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5권 조선 후기의 문화
  • Ⅰ. 사상계의 동향과 민간신앙
  • 1. 성리학
  • 2) 인물성논쟁의 쟁점과 전개
  • (1) 인물성론의 발단과 쟁점

(1) 인물성론의 발단과 쟁점

 四端七情論辨에서는 이황의 互發說에 내포된 이원론적 경향과 이이의 一途說이 지닌 일원론적 경향이 17세기 이후에 계승되면서 극단적으로 어느 한쪽을 선택하려는 입장과 어느 쪽에도 치우치기를 거부하는 절충론이 다양하게 교차하고 있었다. 이 四七論辨은 2백년이 지나 18세기 말에 정약용에 의해 이황의 호발론을 인성론적 접근으로 파악하고, 이이의 일도설을 우주론적 인식으로 지적하여, 각 입장이 지닌 理·氣개념의 차이에 따른 한계가 있음을 지적함으로써 그 논쟁을 지양하고 있다.005)丁若鏞,≪與猶堂全書≫1-12권, 詩文集, 辨 理發氣發辨一.

 그러나 17·8세기 성리학의 전통에서는 사칠논변을 더욱 깊이 천착하는 과정에서, 그 이해의 근원적 성찰을 위해서 四端과 七情의 감정(情)적 현상을 넘어서 감정이 발동되어 나오는 원천인 성품(性)에 대한 인식으로 심화되어 가지 않을 수 없었다.‘성품이 발동하여 감정이 된다(性發爲情)’는 성리학의 기본명제에 의하면 감정의 문제는 성품의 문제와 표리의 관계에 놓인 연관개념이다. 여기에 성품의 개념적 인식문제가 제기되어, 사람의 성품과 사물(동물·식물도 포함)의 성품이 같은지 다른지를 변론하는 인물성동이론의 논쟁이 전개되면서 성리학의 이론적 근거를 성품의 근원으로 심화시켰다.

 여기서 16세기의 四七論이 인간의「감정」이 발단하는 근원을 찾아가서 ‘도덕성의 실천적 단서’로서 天理를 확인하고자 하는 문제라면, 17·8세기 성리학의 기본과제인 인물성동이론은「도덕성의 근원」인 천리가 인간과 사물의 성품 속에 어떠한 양상으로 내재하는가를 확인하는 문제이다. 그것은 현실에서 근원을 탐색하는 문제의식으로부터 근원의 개념 속에 내포된 현실의 조건을 인식하는 문제의식으로 관심의 대상이 심화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인물성동이논변의 발단은 효종 9년(1658)에서 현종 5년(1664) 사이에 영남학파의 李徽逸(存齋)·李玄逸(葛菴)·李崇逸(恒齋) 3형제 사이의 논변에서 시작한다. 이휘일과 이현일은 異論(人物性相異論)을 제시하여 同論(人物性俱同論)을 주장하는 아우 이숭일과 팽팽이 맞서서 토론을 벌임으로써 인물성동이론을 중요한 쟁점으로 등장시켰다.006)劉明鍾, 앞의 책, 91∼97쪽. 곧 이숭일에 의하면 理는 하나(一)이므로 어디에서나 같으며, 하늘의 天命은 人·物에서는 기질에 따른 차이에도 불구하고 모두 같은 ‘五常의 性’이라 확인하여 동론을 주장하였다.007)李崇逸,≪恒齋集≫속집 권 1, 書 上存齋兄. 이휘일은 아우 이숭일의 동론을 비판하면서 인과 물을 一原에서 보면 성품이 같지만, 異體에서 보면 다르다는 점을 주목하여, 근원적으로 동론이 성립되는 범위를 인정하면서도 현실적으로 이론이 정당함을 확인하고 있다. 여기서 그는 성품의 개념을 분석하여 기질 속에서 성품의 본체를 가리킨 ‘天命之性’과 천명지성이 기질에 떨어져 있는 ‘氣質之性’을 구별한다.

 우리가 경험적 현실에서 만날 수 있는 성품으로서「기질의 성」을 성품의 기준으로 삼는 입장을 취함으로써, 인간과 사물의 성품도 기질에 따라 다르며 기질의 흐리고 밝음(昏明)에 따라 성품에 선과 악이 있을 수 있다고 지적한다.008)李徽逸,≪存齋集≫권 2, 書 答曹聖求效良問目. 이숭일은 셋째형 이현일과 왕복 토론하면서도 기질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理가 갖추어지는 만큼 같은 오상의 성이 부여되는 것이라는 동론을 견지하고 있으나, 이현일은 性개념을 이가 기질 속에 떨어진 이후에 이루어지는 것이라 보아 인과 물이 같은 이를 갖추고 있지만 기질에 따라 성은 다르며 사람들 사이에도 기질에 따라 오상의 성에 편차가 있다는 이론의 입장을 밝히고 있다.

