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5권 조선 후기의 문화
  • Ⅰ. 사상계의 동향과 민간신앙
  • 1. 성리학
  • 3) 경학의 심화
  • (1) 영남학파의 경학

(1) 영남학파의 경학

 경학연구의 양상은 17세기에 활동하던 퇴계학맥의 영남학자를 중심으로 주목할 필요가 있다. 旅軒 張顯光(1554∼1637)의 경학은 易學을 통해 가장 잘 드러난다. 그는≪易學圖說≫을 비롯한 易經연구에서 權近과 李滉을 비롯한 선학의 연구도 폭넓게 수용하였다. 그는 易을 萬變·萬化·萬事·萬物을 포함하는 천지라 하여 세계를 역으로 종합하며, 그의 역학체제는 本原·巧著·體用·類究·祖述·旁行 등을 기본구조로 삼았다.

 「本原」은 天地·日月·地理·潮汐·人身·物類·天命·人事 등 자연과 인간의 현상을 易理와 연결시켜 해석함으로써 역 체계의 형성 근원을 해명하며,「巧著」에서는 河圖·洛書를 易圖의 원형으로 확인하고,「體用」에서는 역도의 유형을 중심으로 蓍策·變占의 占法圖를 제시하며,「類究」에는 역리를 각 분야에 구체적으로 응용한 圖象들을 보여주고 있다.033)≪易學圖說≫의 類究편에는 ① 經傳의 圖解로서 五經體用合一圖(權近)·五經各分體用圖(權近)·小學圖(退溪)·大學圖(權近)·大學改正圖·論語圖·中庸圖·鄒書(孟子)圖·周禮六官圖·儀禮次序圖·禮記類從圖·三禮相須圖 등, ② 수양론의 圖解로서 敬齋箴圖(王柏)·夙興夜寐箴圖(退溪)·聖學圖 등, ③ 易圖와 결합한 도상으로서 敎學之立於易之說之圖·律呂通於易之說之圖·兵陳通於易之說之圖·算數通於易之說之圖 등이 수록되어 있어서, 그의 학문체계 전반에 易學이 얼마나 깊이 침투하고 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祖述」에서는<太極圖說>(周敦頤)과≪皇極經世書≫(邵雍) 등이 역학을 조술한 경우로 제시하며,「旁行」은 역학의 정통적 조술이 아닌 유사응용으로서 醫家·雜家·日家·風水家·修養家의 다양한 분야에 적용되고 있음을 들어 역학의 응용이 광범함을 보여준다. 이러한 그의 역학은 도상적 연구로서≪周易≫의 해석에만 머물지 않고, 그 근원에서 응용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단계로 방대하게 집대성하는데 그의 창의성을 보여주고 있다.

 葛菴 李玄逸은 그의 형 李徽逸(存齋)이 착수한≪洪範衍義≫(28권 13책)의 편찬을 숙종 14년(1688)에 완성시켰다. 그는≪書經≫홍범편의 9범주에 관련한 해석을 많은 문헌을 통해 수집하여 洪範九疇의 원리를 가장 상세하고 방대하게 전개시켜 조선시대 도학에서 추구하였던 정치원리의 경학적 인식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경전의 정신을 현실정치의 원리로 확보하였다.034)李徽逸·李玄逸의≪洪範衍義≫는 宋代 眞德秀(西山)의≪大學衍義≫를 계승한 것이며, 16세기 전반 晦齋 李彦迪이≪中庸九經衍義≫를 저술하여 유교적 통치원리의 경학적 근거를≪中庸≫의 ‘九經’체계로 확장시켰던 사실에 상응하는 작업이었다.

