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4권 조선 후기의 사회
  • Ⅱ. 향촌사회의 변동
  • 5. 계의 성행과 발전
  • 2) 조선 후기 계의 성행

2) 조선 후기 계의 성행

 조선 후기에 들어오면서 계는 상당히 큰 변화를 겪게 된다. 우선 계의 종류가 훨씬 다양해지고, 계를 만드는 사람들의 범위도 크게 확장되며, 절대수에 있어서도 계는 크게 증가한다. 한편 계는 제도적인 측면에서도 훨씬 더 발전된 면모를 갖추게 된다. 이러한 변화는 이미 16세기 후반부터 진행되어 온 변화의 연장선상에서 나타나는 것이지만, 변화의 결과가 뚜렷한 모습을 드러내게 되는 것은 17세기 중엽 이후라고 생각된다. 조선 후기에 있어 계 발전의 이 두 측면은 상호 긴밀하게 연결되지만, 편의상 이 절에서는 먼저 전자에 관해 살펴보고, 후자에 대해서는 절을 바꾸어 서술하기로 한다.

 먼저 현상적으로 관찰되는 계의 발전상은 계의 종류가 상당히 다양해졌다는 것이다. 이미 존재하고 있던 사교계·족계(종계)·동계 외에도 學契·喪契·松契 등 조선시대의 계를 대표할 만한 계의 종류들이 적어도 17세기 중엽에서 18세기 중엽에 이르는 시기에 새로 출현하였고, 종계 또한 그 성격을 더욱 분명히 하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계가 수행해야 할 사회적 기능이 다양해지고 구체화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므로 그 자체가 조선사회의 발전을 나타내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학계는 아동들의 교육이나 구성원들의 학문적 수련을 목적으로 조직된 것이다. 학계는 몇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전형적인 학계는 마을 또는 문중의 아동들을 교육시키기 위한 서당을 경영하려고 만든 「書堂契」 또는 「家塾契」로서 이들은 종계 및 동계로부터 분화된 것이다. 또한 특정한 학자의 제자들이 講會를 열면서 스승을 봉양하거나 추모하는 일을 수행하는 「門生契」나 기타 士人들 사이에서 학문수련을 심화시키기 위해 조직한 「儒契」 등도 학계에 포함시킬 수 있다. 시기적으로 보면 오히려 뒤의 두 가지 유형이 앞섰던 것으로 보이는데, 그것은 이 두 유형의 학계가 사교계의 직접적인 연장선상에서 이해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목적하는 바가 좀더 제한되고 구체화되었다는 점에서 단순한 사교계와는 구별될 수 있다. 그런데 문생계가 성립하는 것은 李滉·李珥 등과 같은 대학자의 출현 및 그 제자들에 의한 학파로의 발전과 관련이 있다.679)초기 문생계의 전형적인 사례 가운데 하나가 광해군 2년(1610) 율곡의 문인들 사이에서 조직된 「同門契」이다(朴汝童,≪松崖集≫, 同門契序).

 상계는 일찍부터 기존의 계의 주요한 구성요소를 이루고 있던 길흉부조의 기능이 전면에 부각되면서 나타난 형태였다. 상계의 초기 형태는 상부상조에 대한 조항이 구체적으로 포함된 사교계에서 관찰된다.680)예컨대<成化丙午同庚契軸>(1506년 결성)을 들 수 있다(吳世昌 등 편,≪嶺南鄕約資料集成≫, 嶺南大 出版部, 1986, 310∼311쪽). 이런 의미에서 상계는 일차적으로 사교계로부터 분화된 것이다. 그러나 상계는 또한 동계로부터 분화된 것이기도 했다. 17세기까지의 동계는 일차적으로 하층민들에 대한 재지사족의 신분적 지배기구로서의 의미를 갖는 것이었지만, 바로 그 지배를 효과적으로 달성하기 위해서는 하층민들을 끌어안는 「통합」의 기제를 스스로 갖추고 있어야 했다. 그 중요한 내용이 바로 동계 구성원들간의 길흉부조였다. 그러나 18세기 중엽 이후에는 동계가 갖는 신분적 지배기구로서의 성격이 상대적으로 약화되었다. 상사에 필요한 경제적 부담을 해결해야 한다는 현실적 요구가 촌락의 班·常 모두에게 절실해지면서 보다 제한된 목적을 갖는 상계가 동계로부터 분화되어 갔던 것이다. 이런 유형의 상계에서는 반·상이 함께 참여하더라도 구성원들간의 신분적 차별은 거의 나타나지 않았으며,681)≪板契≫(1768;서울大 古圖書 5129-21).
≪爲親賻慰契(座目)≫(1812;서울大 古圖書 5129-24-1).
나아가 상계는 상민들 사이에서도 결성되게 되었다.

