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5권 조선 후기의 문화
  • Ⅰ. 사상계의 동향과 민간신앙
  • 1. 성리학
  • 3) 경학의 심화
  • (2) 기호학파의 경학

(2) 기호학파의 경학

 기호학파는 沙溪 金長生(1548∼1631)이 율곡의 학맥을 계승하면서 정립되었다. 그는 예학의 대가로서 이 시대의 학풍을 이끌어 갔던 인물의 한 사람이며, 경학에서도≪經書辨疑≫(광해 10:1618)를 통해 사서오경에서≪시경≫과≪춘추≫를 제외한 경전들과≪소학≫에 대한 기존 주석에 조목별로 의문을 제기하고 변론하였다. 그의 경전공부를 위한 독서법은≪소학≫과≪家禮≫에서 시작하며,≪심경≫과≪近思錄≫으로 근본을 배양하고 학문의 길을 열어 놓은 다음에 사서오경으로 나아갈 것을 요구한다. 이러한 사실은 경학의 기초로 도학적 윤리의식과 예학 및 수양론과 성리설의 기초를 강화하도록 요구하는 것이다. 그의 경전주석에 대한 변론이 중국학자들의 견해보다 李滉·李珥·鄭經世·張維·申欽 등 우리 나라 학자들의 견해를 광범하게 인용하고 있는 사실은 이 시대 경학이 조선화하고 있음을 보여준다.044)吳錫源,<沙溪 金長生의 經學思想>(≪沙溪思想硏究≫, 沙溪·愼獨齋兩先生紀念事業會, 1991), 249쪽.

 김장생의 계승자인 尤菴 宋時烈은<浩然章質疑>를 저술하여≪맹자≫에서 자신의 학문적 중심개념인 心·養氣·直·義의 문제에 대한 성리학적 분석을 하고 있으며, 경전해석에서 주희의 견해를 조술하고 있으나≪대학≫의 明明德·新民의 관계를 명칭은 다르지만 실지는 같다하여, 명명덕은 ‘新-己德’으로 新民은 ‘明-民德’으로 해석하여 ‘體와 用이 하나에 근원하고, 顯과 微에 틈이 없다’고 규정함으로써 양자를 서로 침투시키는 독특한 해석을 하기도 한다.045)宋時烈,≪宋子大全≫권 131, 雜著 看書雜錄. 또한 그는<退溪四書質疑疑義>를 저술하여 이황의 면밀한 사서해석을 다시 음미하여 긍정적인 면을 인정하면서도 예리하게 의문점을 지적하기도 하고, 四端七情의 개념에 대해서는 “퇴계선생의 침잠하고 치밀함으로써 이렇게 경솔히 주장할 리 없으니 어찌 기록의 잘못이 아니겠는가”라고 완곡히 표현하여 이황의 견해를 부정하였으며, 자신의 학문적 연원인 이이의 견해를 끌어서 입증하는 성리학적 쟁점을 경학적 근거에서부터 확립하고 있다.046)宋時烈,≪宋子大全≫권 133, 雜著 退溪四書質疑疑義 二.

 韓元震은 權尙夏의 문인으로 기호학파의 정맥을 계승하였고 다시 성리설의 쟁점인 인물성동이론에서도 스승의 인가를 받고 인물성상이론을 주장하였으며, 경학에서도 그가 권상하에게서 수업받은 내용을≪經義記聞錄≫속에 수록함으로써 권상하의 경학적 성격을 보여주는 동시에 그의 이해도 엿볼 수 있다. 여기서 그가 제시한「대학도」는≪朱子語類≫(권 15)에 수록된「대학도」의 대체를 따르며 오류를 수정 보완한 것으로 이황이≪聖學十圖≫속에 수록한 權近의「大學圖」를 취할 것이 없다고 거부하고 있는 사실에서도 영남학파의 학풍과 차이를 엿볼 수 있다.047)韓元震,≪經義記聞錄≫권 1, 大學(≪南塘集≫하 부록).「中庸圖」에서도 그는≪중용장구≫에 나타난 주희의 分節을 그려 보이고, 中庸(1∼11장)·費隱(12∼20장)·天道人道(21∼32장)·一篇之要(33장)의 체제로서 그 중심에「誠」(1편의 樞紐)과「神」(誠의 用)의 두 개념을 위치시키고 있다. 여기서≪중용≫의 전체를 관통하는 정신을「天理」라 확인하고 있으며, “처음에 ‘天命을 性이라 한다’는 것은 군자의 도가 하늘에서 나오는 것을 말하고, 가운데 ‘修身·齊家를 정치를 하는 일’이라 하여 군자가 하늘을 섬기는 것은 天工을 대신하는 것임을 말한 것이며, 끝에 ‘광대하도다 하늘이여’라 하고 ‘上天의 일은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다’고 한 것은 군자의 덕이 하늘과 하나가 되는 것을 말한다”고 해석하여 하늘과 군자의 天人관계로≪중용≫을 해석하는 점에서 하늘에 관심을 강화시키고 있다는 사실에 특징이 있다.048)韓元震,≪經義記聞錄≫권 2, 中庸(≪南塘集≫하 부록).

