 것이 되었다. 환곡운영에서도 공동납적인 환총제가 실시되어 이향층이 代錢·代捧制로 수입증대를 꾀하였으며, 환총제하에서 환곡의 수령을 피하는 층은 주로 요호층이었고 빈곤한 상민과 몰락양반이 환곡을 받아야 하는 추세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늘어가는 逋欠은 역시 도결화되어 결국 토지의 부담은 더욱 가증되는 추세에 놓이게 되었다.

 이같이 수령-이향지배체제에서 총액제에 기반한 공동납은 담세의 불균등과 신분적 차별을 내재시켜 사회적 모순을 증폭시키고 신분제에 입각한 부세운영의 원리가 점차 경제력 위주의 운영으로 대체되는 진행을 보이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 속에서 반상을 구별하지 않는 「毋論班常」이라는 부세운영에서의 신분제적 원리를 벗어난 새로운 운영원리가 생겨나고 있던 것이 중요한 변화였다.

 여전히 수령은 일반 민을 직접 파악할 수 없었고, 따라서 행정에 참여하는 층에게 일정한 특권을 부여하고 그들의 협조를 얻어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들 행정보조층들의 지위는 매우 열악하여 행정에 참여하는 과정에서부터 그들은 일정한 대가를 내야 했으며, 그 대가가 부담할 수 있는 정도의 단계가 지나쳐 수탈적인 내용으로 바뀌어 갔다. 이 과정에서 이향층의 일부는 수령중심의 수탈체계에 문제를 제기하기도 하였지만 아직 대부분은 그 수탈체계에 편승하여 모순을 증폭시켜 나갔다. 수령을 대신해서 새로이 향권에 참여하고 있었던 이향층들의 발호가 또 다른 사회문제로 드러나게 되었던 것이다. 이향의 발호는 이들 새롭게 성장해 온 계층을 관직체계로 흡수할 수 있는 새로운 관료제 운영원리의 성립을 요구하는 것이었지만, 이같은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던 조선 후기 관 주도의 향촌질서는 항상적 위기에 직면하고 있었다.

<金仁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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