 송계는 삼림 및 분묘의 보호와 이용을 목적으로 조직된 계이다. 송계는 특정지역을 기초로 성립되고 지역공동체 성원들에게 강제력이 행사된다는 점에서 「地域契」의 일종이다. 따라서 일차적으로는 동계로부터 분화된 것이지만, 족계로부터 분화되었다고 볼 수 있는 측면도 있다. 송계가 성립되기 이전 삼림의 보호와 先塋(선산)의 수호라는 의식은 16·17세기의 일부 동계에 이미 투영되고 있었는데,682)≪洞案≫, 嘉靖 3년 정월 25일 洞中立議(高麗大 圖書館, 신암 B8-Al56).
≪溫溪洞規≫, 洞令(1566).
琴蘭秀,<洞中約條小識>(1598).
鄭 琢,<高坪洞契更定約文>(1601).
이상≪洞案≫을 제외한 자료는 吳世昌 등이 펴낸 앞의 책에 수록되어 있다.
이런 기능이 전면에 부각되면서 나타난 것이 송계였던 것이다. 예컨대 지금도 전하는 가장 오해된 松契帖의 하나인≪松明洞禁松契帖≫(1763)의 서문을 통해 우리는 송계에 무엇보다도 선영수호 의식이 강하게 투영되고 있음을 살필 수 있다.

 그러나 대체로 19세기에 접어들면서, 송계는 선영수호 의식에 더하여 점차‘棟梁之具’·‘棺槨之器’로서의 소나무의 이용 가치를 강조하고683)≪禁松契立議≫序文(1827 또는 1767;서울大 奎章閣圖書 27029).
≪禁松契節目≫, 序文(1838;서울大 古圖書 5129-20).
나아가 「植松」사업도 적극적으로 벌이는684)위의≪禁松契節目≫立議의 마지막 조항에는 ‘種松百株’가 규정되고 있다. 등 그 기능이 발전하게 된다. 이와 같은 송계의 변모는 19세기 말 이후에 이르면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그 결과 나무를 심고 길러서 판매한 이익금을 山主 및 계원들이 분배하거나 계원 또는 촌락의 공동경비로 사용하는 경우도 나타나게 되었다.685)<尙州郡內南面巨勿里里中契>(1898년 重設;朝鮮總督府 編,≪契·親族關係·財産相續の槪況≫, 원고본, 國史編纂委員會 소장).
이 밖에 淺野力,<江原道襄陽郡に於ける松契に就て>(≪朝鮮彙報≫37, 1918)에 수록된 조선 말기 이래의 몇몇 松契의 사례들을 참조하였다.

 한편 계는 18세기 말 이후 새로운 변모를 겪게 된다. 이 시기의 계에 나타난 중요한 변화는 「동계」의 성격 변화와 그 일환으로서 동계로부터 「軍布契」·「戶布契」·「補民契」 등의 應稅組織의 성격을 갖는 계들이 분화되었다는 점이다. 앞 절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기존의 동계가 갖는 일차적인 기능은 하층민에 대한 신분적·이데올로기적 통제에 있었다. 그것은 재지사족집단의 지배력을 강화·유지시키는 수단이 되는 것인 동시에 바로 그 지배력에 의해 가능한 것이기도 했다. 18·19세기에도 사족집단은 동계가 갖는 이러한 기능을 지속적으로 관철시키는 데 관심이 있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18세기 후반 이래 사족집단의 향촌사회에 대한 지배력은 현저히 약화되고 있었으며, 그 결과 국가는 재지사족을 매개로 하는 종래의 지방정책에서 탈피하여 소농민과 촌락에 대한 직접적인 장악을 시도하게 되었다.686)金仁杰,<朝鮮後期 鄕村社會 統制策의 위기-‘洞契’의 性格變化를 중심으로->(≪震檀學報≫58, 1984).
―――,≪朝鮮後期 鄕村社會 變動에 관한 硏究-18, 19세기 「鄕權」 담당층의 변화를 중심으로-≫(서울大 博士學位論文, 1991).
동계의 변화, 또는 새로운 응세조직으로서의 군포계·호포계·보민계의 출현은 이와 같은 향촌사회 변동의 배경 아래 이루어진 것이며,687)軍布契와 戶布契는 각각 군포 및 호포의 납부를 목적으로 조직된 것이고, 補民契는 다양한 형태·내용의 雜役 부담에 응하기 위해 조직된 것이다. 조선 후기에 성행한 「契防村」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보민계의 예로는≪密陽補民契節目≫(1883;서울大 古圖書 5129-7)이 있다.
때로는 동계의 명칭을 유지하면서도 이와 같은 응세조직으로 기능한 경우도 있었다.688)「洞契」라는 이름 아래 戶布(錢)의 납부를 주된 목적으로 하는 계의 사례는 많다(朝鮮總督府 編, 앞의 책).
≪史灘內面谷雲大同立議≫(서울大 奎章閣圖書 27175) 참조.

