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4권 조선 후기의 사회
  • Ⅲ. 민속과 의식주
  • 2. 의식주생활
  • 3) 주생활
  • (1) 사회변동과 주거계층의 변화

(1) 사회변동과 주거계층의 변화

 조선 후기에 있어서 신분제의 이완과 양반인구의 증가는 사회계층을 변화하게 하였고, 결과적으로 주거계층의 변화를 가져오게 하였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免賤과 受職을 통하여 서민들은 양반으로의 신분상승이 활발하였으며, 반면에 직전제의 폐지와 당쟁으로 실세한 양반들이 잔반으로 몰락하여 자영농이나 심지어 소작전호로까지 전락하는 경우도 많았다. 한편 농경기술의 혁신과 경영의 합리화를 통하여 농업생산력이 증대함으로써 자본을 축적한 농민들이 경영형부농이나 서민지주로 성장할 수 있었고, 상업과 수공업·광업의 발달에 따라 상업자본가와 자영수공업자가 출현하였다.

 이러한 신분제의 이완과 서민경제력의 증대는 조선 중기까지 비교적 안정되게 지속되었던 양반관료사회의 주거계층을 경제력에 따른 주거계층으로 변화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사회신분에 따라 주거수준을 규제해 오던 家舍規制가 양란 이후 신분질서의 변동에 따라 점차 그 구속력을 잃어가고, 신분상승이나 경제력을 축적한 서민들은 주거수준을 향상시킬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기 때문이다. 경제력이나 정치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양반세도가들이나 토착지주들은 상류계층으로서의 주거생활과 주거형태를 지속할 수 있었으나, 실세한 양반들은 자영농이나 소농으로까지 전락했기 때문에 서민계층의 주거문화에 편입될 수밖에 없었다. 한편 서민들은 축적된 경제력을 바탕으로 주거수준을 향상시킴으로써 경제력에 따라 주거계층의 세분화가 이루어졌다.

 이와 같이 조선 후기의 주거계층은 신분제도에 의한 구별보다는 주로 경제력의 차이에 따라 세분화되었고, 특히 서민계층의 주거환경은 획기적인 질적 향상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 따라서 조선 후기의 주거계층을 분류하는 관점은 주로 경제력에 근거하고 있으며, 대략 세도가층·지주층·부농층·중농층·소농층 등으로 분류되고 있다.793)이러한 분류는 다음 연구의 견해를 따른 것이다.
최 일,≪조선 중기 이후 남부지방 중상류주거에 관한 연구≫(서울大 博士學位論文, 1989). 31쪽.
姜榮煥,≪한국 주거문화의 역사≫(技文堂, 1991).
물론 상업자본가와 자영수공업자 등 농업을 생업으로 하지 않는 계층도 독특한 주거문화를 가졌음이 분명하다. 이들은 자신의 생업과 관련하여 주거내에 상점이나 작업장을 소유하였고, 인구가 밀집된 읍성부근에 자리하여 근대 도시주택의 면모를 가지고 있었다고 믿어진다. 그러나 이들이 어떠한 주생활과 주택형태를 가지고 있었는지에 대하여 정확히 알려진 바는 거의 없다. 이들의 거주지가 주로 읍성 이웃에 자리하였고 도시화과정에서 그 유구가 가장 먼저 변화·소실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조선 후기 주거 계층별 주거환경의 특징을 살펴보기로 하자. 주거계층에서 상류층은 역시 양반으로서 정치권력을 유지하고 있었던 세도가층이었다. 이들은 중앙의 고위관료나 지방의 토호층으로서 광대한 농장을 소유하여 소작을 통하여 경영하며, 솔거노비를 두어 가사를 운영하였다. 따라서 이들의 주거도 조선 중기의 사대부층과 크게 다를 바 없다고 보여진다. 다만 가사규제의 구속력이 떨어짐에 따라 보다 규모가 크고 장식적인 주거를 가질 수 있었다. 주·종 및 내·외의 영역구분이 명확하며, 규모가 크고 화려한 사랑채를 가지며, 대청과 구분된 누마루를 갖는 것은 이 계층 주거의 대표적인 특징이다(<그림 1>). 이러한 주택들은 명문가의 종가로서 동족마을의 중심을 차지하였고, 그 마을 주거의 이상적인 표본이 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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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반가의 영역분리
<그림 1>반가의 영역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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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류층으로서 중소지주와 부농은 원래의 신분에 따라 구별되기도 하지만 주택형식으로 볼 때 큰 차이를 발견하기 어렵다. 본래 사대부계층으로서 지방의 토착지주로 정착한 지주층은 유교적 생활문화를 가지고 농업경영자로 변신하게 되었다고 보여진다. 따라서 남녀의 영역구분이나 사당 등 유교적 주생활을 뒷받침하는 주거계획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었으나, 주생활에 있어서 농업경영이 차지하는 비중이 크며, 노비수의 감소에 따라 가사운영은 가족구성원들이 담당하게 된다. 농업생산과 관련한 부속공간들이 늘어가면서 노비들의 거처였던 행랑채가 대문채로 약화되는 것은 이러한 변화를 반영하고 있다.

 한편 본래 서민으로서 농업생산의 증대로 자본을 축적한 부농들은 그 경제력을 바탕으로 주거의 질적 수준을 향상시킬 기회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들은 가사규제와 경제력의 제약에서 벗어나 과거 상류층의 전유물이었던 권위적이고 장식적인 건축요소를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본래 농민출신으로서 농경적 생활문화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사대부층의 유교적 생활보다는 농업생산자로서 생산성이나 실용성에 더 큰 비중을 두었다. 즉 주거규모의 증대나 사랑채의 독립, 의장적인 재료의 사용 등은 신분상승을 과시하기 위하여 양반주거를 모방한 것이지만 그 공간의 구성은 대부분 지역 서민주거에 근거하였던 것이다. 다음<그림 2>와 같이 남녀의 영역구분이 명확하지 않고 살림채와 안마당이 생산공간과 혼합되어 기능하며, 살림채의 평면형태가 그 지역 서민주거의 평면유형을 따르고 있는 것 등은 이 계층 주거의 특성이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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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조선 후기 부농계층 주택의 평면
<그림 2>조선 후기 부농계층 주택의 평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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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후기의 농민계층에서는 비록 양반으로 신분상승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소규모의 토지를 소유하고 경작하는 자영농들도 많이 발생하여 농민의 대다수를 이루게 된다. 이들이 주로 자신의 노동력에 의존하였던 소작의 상태를 벗어나 자신의 토지를 경직하게 되었을 때, 농업생산성을 높이기 위한 도구 및 설비, 그리고 그와 관련된 공간이 요구되게 마련이다. 생산도구 및 설비를 수장하고, 생산물을 가공·저장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부속공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농민계층의 주거내에서 생산과 관련한 부속공간이 다양하게 분화되기 시작한 것은 조선 후기의 농민경제력 증대에서 비롯되었다고 보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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