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4권 조선 후기의 사회
  • Ⅱ. 향촌사회의 변동
  • 5. 계의 성행과 발전
  • 1) 조선 초·중기의 계

1) 조선 초·중기의 계

 契는 우리 나라의 독특한 사회제도요 조직형태이다. 계에 비견할 만한 제도나 조직이 다른 문명권에도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계처럼 전근대 사회구조 속에 포괄적으로 뿌리내리고 있었던 것은 없다. 따라서 계는 우리 나라 전통사회의 특질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는 조직형태이다.

 그 동안 계는 전근대사회에서 성행했던 조직형태라는 점 때문에 흔히 「공동체」로 규정되어 왔지만,668)金三守,≪韓國社會經濟史硏究≫(博英社, 1964;개정판, 1974) 참조. 최근에는 조직구조적 특성에서 볼 때 공동체라기보다는 오히려 결사체적인 것으로 파악해야 한다는 견해가 나오고 있다.669)金弼東,≪韓國社會組織史硏究-契組織의 構造的 特性과 歷史的 變動≫(一潮閣, 1992), 제3부의 결론부분 참조. 그것은 다양한 형태와 내용의 계를 공통적으로 아우르는 중심원리는 구성원들간에 목적을 달성하고자 하는 약속에 있고, 계가 성립되는 계기 또한 대부분 자연발생적인 것이 아니라 구성원들에 의한 의도적 결성에 있었기 때문이다.670)金弼東, 위의 책, 89쪽. 또한 그 동안 계의 殖利的 요소가 강조되어 왔으나 조선 중기 이전의 계에서는 식리활동을 찾아볼 수 없고 조선 후기에 나타나는 식리활동도 계활동의 수단이지 목적은 아니었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계는 한국인의 사회생활의 오랜 전통 속에서 서서히 발전해 온 사회제도였기 때문에 그 정확한 기원을 알 수가 없다. 문헌상으로 확인되는 최초의 계는 12세기 중엽 고려 의종년간 庾資諒이 동료들과 함께 조직한 「文武契」로 알려지고 있다.671)≪高麗史≫권 99, 列傳 12, 庾應圭 附 資諒.
權文海,≪大東韻府群玉≫권 14, 契.
그러나 당시 유자량이 16세의 소년이었다는 점을 감안한면 이 때 계가 성인들간에 어느 정도 유행하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고, 따라서 계가 성립된 시기를 좀더 올려 잡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社交契」의 사례는 고려 중·후기에 걸쳐 몇 가지 더 찾아볼 수 있으며,672)金弼東, 앞의 책, 제2부 2장 참조. 특히 고려 말엽에는 계가 상당히 성행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673)이 점에 관해서는 李詹의 문집인≪雙梅堂集≫에 수록된 8통의 契文들이 주목된다.
鄭求福,<雙梅堂 李詹의 歷史敍述>(≪東亞硏究≫17, 西江大, 1989).
金弼東, 위의 책, 제4부 2장.
다만 이 시기 계의 종류는 어디까지나 지배층 내지 儒者들 사이의 사교계로 한정되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사교계는 이후 다른 여러 종류의 계들이 그것으로부터 파생·분화되어 감에 따라 계의 원형으로서의 의의를 갖게 된다.674)金弼東, 위의 책, 제4부 2장 참조.