 玄石 朴世采(1631∼1695)는 淸陰 金尙憲의 문인으로 소론의 대표적 인물이었다. 그도 김장생의 경우처럼<退溪四書質疑疑義>를 저술하여 이황의 견해를 조목별로 치밀하게 검토하여 비판적 견해를 제시하였다. 나아가 그는≪栗谷四書諺解≫를 교정하여 범례와 발문을 붙이고 ‘經學의 指南’으로 높였으며, 이이의≪四書標識≫도 정밀하게 수정함으로써 이이의 경학적 이해를 계승하는데 힘썼다. 박세채는≪춘추≫를 “天理의 먹줄(繩墨)이요 왕도의 저울대(權衡)이며 성인 전심의 큰 법이라” 하여 그 중요성을 강조하며, 자신의 경학적 대표작으로서≪春秋補編≫을 저술하였다.049)朴世采,≪南溪集≫권 66, 序 春秋補編序. 그는 여기서≪춘추≫의 대의를 서술하고, 四傳(左傳·公羊傳·穀梁傳의 三傳과 胡傳)의 체제를 본받으면서 二程子와 주자의 저술에서 채록하는 등 주자학적≪춘추≫주석을 시도하였던 것이며 주희가 주석하지 못한 경전의 주석을 하였다는 데 중요한 의미가 있다.

 黎湖 朴弼周(1680∼1748)도≪春秋類例≫를 저술하여≪춘추≫연구의 독특한 업적을 제시하고 있으며, 특히≪讀書隨箚≫는 그의 평생 경학연구의 축적이요,≪經書會同≫은 미완성이지만 그의 경학적 분석체계를 담고 있다. 다만 그의 경학관련 저술들이 모두 전하지 않아 그 구체적 내용을 확인하기가 어렵다.050)洪直弼,≪梅山集≫권 48, 行狀 右贊成諡文敬黎湖朴先生行狀.

 明谷 崔錫鼎(1646∼1715)은 주희가 주석하지 못한≪예기≫의 주석에 뜻을 세워≪儀禮經傳通解≫를 저술하였다. 그는≪예기≫(49편)에≪孝經≫까지 편입시켜 50편을 家禮·邦國禮·學禮·吉禮·凶禮·嘉禮·賓禮의 7유형으로 과감히 재편집하였으며, 그 근거로 房玄齡의≪類禮≫(50권)를 주희가 그 편찬 순서를 옳은 것으로 인정했던 사실을 제시하고 있다.051)崔錫鼎,≪禮記類編≫ 序引. 동시에 그는<대학>·<중용>편을 다루면서 주희의 장구체제와 차이를 드러냄으로써 당시의 노론계열 학자들로부터 격렬한 비판을 받아 저술이 훼판되고 그 자신이<禮記類編辯論>을 지어 해명하기도 하였다.052)崔英成,≪한국유학사상사≫3(아세아문화사, 1995), 277∼278쪽. 이 때 권상하의 문인인 屛溪 尹鳳九도 최석정의≪예기유편≫이 주희의 정통적 주석을 제거하고 자신의 견해로 대치시켰다는 말을 듣자, 동지들과 상소를 올려 배척하였던 만큼 일찍부터 엄격한 정통주의적 입장을 제시하였다. 또한 윤봉구는 권근의「대학도」와「中庸首章圖」를 수정하여 새로이 그리고 도설을 붙였던 사실은 조선시대 경학의 도상적 전통을 계승하면서 더욱 심화시키고 있는 사실을 보여준다.

 醇菴 吳載純(1727∼1792)의 가문은 위로 아버지 吳瑗과 아래로 아들 允常·熙常으로 경학이 가학을 이루었으며, 그는 특히 역학에 밝았다. 그는 十翼傳에 대해 공자의 저작이라는 기존의 통설을 거부하고, 歐陽修가 文言 및 繫辭傳을 공자의 작이 아니라 본 견해를 지지하고, 그러나 구양수처럼 經師의 저작이라 본 데 대해 이를 부정하고 子思의 저작으로 제시하고 있다. 또한 10익을 彖上下·大象上下·小象上下·序卦上下·說卦·雜卦라고 지적함으로써 문언과 계사를 10익에서 제외시키고 있다.053)金暎鎬,<醇菴 吳載純의 經學思想>(≪醇菴集≫상, 아세아문화사, 1994), 32∼35쪽. 이러한≪주역≫체제의 이해는 주자학의 전통을 묵수하는 것이 아니라 경전의 엄밀한 분석을 통해 새로운 해석체계를 추구하는 자세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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