 淸臺 權相一(1679∼1759)은 四書를 모든 경서와 사서의 근본이라 지적하고≪大學≫을 사서의 근본이라 확인함으로써,≪대학≫에서 출발하고 사서를 통해 五經으로 들어가는 경학체계를 제시하고 있다. 그는 李彦迪이 주자의 格物致知 補亡章을 거부하고 ‘物有本末…’節과 ‘知止有定…’節로 대치하고 있는 사실에 대해 이황의 견해를 인용하여 잘못된 것임을 논증하며, 息山 李萬敷(1644∼1732)가 傳4章(본말)을 전3장의 ‘前王不忘’ 뒤에 붙일 것을 제안한 데 대해, ‘본말’이 經文의 결어요 八條目의 결어로서 주자가 특히 별도로 한 장을 이루게 하였던 근거가 있음을 제시함으로써, 주자의≪大學章句≫ 체제를 확고하게 옹호하였다.035)權相一,≪淸臺集≫ 권 16, 觀書錄. 權相一은≪大學≫의 ‘本末’개념을 맷돌에서 손잡이인 나무막대기로 보는 權方叔의 비유를 받아들여 맷돌을 돌려 한 짝의 맷돌이 기능하게 하는 나무손잡이처럼, 三綱領과 八條目의 중간에 놓여 양자를 연결시켜 주는 역할을 하는 위치에 있는 것으로 강조한다.≪대학≫의 주자 격물치지보망장에서 ‘欲其極處無不到’의 구절이 ‘欲其極處에 無不到’으로 토를 붙이면 내 마음이 物理의 極處에 가서 이른다는 뜻으로서 ‘心到’인데 비하여, ‘欲其極處ㅣ 無不到’로 토를 붙이면 衆理의 極處가 나의 格하는 바에 따라 이르지 않음이 없다는 뜻으로서 ‘理到’라 하여 서로 상반된 뜻의 애매성을 지닌 것임을 제시하고 있다.036)權相一,≪淸臺集≫ 권 6, 書 與李息山.

 당시 영남학자들 사이에≪대학≫과≪중용≫의 해석에 관한 토론이 활발하게 일어나≪대학≫의 ‘絜矩之道’의 개념에 대해 玉川 趙氏와 李槾(顧齋) 등이 토론할 때에도 권상일은 이황의 견해에 근거하여 두 견해를 종합하기도 한다. 곧 옥천 조씨는 諺解의 해석을 거부하고 ‘絜하야 矩하는 道’로 토를 붙여 해석하고, 이만은 ‘矩로써 物을 헤아린다(度物以矩)’고 해석하며, 密菴 李栽는 언해를 따르며, 이만부는 조씨설을 지지하여 ‘헤아려 그 矩를 얻는 것(絜而得其矩)’이라 언급하여 하나의 쟁점이 되고 있을 때, 권상일은 퇴계가≪四書釋義≫에서 앞의 혈구를 ‘矩로 絜하는 道’라 토를 붙이고 뒤의 혈구를 ‘絜하되 矩하는 道’라 토를 붙이고 있는 견해를 받아들여, 조씨설은 矩를 방법(方)으로 삼은 것이고 반대쪽 설은 矩를 마음(心)으로 삼은 것이라 규정하고 있다.037)權相一,≪淸臺集≫ 권 10, 雜著 大學絜矩辨. 당시 이만은≪중용≫의 ‘경계하며 두려워한다(戒愼恐懼)’를 動과 靜을 겸하고 未發과 已發에 통하는 것이라 주장하고, 옥천 조씨는 정에만 속하는 것이라 주장하여 논쟁을 벌였을 때, 이재는 이만과 입장을 같이하였으나 권상일은 이만부와 吳尙遠에게 이 문제를 질문함으로써 토론을 확대시켜 갔다. 이만부는 動處에서도 잠시라도 도를 떠날 수 없으니 동·정을 겸하는 것으로 보고, 오상원은 不睹不聞은 至靜至寂하여 일리가 混然하므로 동·정의 공부를 겸하고 있다고 본다. 여기서 권상일은 ‘고요할 때 마음을 간직하고 활동할 때 기미를 살핀다(靜存動察)’는 공부는 한쪽도 폐지할 수 없으므로 동·정을 겸할 수 있는 것임을 확고하게 밝히고 있다.038)權相一,≪淸臺集≫ 권 10, 雜著 庸戒愼恐懼辨.