 그러나 이 시기에 이르러 모든 동계가 이와 같은 변화를 겪었던 것은 아니다. 지역에 따라서는 외형적으로나마 기존의 동계조직이 유지되는 곳도 있었으며, 응세조직으로 기능했다 하더라도 동계는 대개 여전히 다른 기능을 함께 수행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동계의 변화는 국가의 납세요구에 촌락민이 주체적으로 대응하여 계를 활용한 데서 나타난 것이다. 또 그것은 계의 주도집단이란 측면에서 보면 재지사족의 일방적 지배로부터 하층민의 참여가 상대적으로 부각되는 방향으로의 변화, 또는 계의 참여에서의 신분적 차이가 완화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689)동계의 중층적 구조의 해소 경향이나 향리집단의 조직운영이 계의 형태를 갖게 된 점, 한양을 중심으로 중인·서리·평민들이 다수 참여하는 「委巷詩社」가 성행한 것 등은 모두 계의 발전과 양반이 아닌 신분층의 성장을 보여주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변화의 양상 그 자체가 조선사회의 전반적인 발전의 일면을 보여주는 것임은 말할 것도 없다. 향리집단의 계와 위항시사에 대해서는 다음의 연구가 참고된다.
金弼東,<朝鮮後期 地方吏胥集團의 組織構造-社會史的 接近(上·下)>(≪韓國學報≫28·29, 一志社, 1982).
―――,<조선시대 ‘중인’신분의 형성과 발달>(≪韓國의 社會와 文化≫21,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3).
이렇듯 계를 결성하는데 하층민의 참여가 활발하게 이루어짐으로써 계는 그 종류와 절대수, 구성원들 참여의 폭에서 커다란 성장을 보게 되었다.690)예컨대 「貢契」·「廛契」·「客主契」·「褓負商契」 등의 특권적 상인조합의 성격을-갖는 계와 「僧侶甲契」·「燈燭契」·「佛糧契」 등 불교사원과 결부된 각종의 계, 양반·宮家의 노비들이 조직했다는 「劍契」나 「殺主契」와 같은 사례를 들 수 있다.

 한편 재지사족집단의 동계조직과 구별되는 기층민의 계조직으로서 ‘촌락민의 생활공동체 조직’이라고 하는 「村契」의 존재가 주목되고 있다.691)金龍德,<朝鮮後期의 地方自治-鄕廳과 村契>(≪國史館論叢≫3, 國史編纂委
員會 1989).
―――,<總序:鄕約新論>(≪조선후기 향약연구≫, 民音社, 1990).
李海濬,<朝鮮後期 洞契·洞約과 村落共同體組織의 性格>(≪조선후기 향약연구≫, 民音社, 1990).
―――,<朝鮮時代 香徒의 변화양상과 村契類 촌락조직>(≪省谷論叢≫21, 1990).
「촌계」는 사족들에 의한 동계가 만들어지기 이전부터 존재해 온 것이고 그 실체는 고려말부터 조선 초기의 香徒나 16세기의 ‘鄕村結契’, 나아가 촌락의 전통의례인 泂祭(村祭)의 존재로부터 찾을 수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692)金龍德, 위의 글(1990). 그러나 동제나 洞會(村會)·洞宴·洞里의 공공사업·두레 등 촌락의 모든 공동체적 활동을 「촌계」의 개념 속에 포함시키는 것은 「촌계」의 개념과 용법을 너무 포괄적으로 규정하는 문제가 있을 뿐 아니라 계 자체의 개념을 혼동시킬 우려가 있다. 더욱이 「촌계」의 명칭은 기록상으로 분명하게 나오지 않고 있다. 그렇지만 촌계에 대한 문제의 제기는 문헌이 별로 남아 있지 않은 기층민들의 계조직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켜 주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으므로 좀더 진지한 검토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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