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4권 조선 후기의 사회
  • Ⅲ. 민속과 의식주
  • 2. 의식주생활
  • 2) 식생활
  • (5) 식품의 종류와 조리법의 발달

가. 식품의 종류

가) 곡물

 조선 후기의 곡물은 벼·콩·팥·녹두·완두·기장·조·피·수수·보리·밀·율무·귀리 등으로 조선 전기와 큰 차이가 없다. 콜럼버스에 의해 신대륙이 발견된 이후 아메리카대륙 원산의 옥수수·땅콩 등이 우리 나라에 전래되었다. 옥수수는 중국을 거쳐 들어왔는데 문헌상으로는≪증보산림경제≫에 처음으로 등장한다. 땅콩(낙화생)은 李德懋가 정조 12년(1788) 중국에서 가져왔으나 재배에 실패하였다가 순조 30년(1830)에 비로소 재배에 성공하였다.

나) 채소

 조선 후기의 조리에서는 오이·아욱·가지·토란·고구마잎·상추·두릅·부추·송이·원추리·죽순·국화싹·참버섯 등에 대한 효능과 식용법이 나와 있다. 崔世珍의≪訓蒙字會≫에서는 “풀로서 먹을 수 있는 것은 모두 菜라 한다”고 하였고,≪증보산림경제≫에서는 “봄나물과 百草의 새싹은 독이 없어서 먹을수 있다”고 하면서 여러 가지 山菜와 野菜를 들고 있다. 산나물은 도라지·고사리·두릅·고비·버섯 등이고, 들나물로는 고들빼기·씀바귀·냉이·소루쟁이·물쑥·달래 등이 있다.

 재배하는 채소로는 배추·오이·아욱·토란·고구마일·상추·부추·가지·풋고추·박나물·무나물·고춧잎 등이 있다. 朴齊家의≪北學議≫에는 “배추종자는 해마다 중국에서 가져와 심어야 좋고, 3년만 그대로 심으면 이것이 순무가 된다”고 하였다. 제철이 아닌 나물은 인공적으로 재배하였는데 그 방법은 “마구간 앞에 움을 파서 거름과 흙을 깔고 당귀(辛甘菜)·산갓(山芥)·파·마늘을 심은 후 그 움 위에 거름을 더 퍼부으면 움 안이 더워지는데 그 속의 나물이 싹이 자라면 겨울에 쓴다”772)安東張氏,≪음식디미방≫(黃慧性 編, 궁중음식원, 1980), 50쪽.고 하였다.

 말린 나물도 이용하는데≪동국세시기≫에는 “박고지·표고버섯·콩의 싹을 말린 大豆黃卷·순무·무 등을 저장해 두는데, 모두 묵은나물(陳菜)이라 한다. 이것들을 정월 대보름에 삶아서 나물로 무쳐 먹는다. 또 외꼬지·가지고지·시래기 등도 버리지 않고 말려 두었다가 삶아서 먹는다. 이것들을 먹으면 더위를 먹지 않는다”고 하였다. 버섯은 찬물에 많이 쓰이는데 그 중 송이·표고·석이 등을 많이 이용한다.≪盎葉記≫와≪청장관전서≫에는 식용버섯과 독버섯을 가리는 법이 나와 있다.

 ≪京都雜志≫(柳得恭, 1770년대)·≪洌陽歲時記≫(金邁淳, 1819년)·≪동국세시기≫등의 세시기에는 입춘 때 경기도 산간의 6읍에서 움파·산갓·승검초(辛甘菜:당귀싹)을 진상한다고 하였다.773)柳得恭,≪京都雜志≫권 2, 立春.

다) 남방 전래 채소

 호 박;중국의≪本草綱目≫에서는 南瓜라고 하였으나 우리 나라에서는 속칭 胡朴이라고 하였다. 호박은 고추·담배와 함께 임진왜란 이후 일본과 중국에서 들어왔다. 처음에 승려와 일반백성들은 먹었지만 사대부는 먹지 않았기 때문에 僧蔬라고도 하였으나 19세기 중엽에는 널리 식용되었다.

 토마토;남미 페루가 원산으로, 어떤 사신이 중국에서 씨를 얻어와 보급하였는데 맛이 감과 같다고 하여 草柿라고도 불렀다.774)李睟光,≪芝峰類說≫권 19, 食物部 果. 토마토의 재배는 얼마동안 중단되었다가 선교사에 의하여 다시 일년감이라는 이름으로 나타났다고 하였다.775)崔南善,≪故事通≫(三中堂, 1946), 156쪽.