 그 후 原州 法泉에 살던 丁時翰(愚潭)은 영남의 이현일과 교유하며 활발한 학문적 토론을 벌였던 성리학자로서 인물성문제에 이론의 입장을 취하여 동론을 내세우는 그의 제자 李栻(畏菴)과 숙종 26년(1700)부터 28년 사이 3년간에 걸쳐 토론을 벌여 왔다.009)劉明鍾, 앞의 책, 97∼105쪽.
―――,≪한국유학연구≫(이문출판사, 1988), 319쪽.
정시한은 같은 천명이 부여되지만 인간이나 사물의 形氣에는 치우치거나 온전하며(偏·全) 통하거나 막히는(通·塞) 차이가 있음을 전제로 하여, 사람의 형기는 바르고 사물의 형기는 치우쳤으므로 각각의 형기에 따라 천명을 부여받은 성품에 차이가 없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식은 理를 하늘에 뜬 달에 비유하고 인간과 만물은 그 달을 각각 함유한 것으로 비유한다. 즉 기질의 淸·濁과 偏·全에 따라 반영하는 달빛이 차이가 있지만 모두 하나의 달을 머금고 있다는 사실에 비유하여, 구체적 개체에는 유행의 기질적 차이가 있지만 그 본체로서의 성품은 동일하다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전자는 ‘각각 그 性命을 바르게 한다(各正性命)’는 명제에서 ‘각각(各)’에 기준을 삼고 후자는 모든 존재가 ‘각각 같은 태극을 지니고 있다(各具一太極)’는 명제에서 ‘같음(一)’에 기준을 찾고 있는 상반된 입장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인물성동이론의 쟁점은 성품이 기질적 제약을 초월한 보편적 본체라 보는 同論과 성품이 기질적 제약을 받은 개체적 양상이라 보는 異論의 개념적 차이를 드러내는 것이다. 여기서 이휘일·이현일 및 정시한의 이론은 기질이 온전한 인간에게만 오상의 도덕적 성품이 온전함을 인식함으로써 기질의 조건이 성품의 양상을 결정하는 기본요인으로 보고 있다. 따라서 인간의 도덕적 성품을 순수하게 실현하기 위해서는 그 성품의 온전함을 은폐시킬 수 있는 기질의 혼탁을 맑게 하는 수양론의 내면적 방법이 요구된다. 이에 비해 이숭일·이식 등이 제시한 동론은 기질적 차이를 넘어서 성품의 보편성을 전제함으로써 현실세계 속에 성품의 도덕성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기질적 조건을 통제하고 이용하는 실천적 방법이 요구되고 있다. 영남학파 안에서 보면 이론을 취하는 전자에 비하여 동론을 취하는 이숭일·이식이 아우이거나 제자로서 좀더 젊은 층이요, 그만큼 이론에서 동론으로 이행하는 경향을 볼 수 있다. 17세기 중반에서 18세기 초에 걸쳐 영남학파 안에서 발생한 인물성동이론의 논쟁은 18세기 초부터 활발하게 일어난 기호학파의 인물성동이론과 비교하면 먼저 발생하는 것으로서 논쟁의 범위나 활기는 작지만 그 쟁점의 논리적 전개는 특이하다.

 이어서 기호학파에서도 인물성동이론이 대두하기 시작하였다. 朴世堂이≪思辨錄≫에서 인성과 물성이 다른 이유를 해석하자, 이에 대해 숙종 29년(1703) 金昌協과 權尙夏가 조목별로 검토하면서 인물성동이론의 문제가 더욱 적극적인 쟁점으로 드러나기 시작하였다.010)劉明鍾, 위의 책(1988), 319쪽. 여기서 나아가 18세기 초 黃江(堤原郡 遂巖面 앞을 흐르는 남한강의 상류)에서 강학하던 기호학파의 권상하 문하에서 수학하였던 韓元震·李柬·玄尙璧·蔡之洪·尹鳳九 등 이른바 江門八學士들 사이에서 인물성동이론의 문제에 대한 논쟁이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따라서 인물성동이론은 17세기에 영남학파에서 성리학의 새로운 쟁점으로 발단하였으나, 18세기 초에는 기호학파에서 널리 확산됨으로써 거의 2백년 동안 뜨겁게 불붙었던 조선시대 성리학 3대 논쟁의 하나이었다.

