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4권 조선 후기의 사회
  • Ⅱ. 향촌사회의 변동
  • 5. 계의 성행과 발전
  • 4) 19세기 말∼20세기 초의 계의 변모

4) 19세기 말∼20세기 초의 계의 변모

 고종 13년(1876) 開港을 계기로 조선사회는 급속하게 자본주의적 세계체제 안으로 편입되었다. 그 결과 사회경제 전반에 걸쳐 근본적인 변화를 겪게 되었다. 물론 그 변화는 단지 「개항」과 그로 인한 세계자본주의 체제로의 편입에 의해서만 초래된 것은 아니었고, 이미 그 이전부터 전개되어 온 「내생적」변동의 지속, 또는 가속화라는 맥락 속에서도 포착되어야 할 성격의 것이다.

 이 시기에 이르러 계가 겪게 된 변화과정도 이러한 전체 사회구조의 변동과 기본적으로 궤를 같이하였다. 이 시기에 이루어진 계의 변화상을 요약해 보면, 첫째 조선 후기 이래 계가 겪고 있던 변화 추세의 지속 또는 가속화, 둘째 기존 계의 소멸, 셋째 새로운 계의 생성, 넷째 계의 보다 근대적인 조직형태로의 발전이라는 몇 가지 점이 서로 관련된 맥락 속에서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우선 조선 후기 이레로 나타났던 계의 변화 추세는 더욱 높은 수준으로 전개되어 갔다. 즉 계의 종류와 기능은 더욱 분화되고 특정화되어 갔고, 계의 기금은 더욱 빨리 금전으로 일원화되어 갔으며, 식리활동 또한 강화되는 추세에 있었다. 또한 상·하계의 중층적 구조와 태형이 사실상 소멸된 데서 볼 수 있듯이, 계원간에 작용했던 신분적 지배의 양상도 현저하게 약화되었으며, 아울러 계의 조직주체로 하층민이 등장하는 현상도 더욱 확연해지게 되었다.

 한편 이 시기에는, 특히 20세기에 들어오면서, 그 이전부터 존재해 오던 상당수의 계들이 소멸되는 운명을 겪었다. 이러한 현상은 동계 및 주로 촌락에 기반을 두고 있는 계의 경우에 두드러졌는데, 그 원인으로는 다음의 세 가지 사실이 주목된다.

 첫째, 촌락의 경제적 분화와 농민층의 궁핍화가 심화되어 더 이상 契錢의 利子收捧이 어렵게 되었고, 심지어는 계전의 분배를 통해서라도 경제적 위기를 일시적으로나마 피해 보고자 하는 경우가 생기게 되었다. 그 결과 상당수의 동계가 계를 해산하고 계원들에게 계전을 분배하게 되었다.

 둘째, 1900년대의 「애국계몽운동」의 전개과정에서 계는 새로이 설립된 공·사립학교에 설립자금이나 운영자금으로 계의 재산을 기부하고 해산되기도 하였다.

 셋째, 1908∼1909년경 일제 통감부에 의해 「공동재산 조사사업」이 실시되었는데, 민중들은 이를 자신들의 공유재산으로서의 계전에 대한 약탈의 일환으로 이해하여 계를 해산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상 세 가지 원인·계기들은 서로 중첩적으로 작용되기도 하였는데 그것들은 당시의 사회·경제적 조건에 공통적으로 규정받는 것이기도 하였다. 그 조건이란 바로 봉건적 수탈의 심화와 일제의 경제적·정치적 침략에 따른 농촌의 피폐상, 그리고 이를 배경으로 한 민족적 위기감의 고조였던 것이다.

 이렇듯 이 시기에는 전통적인 계들 가운데 상당수가 소멸되고 있었지만, 다른 한편 새로운 종류의 계들이 생겨나기도 했다. 「殖利契」·「작박계」·「萬人契」 등이 그것이다. 식리계는 자금융통 및 이자취득을 목적으로 설립된 일종의 사금융제도였지만, 작박계와 만인계는 다수의 사람들이 일정한 액수의 돈을 내고 추첨을 하여 당첨된 사람이 많은 액수의 당첨금을 차지하는 것으로, 일종의 도박이다.699)「작박계」는 「算筒契」·「作罷契」 등으로도 불리었고, 「萬人契」는 「千人契」·「三十六契」 등으로 불리기도 하였는데, 전자는 비교적 조직적이고 지속적인 성격을 갖지만, 후자는 단 1회의 추첨으로 끝나 더욱 투기성이 강하였다. 그러나 때로는 양자의 명칭이 혼용되기도 하였는데, 그것은 양자가 본질적으로 동일한 성격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金弼東, 위의 책, 305∼311쪽).

