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4권 조선 후기의 사회
  • Ⅲ. 민속과 의식주
  • 1. 촌락제의와 놀이
  • 2) 연희와 놀이
  • (4) 전승놀이

(4) 전승놀이

 전승놀이는 수없이 많다. 서구에서 전래된 놀이를 제외한 대부분의 것이 전래의 놀이다. 그러나 놀이에 관한 문헌기록은 별로 없다. 조선 후기는 물론 근대까지 서민생활을 기록한 문헌이 거의 없고 하물며 놀이와 같은 생활오락은 가치없는 것으로 판단하여 기록으로 남겨 놓지 않았다. 그러나 다행히≪동국세시기≫를 비롯하여≪열양세시기≫·≪경도잡지≫등에 약간의 기록이 있어 18세기 말엽부터 19세기 중반의 자료를 위주로 서술하기로 한다.

 정월놀이에는 연날리기·널뛰기·다리밝기(踏橋)·횃불싸움·돌싸움·車戰·회회(回回)가 기록에 보인다.

 연날리기는 섣달 중순께부터 시작하여 정월 대보름날에는 送厄으로 날려 보낸다. 연에다 이름과 생년월일시를 쓰고 연이 높이 올랐을 때에 실을 끊으면 연이 한없이 날아가는데 그 해에 든 액을 모두 싣고 가서 무병태평하라는 것이다. 연날리기는 엄동에 야외에서 놀기 때문에 추위를 이겨내는 체력과 정신력을 기르는 심신단련의 좋은 운동이 되었다.

 널뛰기는 소녀들이 하는 정초의 놀이이다. 운동이 부족한 소녀들에게 다리를 튼튼하게 단련시키는 좋은 운동이기에 주기적으로 권장되었다. 어린아이들은 5색의 종이로 팔랑개비를 만들어 풍향에 따라 돌게 하여 즐겼으니 回回兒라 불렀다. 또 실줄 끝에 거위털을 잡아매고 바람에 따라 날리는 놀이가 있었으니 姑姑妹라 불렀다 청소년들은 돈치기(擲錢)를 즐겼다. 5미터쯤 떨어진 땅바닥에 구멍을 파고 편을 갈라 돈을 그 구멍 속에 던져 넣는 것으로 승부내기를 해서 이긴 사람이 돈을 소유한다.

 대보름 초저녁 달이 떠오를 무렵 젊은 남녀들은 달맞이를 하기 위해서 가까운 산이나 언덕 위로 올라간다. 새해 들어 첫 만월이라는데 의미가 있었고 달을 먼저 보면 길하다고 하여, 각자 소원을 달에게 비는 일도 있었다. 학동들은 문장이 늘기를 빌었고, 소녀들은 바느질 솜씨가 늘기를 빌었다. 또 달의 색깔을 보아 일년 신수와 농사의 풍흉을 미리 점치기도 하였다. 야외에 나아가 달맞이하는 즐거운 놀이였다.

 대보름날 밤에는 다리밟기놀이를 하였다. 나이 수대로 다리밟기를 하면 좋다고 하여 이웃 마을까지 가서 다리를 밟아 수를 채우거나, 같은 다리를 몇 번이고 왕래하면서 수를 채우는 일도 있다. 다리밟기를 하면 다리가 튼튼해져서 병을 앓지 않으며 건강해진다는 데서 세시풍속으로 정착되었다. 서울의 水標橋·廣通橋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북을 치고 피리를 불며 혼잡을 이루어 관에서 금지시키는 일도 있었다.

 서울 3문 밖 사람들과 아현동 사람들이 만리고개(萬里峴)에서 몽둥이를 들고 돌을 던지면서 싸웠으니 石戰이다. 안동지방에서도 정월 16일에 돌싸움을 하였는데 그 승패로 농사의 길흉을 미리 점치기도 했다. 석전은 부상자도 나는 위험한 놀이였으나 젊은이들은 마을의 명예를 걸고 용감하게 싸웠다. 또 대보름밤에 청소년들이 긴 횃대에 불을 붙여 논두렁·밭두렁을 불태우는데 이 때에 이웃 마을 청년들과 마주치면 횃불싸움으로 발전한다. 옷에 불이 붙고 화상을 입는 수가 있지만 용감하게 싸웠다. 심신이 단련되고 진취의 기상을 길렀다.

