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5권 조선 후기의 문화
  • Ⅰ. 사상계의 동향과 민간신앙
  • 1. 성리학
  • 1) 조선 후기 성리학의 양상

1) 조선 후기 성리학의 양상

 조선사회는 17세기에 접어들면서 사회적으로 중대한 변혁을 맞았을 뿐만 아니라, 사상사적으로도 조선 후기 성리학으로 전환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001)“대체로 16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까지 약 3백년간, 栗谷의 말처럼 中衰期 이후 당쟁시기의 학문이며, 이른바 儒學三百年史요, 理氣·心性情에 관한 학문이다”라 하여, 조선 후기 성리학을 16세기 후반의 퇴계·율곡시대부터 잡는 견해도 있다(劉明鍾,≪朝鮮後期 性理學≫, 이문출판사, 1985, 11쪽). 17·8세기 사상계에서 본 李滉(退溪)과 李珥(栗谷)로 대표되는 16세기 성리학자들의 논쟁을 계승하여 학파적 입장으로 정립시키는 한편, 예학·의리론·수양론 등 다양하게 논지를 확산시켜 갔다. 즉 이 시기 성리학에 나타난 가장 두드러진 현상들로는 ①학파의 정립과 이론의 활발한 분화가 이루어지고, ②병자호란 이후 崇明排淸의 義理論이 시대이념으로 대두하였으며, ③人物性同異論(湖洛論)을 중심으로 성리설의 새로운 쟁점이 제기되고 활발한 논쟁이 전개되었던 사실들을 지적할 수 있다.

 먼저 학파의 분열양상으로서, 17세기에 들어오자 이황과 이이를 각각의 정점으로 삼는 영남학파와 기호학파의 학파적 성격이 선명히 정립하게 되었다. 두 학맥 사이에 師說을 옹호하는 입장에서 상대방의 성리설에 대한 논박이 지속되면서 학파의 분열이 일어나기 시작하고, 이와 더불어 각 학파는 정통주의적 확신으로 다른 학파에 대해 배타적인 학풍을 형성하기에 이르렀다.002)嶺南學派(퇴계학파)와 畿湖學派(율곡학파)의 성립시기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玄相允은 퇴계 이후 백년이 지나 李玄逸에 의해 영남학파가 확립되었다고 지적하며, 劉明鍾은 이에 앞서 16세기 말부터 이미 율곡의 퇴계비판에 대해 金垓 등의 재반박이 나왔던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劉明鍾, 위의 책, 225∼242쪽). 또한 영남학파(퇴계학파)와 기호학파(율곡학파)라는 양대학파가 성립되자, 徐敬德·曺植 등에 의해 16세기에 형성된 다양한 학풍의 학맥들은 대체로 이 두 학파 속으로 점차 편입되어 갔다.

 이 시대는 앞 시대의 다양한 갈래들을 두 줄기의 학파로 통합해 가는 동시에, 각 학파 내부에서는 새로운 분파화가 일어나는 현상을 보여준다.

 퇴계학파 안에서도 몇 가지 학맥이 각각의 특성을 지니고 있다. ①金誠一에서 李玄逸로 이어지는 학맥이 정통의 주류를 이루었으며, ②柳成龍→鄭經世로 이어지는 학맥은 김성일→이현일의 학맥과 뚜렷한 이론적 대립이 없으면서도 경쟁관계에 놓이게 되면서 분열이 일어났다.003)屛虎是非가 그 분열의 가장 뚜렷한 조짐이다. 또한 지역적으로도 김성일계열은 安東에 자리잡고, 유성룡계열은 원래 안동이었으나 정경세 이후로는 尙州에 자리잡았다. ③鄭逑→許穆의 학맥은 畿湖지방으로 확산되어 近畿南人학파를 이루었다. 성리설에서 절충적이지만 성리설 자체를 벗어나 六經의 古學을 계발한 허목을 비롯하여, 경전의 새로운 해석을 추구한 尹鑴도 여기에 흡수되었다. ④정구의 조카사위인 張顯光의 계열은 이황의 성리설을 옹호하는 데서 한 발짝 벗어남으로써 이른바 영남학파의 절충파로 자리잡게 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004)김성일·유성룡·정구·장현광의 문하들은 “영남 남인학파의 四小分派”로 분류하기도 한다(李丙燾,≪韓國儒學史≫, 亞細亞文化社, 1987, 282쪽).

 율곡학파 안에서도 몇 가지 학맥이 성립하고 있다. 金長生→金集→宋時烈로 이어지는 학맥이 정통의 주류를 이루어 왔으나, 송시열과 尹宣擧 사이에 윤휴의 문제로 同門 안에서 갈등이 일어나자, ①송시열과 ②그의 제자인 尹拯(윤선거의 아들)과의 師弟 사이에 老論·少論의 당파적 분열을 일으켰으며, 이와 더불어 학파적 차별화도 일어났다. ③처음에는 율곡계열이 아니지만 기호학파에 흡수되었던 金尙憲에서 朴世采로 이어지는 학맥은 성리설에서 절충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김상헌의 증손으로 李端相의 문하인 金昌協도 이황과 이이의 성리설에 대해 절충적 입장을 취하고 있다. 趙聖期·林泳 등도 기호학파의 절충파에 속하고 있다. 충청도에 자리잡은 송시열계열과 서울 근교에 자리잡은 김상헌계열은 서로 교류를 유지하면서도 기호학파 안에서 가장 대표적인 두 학맥을 이루고 있다.

 17세기 후반에서 18세기 전반기에 걸쳐 영남학파와 기호학파의 테두리 안에서 각각 人性과 物性이 같은지 다른지에 따르는 인물성동이론이 학설상의 중요한 쟁점으로 대두하여 이 시대의 성리학적 성격을 뚜렷하게 나타내주었다. 이 쟁점은 영남학파에서 먼저 발생하였지만 제한된 범위에서 벌인 토론에 머물고 말았는데, 이에 비해 기호학파에서는 인물성동이론의 논쟁이 지속적으로 심화되고 확산되어 湖西지역(湖論)과 서울 주위(洛論)로 분열되면서 이 시기 성리학의 가장 큰 이론적 특징으로 주목되었다.

 또한 17·8세기의 성리학은 당시 새로이 등장하는 陽明學과 實學을 비롯하여 西學의 천주교교리 등 밖으로부터의 다양한 학풍의 도전을 받게 되었다. 이러한 도전에 대하여 성리학은 일찍부터 비판적 입장으로 대응하였으며, 19세기 중엽 외세로서 서양무력의 압박을 받게 되는 역사적 상황 속에서는 강렬한 배타적 신념의 시대사조로 역할을 하였다. 이 때에 등장하는 李恒老·奇正鎭·李震相·田愚 등의 학맥은 韓末 道學을 이루고 있다. 한말 도학은 성리설에서 主理說과 主氣說의 입장을 더욱 극단적으로 강화하고, 尊華攘夷를 표방한 의리론적 신념은 衛正斥邪論으로 구체화함으로써, 서양사상과 서양의 무력위협에 대해 더욱 엄격한 배척태도를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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