 이 때 한원진(南塘)에 의해 인성과 물성이 서로 다르다는 異論이 제기되고, 이에 반하여 이간(巍巖)이 인성과 물성이 모두 같다는 同論을 주장하여 견해가 대립되었다. 그들은 당시 이 문제를 스승 권상하(遂菴)에게 質正하자 권상하는 한원진의 인물성상이론을 지지하고 나섰으며, 기호학파 안에서 논쟁이 확대되면서 이 시대 성리학의 일대 논변으로 발전하였다. 이간은 牙山 巍巖(현 牙山郡 松岳面의 外巖里와 講堂里 일대)에 살고 한원진은 洪州 南塘(현 洪城郡 西部面 南塘里와 暘谷里 일대)에 살았으니 인물성동이론의 대표적 얼굴인 이간과 한원진이 모두 충청도(湖西)지역을 무대로 하고 있지만, 논쟁의 확산과정에서 특히 玄尙璧·李縡·朴弼周·魚有鳳 등 서울지역(洛下) 인물들이 이간의 동론을 지지함으로써 洛論을 이루었으며, 스승 권상하를 비롯하여 尹鳳九·蔡之洪·崔徵厚 등 호서의 인물들이 한원진의 인물성상이론을 지지함으로써 湖論을 이루면서 湖洛論爭으로 확산되어 갔다.011)李柬(巍巖)의 ‘人物性俱同論’을 지지한 洛下의 학자들로는 金昌翕(三淵)·玄尙璧(冠峯)·朴弼周(黎湖)·李縡(陶菴)·魚有鳳(杞園) 등이 있고, 韓元震(南塘)의 ‘人物性相異論’을 지지하는 湖西학자들로 蔡之洪(鳳巖)·崔徵厚(梅峯)·尹鳳九(屛溪)·李顯益(正菴) 등을 들 수 있다.

 이간의 동론(낙론)과 한원진의 이론(호론)으로 대표되는 상반된 입장은 本然之性과 氣質之性의 어느 쪽을「性」개념으로 볼 것인가에 따른 性개념에 대한 기본이해의 차이를 전제로 한 개념논쟁으로 나타난다. 또한 그들은 주자가 경전주석에서 인성과 물성의 관계에 대해 같은 것으로 보기도 하고 다른 것으로 보기도 하여 동론과 이론을 모두 제시하고 있는 모순된 해석을 하였던 점을 주목하면서, 인물성동이론의 문제에 대한 토론을 벌여 나갔다.012)朱子는≪中庸章句≫ 首章의 ‘天命之謂性’에 대한 해석에서 人性과 物性을 일치시키고 있으며,≪孟子集註≫ 告子 上篇의 ‘生之爲性章’에 대한 해석에서 人性과 物性을 구별하는 상반된 해석을 하고 있다.

 인물성동이론의 문제는 처음에 五常(仁·義·禮·智·信)을 짐승도 가지고 있는지 아닌지의 문제와 사람의 감정(喜·怒·哀·樂)이 발동하기 이전에 기질의 선악이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를 토론하면서 논쟁을 벌였다. 이들의 공통기반인 율곡의 理通氣局說에서, 이간은 이의 보편성을 중시하여 理通을 강조하지만 한원진은 기의 국한성을 주목하여 氣局을 강조하고 있다. 이에 파생되는 중요한 쟁점으로서 ‘발동하기 이전의 마음(未發心體)’이 본래 선하다는 입장(本善論)과 선악이 깃들어 있다는 입장(有善惡論)이 대립하여 ‘未發心體本善有善惡論’으로 충돌하였으며, 또한 성인의 마음과 범인의 마음이 같다는 입장(心同論)과 서로 다르다는 입장(心異論)이 갈라져 ‘聖凡心同異論’으로 논란이 빚어졌다.013)李愛熙,≪조선 후기의 人性과 物性에 대한 論爭의 연구≫(高麗大 博士學位論文, 1990), 160∼165쪽. 곧 마음의 본체가 본래 선한 것이라는 洛論은 마음을 이·기의 결합으로 보면서 이의 보편성에 비중을 두는데 특징이 있다. 이에 비해 마음의 본체에 선·악이 모두 있다는 湖論은 마음을 기라고 보는 主氣論의 입장으로서, 그만큼 李珥의 정통적 계승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心體’의 이기론적 개념문제는 특히 한말 성리학의 핵심쟁점으로 이어짐으로써 ‘心主理主氣論’이라는 또 하나의 새로운 쟁점으로 심화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인물성동이론의 쟁점은 양극적으로 심화되어 갔지만 절충적 입장도 등장하였으며, 2백년간 지속한 이 논쟁이 끝날 무렵에는 두 입장의 종합을 추구하는 이론이 제기되고 있다.014)李喆榮(1867∼1919, 醒菴)은 20세기 초에 人物性同異論의 대립을 극복하고자 시도하였던 인물의 한 사람이다. 곧 그는 성품의 두 양상으로서 本然之性과 氣質之性의 관계에 대한 인식에서, 韓元震의 異論은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같은 것(同時同位)으로 보고, 李柬의 同論은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다른 것(異時異位)이라 보았으며, 그 자신의 입장은 본연지성과 기질지성이 공간적으로는 같지만 시간적으로 다른 것(同位異時)이라 제시하여 두 대립된 입장을 지양하고 있다(琴章泰·高光稙,≪儒學近百年≫, 박영사, 394∼395쪽).

