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4권 조선 후기의 사회
  • Ⅲ. 민속과 의식주
  • 1. 촌락제의와 놀이
  • 2) 연희와 놀이
  • (1) 가면극

(1) 가면극

 민간에 전승된 演戱에는 탈춤으로 北靑獅子놀음·鳳山탈춤·康翎탈춤·殷栗탈춤·楊州別山臺놀이·松坡別山臺놀이·江陵官奴假面戱·河回別神굿놀이·東萊들놀음·水營들놀음·統營五廣大놀이·固城五廣大놀이·駕山五廣大놀이·楊州소놀이굿·平山소놀이굿이 있다. 이러한 탈춤들의 기원은 삼국시대에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으며 후세에 내려오면서 연희요소가 첨가되어 연희로서 발전해 왔다.

 원시연희는 대개 神祭과정에서 娛神으로 놀이되었으나 후세에 내려오면서 관중을 상대로 하는 연희로 정착하였다. 직업적인 연희자들에 의해서 수시로 놀이되어 전국을 순회하거나 慶宴席에서 연희하고 대가를 받아 생계를 이어가게 되었으니 사당패들이 그 예이다.

 연희는 다음과 같이 나누어 볼 수 있다. 봉산·강령·은율의 탈춤을 같은 계열로 海西탈춤이라 부르고 양주와 송파의 탈춤은 별산대라 부르며 동래·수영은 들놀음 즉 野遊라고 부른다. 통영·고성·가산의 탈춤은 오광대라 부르고 하회와 강릉의 관노놀이는 따로 독립시켜 분류하고 있다. 서울 근교인 양주에서 전승되어 온 양주별산대놀이는 山臺都監이 관장하던 산대도감극으로서 영조 이후 산대희가 공식적으로 폐지된 후에 형성되었거나 儺禮잡희에서 유래했을 것으로 해석된다. 산대도감극은 원래 왕의 行幸 때와 安胎·경연 때 그리고 중국사신이 내왕할 때에 여흥으로 놀이되었다. 연희를 담당한 사람들은 도성 근처에 살았으나 산대도감극이 공적으로 폐지된 후 분산하여 碌磻·애오개(阿峴)·退溪院 등지에서 살다가 생활수단으로 서울과 지방을 돌아다니며 연희하면서 양식을 청하였다.

 양주고을에서는 약 200년 전부터 해마다 4월 초파일과 5월 단오날에 백정상두군 건달로 구성된 서울 사직골 딱딱이패를 초청하여 산대놀이를 놀게 하였는데, 그들은 지방순회와 그 밖의 일로 공연약속을 어기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양주골에서는 불편을 느낀 나머지 신명이 많은 자들, 주로 아전끼리 사직골 딱딱이패를 본떠 가면 등을 제작하고 실연하였다. 그 결과 성과가 나쁘지 않아 의외의 성공을 거두고 그 뒤부터 발전시켜 내려온 것이 양주별산대놀이이며 당시의 중심인물은 李乙丑으로서 그는 양주 최초의 가면제작자라고 전해지고 있다.705)李杜鉉,≪韓國假面劇≫(文化財管理局, 1969), 205쪽.

 양주별산대놀이에 쓰이는 전승된 탈은 다음과 같다.