 춘천지방에서는 車戰놀이가 있었는데 외바퀴였으며 그 승패로 농사의 풍흉을 미리 점쳤다. 영남지방에서는 칡으로 동아줄을 만들어 줄다리기(索戰)를 하였고 그 승부로써 농작의 풍흉을 점쳤다. 안동지방에서는 밤에 부녀자들에 의해서 놋다리밟기놀이가 행해졌다. 여인들이 골목길에 열을 지어 늘어서고 허리를 굽히면 그 위에 특별히 뽑힌 어린 소녀가 허리 굽힌 사람의 등을 밟고 앞으로 간다. 이 때 ‘놋다리야 놋다리야/이 다기가 뉘 다리고/나라님의 옥다릴세’라고 하는 노래를 부르면서 밤 늦도록 논다.

 이상은≪동국세시기≫에 기록된 놀이이다. 이 밖에도 雙六·陞卿圖·投壼·旗歲拜·木牛戱 등이 있었고, 장기·바둑·장치기·고싸움·가마싸움·서당놀이·팽이치기·공기놀이·제기차기·어름타기 등이 있었을 것이다.

 2월의 놀이로 영남과 제주도에서는 燃燈놀이가 있었다. 연등은 風神으로, 하늘에서 초하룻날 내려왔다가 보름날이나 20일에 하늘로 올라가는데 그 사이에 무당을 불러 굿을 한다. 제주도에서는 金寧·歸德 등지에서 장대 12개를 세워 놓고 신을 맞이해서 제사를 지냈다. 涯月지방에서는 나무로 말 머리를 만들어 채색비단으로 꾸며서 躍馬戱를 했다. 신을 즐겁게 하기 위한 것으로 보름날까지 하였는데 연등이라 했다.

 3월의 놀이에는 花煎·花柳·각시놀이가 있다. 화전은 산에 가서 진달래꽃을 따서 찹쌀가루에 반죽을 하여 둥근 떡을 만들고 기름에 지져서 만드는 것이다. 혹은 진달래꽃을 녹두가루에 반죽해서 만들기도 한다. 봄을 맞아 마을 친구끼리 미리 통문해서 화전을 만들어 먹고 봄의 경치를 완상하면서 흥에 젖어 하루를 즐기는 것이 화전놀이이다. 화전을 만들면서 부른 민요로서 화전노래가 많이 전하는데 여성시가문학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서울에서는 산 언덕이나 물 좋은 냇가에 가서 하루를 조촐하게 노는 것이 화류놀이이다. 삼짇날 踏靑하는 데서 유래하며 弼雲臺의 살구꽃, 北岳의 복숭아꽃, 興仁門 밖의 버들이 경치가 좋아 사람들이 많이 찾는 화류처였다. 궁사들이 활쏘기대회를 하는 것도 이 때였다. 편을 갈라 활을 쏘아 승부를 내고 음주를 즐겼는데 가을에도 대회를 열었다.

 소녀들은 푸른 풀을 뜯어 머리채를 만들고 나무를 깎아 머리채를 붙인 다음 붉은 치마를 입혀 인형을 만들고 각시라고 부르는 놀이를 즐겨했다. 소년들은 버들가지를 꺾어 호드기를 만들어 소리를 내며 놀았다. 소박한 음을 내지만 농촌에서 즐기기에는 충분했다. 이것을 柳笙이라 하였다.

 4월 초파일에 아이들이 물동이에 바가지를 엎어 놓고 빗자루로 두들기며 노는 것을 水缶戱라고 하였는데 물장구이다. 오른손으로 물장구를 치고 왼손으로 물동이를 치면서 노래의 장단을 맞추는 물박놀이는 오늘날에도 전승되고 있다. 경상도 態川지방에서는 熊山 꼭대기에 있는 신당으로부터 4월 10일에 신을 모시고 하산하여 종을 울리고 북을 치며 놀이를 하였는데 원근 사람들이 다투어 와서 구경했다.