 식리계는 운영을 위한 「수단」에 불과했던 「식리활동」이 「목적」 그 자체로 변질됨으로써 출현한 계의 변종이다. 따라서 식리계는 기존 계의 연장선상에서 이해될 수 있는 측면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작박계와 만인계는 전통적계의 개념으로부터 사실상 이탈한 전혀 이질적인 제도였으며, 다만 그 명칭에 「계」라는 표현이 첨부되어 있는 것에 불과하였다. 특히 작박계·「三十六契」 등은 청국인 및 일본인들에 의해 행해지는 경우가 많았던 것으로 보아, 외국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700)예컨대 작박계는 중국의 「彩票」에서 기원한 것이라는 견해가 있다(李覺鍾, ≪契に關する調査≫, 朝鮮總督府, 1923).

 어쨌든 작박계와 만인계의 성행은 많은 사람들이 일확천금의 유혹에 빠져 가산을 탕진하게 하는 등 심각한 사회문제를 야기시켰다. 결국 이 계들은 한말의 경제적·사회적·정치적 불안정과 그로 인한 조선민중의 궁핍상 및 사회 병리적 현상을 존립조건으로 하면서, 동시에 그것들을 더욱 가속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이 시기의 계의 변화상으로서 또한 주목하지 않으면 안되는 사실은 계가 보다 근대적 조직형태로 발전되어 가기도 했다는 점이다. 한말에는 종래 존재하지 않던 새로운 조직형태들, 즉 각종 회사, 학회, 사회·종교·언론단체들이 생겨나고 있었다. 이러한 근대적인 사회조직들이 형성되는 기본적인 배경으로는 근대화과정에 따른 조직·단체에 관한 서구제도의 문화수용을 우선 지적해야겠지만, 여기에는 또한 「계」의 전통과 관습이 작용하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그 중에는 계의 조직적 발전, 또는 계의 근대적 조직형태로의 전화라는 양상을 띠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이러한 방향으로의 계의 변화를 구체적으로 살필 수 있게 해주는 자료로는<輪仁社規範>과<晉陽契>가 있는데,701)전자는 1903년 儒風의 진작을 위해 유생들이 조직한 일종의 「學契」였고, 후자는 1910년 晉州 촉석루에서 거행하던 제사를 虔奉하고 촉석루를 보존하기 위해 조직한 계였다(金弼東, 앞의 책, 312∼315쪽). 이들 자료에 나타난 계의 변화상을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① 성원자격이 더욱 개방적으로 되고 거의 전국에 걸쳐 조직됨에 따라 계원의 수가 많아지고 참여의 폭도 훨씬 넓어졌다. 특히 진양계의 경우에는 여성의 참여가 허용되고 있다. ② 계의 운영기구가 업무에 따라 더욱 분화되고, 契長의 역할과 권한이 훨씬 강화되었다.702)계는 원래 「有司」라고 불리는 집행부 중심의 조직이어서, 契長의 역할과 지위는 상징적인 성격을 갖고 있음에 불과했다(金弼東, 위의 책, 138∼141쪽). ③ 계의 집회 및 회의도 훨씬 체계적으로 제도화되고 있었다.703)진양계의 경우 계원총회·임원회의·평의회 등이 있고, 집회시기도 명확한 일시가 규정되고 있었다. ④ 임인의 선출과 회의 운영에 있어서는 서구적인 조직 운영 및 회의의 진행방법이 적용되고 있었다. ⑤ 使役人 모두와 집행부(「輔仁社」의 경우)에 급료가 지불되고 있었다. ⑥ 기금 마련의 방법은 계원의 능력에 따라 차등을 두어 보다 많은 액수의 기금을 효과적으로 모을 수 있도록 구체적이고 제도화되고 있었다. ⑦ 계의 목적·사업은 더욱 구체적이고 공공적 성격을 띠고 있었다.

 이상의 두 사례를 통해 일부의 계가 일본 또는 서구로부터 소개된 근대적인 조직형태들과 습합되고 있는 모습을 엿볼 수 있다. 그렇지만 그러한 습합이 용이하게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은 계의 조직원리 자체에 근대적인 조직형태들과 공유될 수 있는 결사체적 요소가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한말에 각종 사회단체들이 활발하게 조직될 수 있었던 배경, 즉 제도적·문화적 전통의 일단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金弼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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