 인물성동이론이 지닌 이론적 성격과 사상사적 의미는 지금까지 다양하게 이해되고 있다. 그 하나는 보편과 개체의 관계에 관한 개념적 논쟁으로 파악하여, 한국성리학에 있어서 보편논쟁이라 규정하는 입장이 있다.015)裵宗鎬,≪韓國儒學史≫(연세대 출판부, 1974), 204∼205쪽. 다른 하나는 낙론을 주리론(연역론)이요 호론을 주기론(귀납론)이라 보아 방법론적 형식으로 대조시키기도 한다. 따라서 낙론에서는 호론이 분석에 빠져 지리멸렬하게 되고 본체와 현상의 관계를 보지 못한다고 비판하고, 호론에서는 낙론은 추상을 위주로 하여 공론에 빠진다고 비판하였음을 지적하면서, 나아가 귀납적인 호론이 연역적인 낙론보다 진보적이라 보기도 한다.016)李丙燾, 앞의 책, 384쪽. 또 하나는 낙론은 본성의 선천적 本具를 주장하여 본성의 절대화를 기하려는 의도로 보고, 호론은 본성을 후천적인 것으로 보아 동물성으로부터 분별·보호하려는 의도로 파악하여 양쪽 모두 본성 존중의 의도로서 양쪽의 공통적인 人性 존중의 의도가 人本정신 내지 人尊정신의 발로임을 지적하기도 한다.017)尹絲淳,<한국성리학의 전개와 그 특성>(≪한국의 사상≫, 열음사, 1984), 42쪽.

 또한 특히 호론의 논점이 구체적 인간과 경험적 대상을 주어진 조건으로 긍정하는 입장이라 보고 실학사상과 상당히 밀접한 상관관계가 있을 것으로 추리하기도 한다.018)李楠永,<理氣四七論辨과 人物性同異論>(≪한국의 사상≫), 66쪽. 이와 달리 인성과 물성을 구별짓는 호론은 당시의 사회이념인 華夷論에 따라 중화와 오랑캐를 본질적으로 분별되는 존재로 보려는 배타적 입장이고, 인성과 물성의 공통성을 강조하는 낙론은 중화와 오랑캐 사이에 지역적·문화적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본성과 도덕성에 근원적 동질성을 인정하는 포용적 입장이라는 해석도 있다. 정치적으로 호서지역의 山林들은 排淸의리론의 명분에 더욱 엄격한데 비하여, 서울지역에서는 오랑캐인 淸朝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현실정치의 논리에 친숙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湖洛論의 성리학적 쟁점이 그 시대의 정치의식과 청조에 대한 인식태도의 차이에 연결되고 있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019)琴章泰·柳東植,≪한국종교사상사 2≫(연세대 출판부, 1986), 133쪽. 이를테면 낙론이 진보적인 입장이 되고 호론이 보수적인 입장인 것으로 파악될 수 있다. 사실상 조선 후기의 실학사상은 기호지역에서 주로 발생하며 호서지역에서는 거의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또한 인성과 물성을 구별짓고 중화와 오랑캐를 엄격히 분별하는 호론의 논리에서 보면 인물과 물성을 일치시키는 낙론의 논리를 경계하면서, 마침내 중화문화의 인간을 夷狄과 禽獸의 영역과 혼동하게 될 것이라고 비판하는 입장을 취하게 된다.020)尹鳳九,≪屛溪集≫ 권 18, 書 答卞嘉會別紙.

 따라서 낙론에서는 인간과 짐승이 본질적으로 같은 성품을 갖는다고 파악함으로써 인간과 자연 사이에 도덕적 일체화를 요구하였으며, 차별성을 부차적인 것으로 보고 동일성을 본질적인 것으로 보는 개방적 문화를 열어 주었다. 또한 ‘性卽理’의 개념에 따라 性을 理와 일치시켜 본래 선한 것으로 파악하기 때문에, 도덕적 근거가 모든 인간에 내재한다는 개별적 인격의 주체성을 확립하는 자율적 현실의식을 계발할 수 있었던 사실을 北學派의 실학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에 비해 이론에서는 인간과 자연의 단절성을 드러내어 정통주의적 엄격성을 심화시키고 폐쇄적 문화를 유발하며, 또한 인간성품에서 기질의 선악을 강조하여 도덕적 자율성을 억제하고 도덕규범의 권위에 의한 인간의 도덕적 견제를 강화하는 권위적 규범문화를 이끌어낼 수 있었던 사실을 北伐義理論에서 찾아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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