 近畿 남인학자인 眉叟 許穆(1595∼1682)은 경학에서도 육경의 고문을 중시하여 古學의 학풍을 열었다.039)韓永愚,<17세기 중엽 南人 許穆의 古學과 역사의식>(≪朝鮮後期史學史硏究≫, 일조각, 1987), 92쪽. 그는 經說 20편을 저술하면서도 虞·夏·殷·周의 古經으로서 육경을 다루고 있다.040)許 穆,≪眉叟記言≫ 내편 권 31, 序 經說序·進經說序. 특히 孔壁의≪書≫에 대해 今文經보다 25편이 증가된 사실과 劉歆에 의해≪古文尙書≫가 확립된 과정을 기록하고 있는 것은 경학에서 고문경학의 입장을 취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樂說’(5편)까지 경설에서 다루고 있는 것은 오경이 아니라 육경의 경학체계를 확인하는 것이다. 나아가 육경의 성격으로서≪詩≫는 三綱五常을 밝혀 존망을 징험하고 득실을 분변하며,≪서≫는 선왕의 정사를 기록하고,≪禮≫는 혐의를 구별하고 차등과 지위를 엄중히 하고 인륜을 바르게 하며,≪樂≫은 神人이 어울리게 하고 상하를 화합하게 하며 만방이 협력하게 하고,≪春秋≫는 大一統으로 民志를 안정시키고 선을 드러내고 악을 규탄하며,≪易≫은 萬化의 변역이라 규정한다.041)許 穆,≪眉叟記言≫상편 권 1, 釋亂. 또한 그는 尹鑴에게 보낸 답서에서 “六經의 글은 성인이 하늘의 뜻을 이어받아 표준을 세우며(繼天立極), 만물을 열고 사무를 성취시키는(開物成務) 글이요 천지의 지극한 가르침이 된다” 하여, 육경의 권위를 확고히 정립하고, 성인의 글을 함부로 고칠 수 없음을 강조한다. 여기서 그는≪고문상서≫에 대한 위서로 보는 고증학적 회의에 대해 堯典·舜典·洪範편 등 고문이 정당함을 역설하고 있다.042)許 穆,≪眉叟記言≫상편 권 3, 答堯典·洪範·中庸考定之失書.≪논어≫는 물론이요 주자의 해석도 인용하고 있지만, 그는 사서의 체계를 벗어났으며 그만큼 그는 고문경학을 수용하는 고학의 입장은 주자의 학문체계와 뚜렷한 차이를 보여주며, 18세기 기호남인의 실학풍조와 연결되는 독자적 학풍을 정립하고 있다.043)한편 許穆의 古文·古書를 숭상하는 尙古정신은 中世에 대한 부정이며 관념화된 당시의 성리학-주자학적 정신풍토의 부정이라 보았다(이우성, 記言解題,≪국역 미수기언≫, 민족문화추진회, 1978, 7쪽).

 또한 그의 예학저술로는 37세 때 衿川(시흥)에 머물면서≪예기≫연구를 계속하여<月令考證>을 지었으며, 50대에는 상중에 지은<居憂錄>과 상례에 대한 예경의 체계적 분류로서≪經禮類纂≫(10권) ‘喪禮’편의 편찬작업을 확인할 수 있다. 그는 17세기 중반에 예송을 이끌어 갔던 중심인물의 한 사람으로서 효종을 위한 대왕대비(慈懿大妃 趙氏)의 服制문제로서 송시열이≪儀禮注疏≫에 근거하여 ‘體而不正說’을 내세워 期年服說을 주장한 데 대해, 허목은≪의례주소≫에서 “嫡妻의 소생인 제2長子 또한 장자다”라는 견해에 따라 衆子로 왕통을 이은 경우도 ‘嫡妻相承의 正體’로서 3년복을 입어야 할 것으로 확인함으로써 예송의 쟁점이≪儀禮≫의 경학적 연구에 기초하였음을 보여준다. 그는 공자가 아버지를 제사하기 위해 啓聖祠를 설립하려는 주장에 반대하여 祠에 제사가 드려진 유래와 의의를 고증한<啓聖祠說>을 짓거나, 국휼에 사직에서 쓰는 악에 대해 건의하고, 親耕儀와 親蠶儀에 관한 논의를 임금에게 올려 시행하였던 사실에서도 그의 예학은 전반적으로≪예기≫·≪의례≫의 예경을 중심으로 하는 古禮를 기반으로 삼고 있다.

 한말 寒洲 李震相(1818∼1886)은 경학적 관심에서도 특히 의리론의 근거가 되는≪춘추≫를 정밀하게 주석한≪春秋集傳≫을 저술함으로써 조선시대의≪춘추≫연구에 대표적 업적을 남겨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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