 5월의 놀이로 그네와 씨름이 있다. 명절로 端午가 있어 단오날 남녀가 그네뛰기를 즐겨했다. 젊은이들이 남산의 倭場(倭城臺)이나 북악산의 神武門 뒤 에 모여 씨름을 해서 승부를 겨루었다. 그 방법은 두 사람이 서로 상대하여 구부리고 각자 오른손으로 상대방의 허리를 잡고 왼손으로 상대편의 오른발을 잡고 일시에 일어나 상대를 번쩍 들어 팽개치는 것이다. 그리하여 밑에 깔리게 되면 진다. 씨름의 기술은 內句라고 해서 안걸이, 外句라고 해서 밭걸이, 輪起라고 해서 둘러메치기 등 여러 가지 자세가 있다. 그 중 힘이 세고 손이 민첩하여 자주 내기하여 자주 이기는 사람을 都結局이라고 하였다. 중국사람은 이것을 高麗技 또는 撩跤라고 불렀다. 씨름은 서울과 시골에서 많이 하였으니 군사들의 힘내기 훈련도 되었다.

 경남 金海지방에서는 4월 초파일부터 아이들이 모여 돌싸움을 하는데 단오날이 되면 청년들이 모여 좌우로 편을 갈라 깃발을 세우고 북을 치고 고함을 지르면서 달려들어 돌을 던진다. 마치 비가 오는 것 같았고 결국 승부가 나서야 끝났다. 비록 사상자가 나도 후회하지 않고 수령도 금지시킬 수 없을 정도로 격렬했다.

 6월에는 濯足놀이가 있다. 서울의 풍속에 남산과 북악산 계곡에서 탁족놀이가 있었다. 여름철 삼복 더위에 그늘을 찾거나 산 계곡의 흐르는 맑은 물에 발을 담그면 온몸이 시원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피서방법의 하나로 탁족을 하였다. 전국 곳곳에는 약수터가 있고 약수물이 차가우므로 명산 계곡을 찾아 탁족하는 풍류가 있었다. 서울의 天然亭·三淸洞 蕩春臺·貞陵은 경치가 좋고 물이 차고 맑아 특히 여름철에는 사람들이 모여들고 탁족하기에 알맞은 곳이었다.

 7월에는 백중놀이가 있다. 농촌에서는 7월 들어 잠시 한가한 때라 보름을 백중날로 정하고 하루를 보냈다. 일손을 쉬고 농악을 치면서 가무를 즐긴다. 밀양지방에 잘 전승된 백중놀이는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8월에는 추석을 계기로 해서 줄다리기·씨름·닭싸움·강강술래놀이가 있다. 마을을 두 패로 나누어 대보름 때처럼 줄다리기를 했는데 제주도에서는 照里戱라 불렀다. 남성 장정들이 모여 힘을 겨루는 씨름을 했고 여인들은 그네뛰기를 했으며 닭싸움을 즐기는 일도 있었다. 문헌기록은 없으나 전남 서남해안지방에는 추석에 강강술래놀이가 전승되고 있다. 일설에는 이순신장군과 관련시키고 있으나 달밤의 여인들의 圓舞로 오래 전승된 민속춤이다.

 9월에도 화전놀이를 즐겼다. 봄의 화전은 진달래꽃으로 하나 가을 화전은 국화꽃으로 하였다. 경치 좋은 야외로 나아가 하루를 조촐히 노니 오늘날의 가을소풍으로 이어진다.

 12월은 일년의 마지막달이어서 한해를 보내는 아쉬움에서 놀이도 많았다. 제기차기·연날리기·가면놀이·儺禮·널뛰기·폭죽놀이·윷놀이 등이 기록되어 있다. 젊은이들은 마주 서서 蹴鞠놀이를 했다. 큰 탄환만한 데 꿩털을 꽂아 서로 마주 치는데 땅에 떨어뜨리지 않는 것이 훌륭한 기술이다. 소녀들은 널뛰기를 하여 정월까지 이어졌으며, 소년들은 야외에 나아가 연날리기를 했다. 연은 바람이 불고 습기가 적어야 하고 곡식이 없는 논밭에서 놀기에 알맞았다.

 함경도 풍속에 永燈을 만들어 놓는데 마치 圓柱 안에 기름 심지를 박은 것 같다. 원주를 켜놓고 밤을 새워서 노는데 징치고 북치고 나팔을 불면서 잡귀를 쫓는 나례를 하였다. 이것을 靑壇이라고 한다. 또 평안도에서도 빙등을 설치하여 여러 읍·주에서도 노는 풍속이 있었다. 의주에서는 종이로 딱총을 만들어 紙砲놀이를 했다.