상좌;탈은 2개이며 바가지탈에 얼굴은 희고 快子 위에 흰 도포를 입고 붉은 띠를 두르고 꼬깔을 쓴다. 옴;자주빛 얼굴로 옴이 많고, 용을 그린 장삼을 입는다. 연잎;머리에 연잎 쓴 것 같고 붉은 얼굴로 혹이 양 볼에 달려 있고 청창의를 입고 행전을 친다. 눈끔적이;자주빛 얼굴로 눈썹을 크게 채색했고 양 볼에 혹이 있다. 등에 호랑이를 그린 장삼을 입고 붉은 띠에 회색 행전을 친다. 목중;탈 4개, 주홍색 얼굴로 아래턱이 앞으로 나왔다. 장삼을 입고 붉은 띠에 회색 행전을 친다. 완보;붉은 바탕에 큰 얼굴이며 관을 썼다. 용을 그린 장삼을 입고 붉은 띠에 관을 쓰고 꽹과리를 들고 있다. 신주부;자주빛 얼굴로 양 볼에 혹이 있고 아래턱이 앞으로 나와 있다. 두루마기를 입고 관을 쓴다. 노장;검은 얼굴로 흰 점과 붉은 점이 있고 아래턱이 앞으로 나와 있으며, 송낙을쓰고 잿빛 장삼을 입고 붉은 띠를 두르고, 염주를 목에 걸고 그림부채와 죽장을 손에 든다. 왜장녀;흰 얼굴로 양 볼에 연지를 찍고 큰 머리를 한다. 옥색 치마와 저고리·흰색 속곳·붉은 띠에 괴나리봇짐을 지고, 징·꾕과리·북을 머리에 이기도 하는 변화있는 복색이다. 소무;탈 2개, 왜장녀와 비슷하게 흰 얼굴로 연지찍고 큰 머리에 연두색 저고리·다홍치마를 입거나 노랑 저고리에 남치마를 입고 쾌자를 입고 붉은 띠를 두른다. 말뚝이;자주빛 얼굴로, 이마에 주름이 많고 아래 입술은 내밀었고 청창의를 입고 붉은 띠에 패랭이를 쓰고 채찍을 손에 든다. 역할은 하인이나 신장수, 토끼역까지 정하기도 한다. 취발이;진홍색 얼굴로 머리 정수박이(정수리)에만 상투머리가 있고 등에 학을 그린 청창의에 붉은 띠를 두르고 손에 생나무가지를 든다. 쇠뚝이로 나올 때에는 곤장을 든다. 원숭이;몸집이 작고 붉은 얼굴로 원숭이와 똑같은 동작을 흉내낸다. 샌님;눈·코·입이 기형적인 얼굴로 흰 도포를 입고 유건을 쓰며 흰색 행전을 치고 부채를 손에 든다. 포도부장;흰 얼굴로 수염이 달려 있고 망건·갓을 쓰고 옥색 두루마기를 입는다. 신하라비;흰 얼굴로 눈썹과 수염이 희고, 흰 도포에 붉은 띠를 하고 관을 쓴다. 미얄할미;검은 얼굴로 큰 머리를 하고 흰 치마·저고리에 지팡이를 짚는다.

 가면극은 탈춤이라고 했을 만큼 무용이 주가 되어 있고 잽이(樂士)들의 반주에 맞추어 몸짓과 재담으로 엮어 나가 서민연희로 발전해 왔다. 탈춤의 대사에는 은어·음담·패설·욕설·쌍소리가 마구 섞여 있는데 낮은 계층에 속하는 연희자들이 서민 속에서 연희하는 과정에 그렇게 되었다. 솔직하고 노골적인 언동이 심해서 부녀자들은 관람할 수 없었고, 서민들 사이에서는 흥미진진하게 웃고 즐길 수 있었다.

 송파의 별산대놀이는 송파가 양주와 가까운 거리에 있어 유사점이 많았다. 松坡津은 나루터이고 중부로 빠지는 큰 길목이며 한강의 柴船이나 곡식·해산물을 실은 배가 닿는 곳이었다. 상업이 번창했던 곳으로 놀이패들에 의해서 별산대놀이가 전승되었으니 구전에 의하면 약 200년전 영조 말기 무렵에 형성되었다고 한다.

 송파별산대놀이의 기능보유자였던 李忠善(1901∼1991)은 소년시절에 놀이패들을 따라 다니면서 많이 보았고 그의 조부로부터도 송파별산대놀이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 그보다 선배격인 조영완(1865∼1949)·윤종현(1880∼1953)·김도환(1889∼1951) 등이 1800년대 말기 사람이고, 순조 9년(1809)에 이루어진≪만기요람≫에 송파장이 전국 굴지의 시장이라 하였으나,706)≪萬機要覽≫財用篇 5, 各廛 無分各廛 附鄕市. 중세의 예능인이나 광대들이 부의 그늘에서 성장한 것으로 보아 순조 초에는 이미 송파별산대가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북청사자놀음은 함경남도 북청지방에 전승되는 사자놀음으로 사자가 등장하고 퉁소의 음악반주가 특이하다. 사자놀이는 신라의 狻猊로 이미 나타나 있으며 불교문화와 함께 서역에서 전래한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탈춤에 있어 사자의 등장은 봉산탈춤·통영오광대·수영들놀음에도 있으나 사자놀이가 본격적으로 전개되는 것은 북청사자놀음이 유일하다. 북청지방에서는 정월 대보름에 백수의 왕인 사자를 앞세우고 집집마다 찾아다니면서 악귀를 쫓아내고 집안이 태평하기를 빌어주면서 답례로 돈이나 곡식을 받아 마을기금으로 삼았으니 辟邪進慶의 뜻이 있었다.