 고구마;남미 열대지방이 원산으로 스페인에 전해진 후 중국과 일본으로 퍼졌다. 현종년간에 일어났던 일로 海南사람 金麗輝 등이 琉球에 표착하였다가, 껍질이 붉고 살이 희며 쪄서 먹으니 맛이 마와 같은 것이 있어서 이것으로 배고품을 면하였다고 하였다.776)李盛雨,≪韓國食品文化史≫(敎文社, 1984), 219쪽. 고구마가 우리 나라에 들어온 것은 영조 때이다. 영조 39년(1763) 趙曮이 通信使로 대마도에 가서 고구마를 보고 몇 말을 얻어 東萊에 보낸 후 널리 보급되었고 이로 인하여 고구마는 ‘趙藷’라고 불렀다.777)李盛雨, 위의 책, 222쪽.

 감 자;남미 안데스산맥의 고원지대가 원산지이다. 중종 18년(1523)경 스페인에 전해졌고 우리 나라에는 러시아·시베리아·만주 등 북부지방을 거쳐 순조 24∼25년(1824∼1825)경에 들어왔다. 그래서 고구마는 南藷, 감자는 北藷라고 하였다. 감자는 그 후 순조 32년 영국배가 洪州牧 古大島에 표착하였을 때에도 선원들이 그 곳에 전하면서 더욱 널리 보급되었다.778)李盛雨, 위의 책, 234쪽.

 고 추;원산지는 멕시코로서 우리 나라에 도입된 것은 임진왜란 무렵이다. 문헌상으로 일본의 고추도입이 중국보다 빠른 것으로 보아 우리 나라에는 일본으로부터 들어온 듯하다. 고추는 苦椒 또는 番(蕃)椒, 南椒, 倭椒 등으로 표기하였고, 짧고 껍질이 두꺼운 품종을 唐椒라고 하였다.779)李盛雨, 위의 책, 65쪽.

라) 과 실

 조선 전기의 과일 종류는≪東國輿地勝覽≫에 도별로 다양하게 나와 있는데 후기에도 전기와 같은 종류가 있었다. 귤은 제주도 외에도 남해안 일대에 많았으나 진상과 誅求가 심하여 농가에서 일부러 귤나무를 말려 죽여서 18세기 후반에 거의 근절되었다.780)丁若鏞,≪牧民心書≫권 13, 工典6條 出林. 과채로는 수박(西瓜)과 참외(眞果)가 있었다.

 조선 후기에는 새 품종의 사과가 들어온 것이 특징이다. 우리 나라에는 원래 임금(林檎;능금)과 柰가 있었는데 효종 5년(1654)에 인조의 셋째 아들인 麟坪大君이 중국에서 내의 신품종인 蘋(頻)果를 가지고 왔다. 그런데 빈과는 査果라는 이름으로 불려졌다. 이후 임금과 빈과가 함께 재배되었고 야생 또는 야생화한 상태에서 식용되기도 하였다.≪임원십육지≫와≪규합총서≫에는 光州의 능금과 江西의 사과가 명산물로 나온다. 서양사과는 고종 27년(1890)경에 서양선교사들에 의하여 들어왔다.

마) 축산물

 축산물은 소·돼지·양·염소·개·말 등이 있고, 사냥 대상물로는 멧돼지·토끼·노루 등이 있다. 날짐승고기로 꿩(生雉)·기러기(生雁)·오리(鴨)·거위(天鵝)·어린 꿩(兒雉)·영계[軟鷄]·陳鷄 등이 있다. 고려 후기에 몽고인을 통하여 육식을 다시 즐기게 된 후 쇠고기에 대한 기호가 매우 높아져 18세기 말에는 날마다 소 500마리를 잡았다고 한다.781)朴齊家,≪北學議≫內篇, 畜牧 牛. 소도살금지령이 계속 나왔으나 제대로 실행되지 않았다. 돼지고기는 식용으로만 쓰였고 세종 때에는 돼지를 거세하는 사육법이 발달하였다. 우리 나라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양을 칠 줄 몰랐는데782)李盛雨,≪韓國食品社會史≫(敎文社, 1984), 76∼77쪽. 연산군 때 제사에 양 대신에 염소를 썼다는 것으로 보아 염소는 사육하고 있었다. 우리 풍속에 복날에는 개장국이 時食으로 되어 있고, 옛조리서에는 으레 개고기조리법이 다양하게 나오고 있는 점으로 보아 개고기가 널리 식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바) 수산물

 조선 초기에는 민물고기와 遡河性 물고기를 많이 잡았으나 어업기술이 발달하면서 말기에는 海面어업이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어종은 후기에도 전기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생선은 쉽게 상하기 때문에 마포나루에 입하되면 장사꾼들이 바로 지게에 받아다가 새벽부터 골목길을 누비며“생선 비웃드렁, 생선 도미요! 민어요! 준치요!” 하며 팔러 다녔다고 한다.