 대궐 안에서는 섣달 그믐 전날부터 대포를 쏘는데 年終砲라고 했다. 火箭을 쓰고 징과 북을 치는 것은 大儺의 역질과 귀신을 쫓아내는 행사의 유습이다. 또 除夕에 폭죽을 터뜨려 귀신을 놀라게 한다. 폭죽이란 대나무를 태우면 마디가 탈 때에 펑 하는 큰 음향을 내는 것이니, 모닥불을 마당에 놓고 대나무를 태워 폭죽소리가 요란하게 나도록 한다. 폭죽에 귀신들이 놀라 달아난다는 것이니 나례와 같은 뜻을 지니고 있어 소년들이 즐겨 폭죽놀이를 하였다.

 동지·섣달과 정월 긴긴밤에는 윷놀이가 성행하였다. 윷재료는 대개 박달나무·밤나무를 사용하지만 콩을 종지에 담아 놀기도 한다. 윷가락 4개를 던져 떨어진 상태를 보아 수를 계산한다. 하나가 잦혀지고 3개가 엎어지면 「도」, 2개가 잦혀지고 2개가 엎어지면 「개」, 3개가 잦혀지고 1개가 엎어지면「걸」, 4개 모두 잦혀지면 「윷」, 4개 모두 엎어지면 「모」이다. 도는 1, 개는 2, 걸은 3, 윷은 4, 모는 5로 계산해서 그 수에 따라 말판에 말을 진행시키는 놀이이다. 서로 편을 가르거나 두 사람이 놀 수 있는데 말 4개가 먼저 나가는 편이 승리한다. 조선사회가 남녀가 유별했고, 長幼有序의 질서가 엄겪했으나 윷놀이에서는 남녀노소가 함께 어울려서 놀 수 있었으니 가장 폭넓은 놀이였다. 윷놀이는 흥겨운 놀이지만 놀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결과로 다음해 농사의 풍흉을 미리 점치기도 하였다. 또 윷놀이를 통해서 占卦를 얻어 신수점을 치는 일도 있어 다양한 기능을 지니고 있다.

 윷놀이는 가사문학과도 연결되어 있었다. 윷놀이에서 상대편 말을 잡는 일이 있는데 잡을 수 있는 상황을 「긴이 섰다」고 하며 긴이 선 수를 얻으면 말을 잡는 기쁨이 있다. 이 때 윷놀이 하는 사람들은 기쁨에 넘쳐 일어서서 노래를 부른다. 도긴이 서 도수를 얻어 잡으면 도노래를 부르고, 갯긴이 서서 개수를 얻어 상대편 말을 잡으면 개노래, 이렇게 해서 걸노래·윷노래·모노래가 있으니 놀이의 홍에서 사람들은 기쁨을 노래와 춤으로 나타내는 고차원의 풍류가 있었다. 놀이란 신체동작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놀이를 잠시 멈추고 문학적 가사로 표현하는 마음의 여유를 보여주었다.

 이 밖에도 문헌에는 기록이 없으나 조선 후기에 있었고 오늘날에 전승되는 놀이가 얼마든지 있다.

 장기와 바둑은 중국에서 전래된 것이다. 장기는 서민사회에서, 바둑은 선비사회에서 널리 보급되어 왔다. 서당놀이, 가마싸움은 교육기관으로서의 서당의 기능이 높이 평가되던 시대에 형성되었을 것이다. 안동의 차전은 王建과 甄萱의 고사에서 기원하는 것으로 전하니까 오랜 전승이다. 고싸움·장치기놀이는 농군과 樵童들 사이에서 즐기던 놀이이고, 특히 고싸움은 마을신앙과 관련이 깊었다. 탑돌이는 불교의식의 일부로 초파일에 부처를 찬송하는 마음이, 넘쳐 불공하는 의식놀이다. 어린이들의 팽이치기·공기놀이·고누·팔랑개비·호드기·숨바꼭질·비석파기·땅빼앗기·실뜨기·꼬리따기·군사놀이·두겁놀이 등의 전승놀이도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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