 조선 초까지 주로 사교계의 형태로 존재해 왔던 계는 15세기 중엽에 이르면서 새로운 종류의 계로 분화되기 시작하는데, 「族契」와 「洞契」가 그것이다. 양자는 모두 그 구성원이 일정한 범위의 친족집단 성원이나 같은 지역에 거주하는 사람들로 한정되었다는 데 기본적인 특징이 있다. 초기의 족계와 동계는 아직 서로 명확하게 분화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조선 전기에는 아직 父系 친족집단으로서의 宗族(宗中)이 성립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족계라 하더라도 거기에는 해당지역의 內外親(특히 女壻와 外孫)을 구성원으로 포괄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 때문에 당시의 족계는 동시에 동계의 성격을 지녔던 것이다.675)족계 겸 동계의 모습을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초기 사례로는 15세기 중엽 金克一이 里中人들과 더불어 만든 「睦族契」가 있다. 목족계에 대해서는 權文海의 앞의 책을 참조하였다. 물론 이 무렵부터 가장 오래된 계의 형태인 사교계 자체도 다양한 형태와 범위로의 발전을 보여주고 있었다.676)사교계는 학문적 동료나 동향인, 그중에서도 동년배들 사이에서 결성된 「甲契」가 가장 많았지만, 과거에 함께 합격했거나(「榜會」), 같은 관청에서 근무하는 사람들(「廳契」 또는 「僚契」) 사이에서도 결성되었으며, 정치적 행동을 같이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결성되곤 했다(金弼東, 앞의 책, 제4부 2장).

 이 시기에 족계와 동계가 새롭게 출현하게 된 것은 한편으로는 조선의 건국을 전후하여 거주지의 이동이 활발해지고, 다른 한편으로는 주자학의 수용으로 家禮·宗法·鄕約 등 향당도덕에 대한 이해를 가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새로운 거주지에 정착한 유자들 즉 士林派는 자신들의 정착기반을 다지기 위해 우선 친족집단 내부의 결속을 다지고 나아가 촌락수준의 결속을 도모할 필요가 있었으며, 동시에 자신들의 새로운 윤리관을 실천할 제도를 모색하게 되었는데, 그 결과가 족계와 동계로 나타나게 되었던 것이다.677)鄭震英,<16세기 安東地方의 洞契>(≪嶠南史學≫창간호, 嶺南大, 1985).
金武鎭,<朝鮮中期 士族層의 動向과 鄕約의 性格>(≪韓國史硏究≫55, 1986).
金弼東, 위의 책, 제4부 2장.
이 때문에 족계와 동계에서는 우선적으로 구성원간의 정신적·정서적 유대 즉 친목의 도모가 강조되면서, 이를 보장할 수 있는 구체적인 장치로 吉凶扶助의 내용을 포함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후 족계와 동계는 뚜렷이 분화되어 나름의 중요한 사회적 기능을 수행해 가게 된다. 즉 초기의 족계는 16세기 말부터 점차 길흉부조보다는 祖先奉祀의 기능이 상대적으로 강화되는 「宗契」의 모습으로 구체화되면서 종중·종족의 형성에 중요한 디딤돌로 작용하게 되었다. 한편 동계는 마을의 하층민들에 대한 신분적 지배·통제의 기구로서의 성격을 좀더 분명하게 드러내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16세기 후반부터 17세기 전반에 이르는 기간 동안 뚜렷하게 나타났다. 그 가장 두드러진 모습은 동계를 上契와 下契의 중층적 구조로 조직화한 것이다 상계란 양반(사족집단)으로 구성되는 계의 부분이고, 하계는 하인(상민과 노비)으로 구성되는 계의 부분이다. 원래 동계에서 하인은 계의 구성원으로 직접 포함되지 않았다. 히인집단을 계원으로 포섭하게 된 것은 이들을 일정하게 대우하여 공동체의 「통합」을 꾀하면서, 동계의 틀 속에서 이들을 보다 효과적으로 통제·지배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런 상·하계의 중층적 구조가 처음으로 확인되는 것은 栗谷 李珥가 만든<社倉契約束>이며, 이는 임진왜란 이후 향촌사회의 재건과정에서 보편화되었다.678)그런데 「사창계약속」에서 상계와 하계란 용어가 정칙된 것은 아니고 다만 내용적으로 사족과 하인에 대한 구별이 규정되고 있을 뿐이다. 상·하계의 구조와 그 의미에 대해서는 다음의 연구가 참고되는데 서로 해석이 약간 다르다.
金弼東, 위의 책, 151∼157쪽.
朴景夏,<倭亂 직후의 鄕約에 관한 硏究-高坪洞洞契를 중심으로>(≪中央史論≫5, 中央大,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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