 황해도 鳳山·沙里院·安岳·信川·殷栗·海州감영 등지에서는 탈춤이 전승되어 왔으나 지금 보존되고 있는 것은 봉산탈춤·강령탈춤·은율탈춤이다. 이 세 탈춤은 전승지가 인접되어 있어 주제나 연희방법이 대동소이하다.

 봉산탈춤은 약 200년 전에 吏屬 安草木이란 사람에 의해서 중흥되고 나무탈을 종이탈로 개조하였다고 전한다. 봉산탈춤은 5월 단오명절에 크게 놀았고 해주감영에 가서 놀기도 하였다. 단오 무렵은 농군들이 잠시 망중한을 즐길 수 있는 계절이므로 농민들을 상대로 하거나 장터에 가서 상인들을 상대로 놀았으니, 놀이패는 주로 지방관속 등 낮은 계층이 주역이었다. 三絃六角으로 반주하는 타령·염불·굿거리에 맞추어 춤을 추었고, 재치있는 재담을 주고받아서 노래·춤·연극이 어울어지는 흥겨운 서민극으로 발전하였다. 첫째장에서 팔목중들이 활기차게 뛰어나와 춤추는 동작은 활달하면서 넓고 큼직한 모습이다. 봉산·은율·강령의 세 탈춤은 현지에서 연희를 본 사람들이 남하해서 재현하여 문화재로 지정받아 전승시키고 있다.

 동래와 수영에는 들놀음이 전해지고 있다. 원래는 경남 합천군 草溪에 탈춤이 전승되어 왔었는데 180년쯤 전에 수영사람이 가서 보고 흥미가 있어 수영에서 놀게 되고 그 다음 동래에도 전파하게 되었다고 한다.707)宋錫夏,<五廣大小考>(≪朝鮮民俗≫1, 朝鮮民俗學會, 1933). 따라서 동래보다는 수영의 들놀음이 전형이 되겠다.

 들놀음은 줄다리기·길놀이와 함께 마을 대동축제 때에 춤과 연극으로 흥을 한층 돋아주었으나 지금은 연희만 독립해서 놀이되고 있다. 수영과 동래의 들놀음 대동소이하지만 수영에는 사자가 있는데 동래에는 없고, 수영에는 문둥과장이 없으나 동래에는 있는 것이 다른 점이다.

 통영과 고성에는 오광대가 전한다. 오광대도 합천군 초계에서 전파되었다고 한다. 오광대란 말은 五行·五方神將·다섯 양반·다섯 문둥이 등 「五」의 수가 빈번히 사용되고 있어 여기에서 기원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정월 대보름의 봄놀이, 추석의 가을놀이가 있었고 기우제 때에도 놀았다. 통영에서는 보름날 아침에 統制使가 죄인을 문초하는 사또놀이를 논 다음 농악치고 놀다 밤이 되면 미륵산 잔디밭에 모닥불을 피워 놓고 밤새껏 놀았다.

 경북 안동군 하회마을에 별신굿놀이가 전승되어 있다. 하회별신굿은 娛神으로 「벽사진경」하며 민속제의와 함께 놀이된 것으로 미루어 禱神의 성격이강했다. 하회별신굿은 고려말 무렵부터 있었던 것으로 10년마다 있는 대제 때에 탈춤이 놀이되었다. 제사를 담당할 山主와 임원일동 그리고 광대들은 동구에 금줄을 치고 황토를 뿌리고 목욕재계를 해서 부정이 없도록 한다. 목수를 데리고 산에 가서 神竿木으로 쓸 나무를 베어 정성껏 다듬어 세운다. 정월 초이틀 아침에 보관한 가면을 꺼내서 제사를 지내고, 가면을 쓰고 서낭당에 가서 降神을 빈다. 대보름까지 합숙하면서 집집마다 찾아가서 축원하여 벽사하고 밤에는 여흥으로 탈놀음을 했다.

 강릉의 관노놀이 가면희는 단오제 때에 놀이되는 유일한 무언극이다. 매년단오 때에 대관령 서낭신을 모셔다가 여서낭과 合舍하고 여러 날 굿판을 벌이는 것이 단오제인데 이 때에 관노들에 의한 탈놀이가 있었다. 관노들에 의해서 놀이되었으므로 관노탈춤이라 불렀고 대사가 없고 무언으로 진행되며 등장인물은 양반·소매각시·시시딱딱이(2인)·장자마리(2인) 등 모두 6인에 불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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