 명태는 사철 내내 가장 흔하게 먹는 찬물거리이며 관혼상제에도 으레 쓰였다. 명태는≪新增東國輿地勝覽≫에 비로소 無泰魚란 명칭으로 鏡城과 明川의 토산물로 나타난다. 명태는 생것은 生太, 언것은 凍太, 마른것은 北魚라고 하여 국·지지미·무침·포 등 무엇이나 만들 수 있다. 알과 내장으로는 젓을 담근다. 청어는 시대에 따라 어획량의 변동이 심하여 1400년대에 많이 잡히다가 1500년대에는 잡히지 않았고, 1600∼1700년대에 다시 많이 잡히다가1800년대에는 줄어들었다. 청어는 비웃이라고도 하며 말린 것은 관메기라고 한다. 조기는 서해안의 대표적인 물고기로 관혼상제의 필수품이다. 절여 말린 것을 굴비라 하고, 황석어는 젓을 담아 쓴다. 멸치는 조선 초기에는 많이 잡지 않았으나 말기에 이르러 어획량이 크게 늘었다.≪신증동국여지승람≫에 제주도 특산물로 行魚가 나오는데 멸치로 해석되고 있다. 멸치는 대개 건멸치나 멸치젓으로 가공되었다.

 ≪임원십육지≫魚名攷에는 어패류가 江魚와 海魚로 나뉘어 상세히 나오고 있다. 이를 통해 현재 우리가 먹고 있는 어류의 대부분이 조선시대에 식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사) 조미료

 감미료;엿(飴)과 단단한 당(餳)이 있다. 엿은 조청(黑糖), 당은 흰엿(白糖)이라 하였다. 꿀은 전대에 이어 계속 많이 식용되었다. 李瀷의≪星湖僿說≫에 양봉법이 자세히 나와 있는 것으로 미루어 꿀의 쓰임이 보편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설탕은 문헌에 가끔 나타날 뿐이나 19세기경부터 수입식품으로 일부에서 쓰였다.

 소 금;조선 초기부터 전매하였으나 점차 소금생산이 세도가에게 넘어가게 되자 영조 때 국가에서 강력하게 관할하기로 하였다. 소금은 서해안에서는 흙가마로 고아냈고, 동북해안에서는 쇠가마로 고아내 鐵鹽이라 하였는데 남해안에서 나는 것보다 맛이 떨어졌다.783)徐有榘,≪林園十六志≫권 46, 鼎俎志 6, 味料之類 鹽.

 기 름;주로 곡물이나 채소씨로 짰다. 콩기름·삼씨유·평지유·차조기유·수박씨유·호박씨유·잣유·호도유·비자유·참깨유·들깨유 등이 있고 대표적인 것은 참기름이다.

아) 천신품목

 궁중에서는 매달 종묘에 새로운 식품을 천신하고, 민가에서도 조상에 천신하였으므로 천신품목을 통해 월별 시절식품을 알 수 있다. 종묘의 천신품목으로는 정월에 미역, 2월에 빙송어·생복·작설차·반쯤 건조한 꿩·생합·낙지·미나리, 3월에 고사리·신감채·靑橘·황조기·생조기·눌어·웅어 등이 있다. 4월에는 죽순·眞魚·오징어, 5월에는 살구·앵두·오이·보리·밀, 6월에는 메기장·차기장·조·벼·임금·가지·수박·참외·동아·오얏·은구어, 7월에는 연어·생배·연밥·개암·잣·호도·청포도, 8월에는 홍시·대추·생률·청주·생송이·붕어·게, 9월에는 기러기·석류·산포도·다래, 10월에는 柑子·금귤·유자·마·문어·대구어·은어·은행, 11월에는 뱅어·청어·거위·당유자, 12월에는 乳柑·동정귤·生魚·生兎 등을 올렸다.784)鄭東愈,≪畫永編≫, 宗廟薦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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