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5권 조선 후기의 문화
  • Ⅰ. 사상계의 동향과 민간신앙
  • 1. 성리학
  • 3) 경학의 심화
  • (3) 탈주자학적 경학의 성장과 고증학의 정착

(3) 탈주자학적 경학의 성장과 고증학의 정착

 조선 후기에는 도학의 정통성이 더욱 엄격하게 강조되면서 경학에서도 주자의≪사서집주≫를 비판하거나 이의를 제시하는 것을 매우 위험시하던 교조적 학풍이 지배하였다. 그러나 동시에 이러한 도학적 정통주의에 대한 비판의식이 경학에서도 심도 있게 제기되기 시작하였다. 주자학적 경학에 도전하였던 주요 인물로는 17세기에 尹鑴와 朴世堂, 18·9세기에 李瀷과 丁若鏞 및 成海應·金正喜 등의 고증학자들이 있다.

 白湖 尹鑴(1617∼1680)는≪讀書記≫를 통해 금문학의 입장에서<堯典>과<舜典>편을 하나로 합치고<순전>편의 앞머리 28자를 僞作이라 하여 제거하는 등 고문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확립하였던 사실은 고문경학을 기초로 하는 주자학의 경학전통을 벗어나고 있다. 또한≪중용≫의 해석에서도≪중용장구≫의 33장체제를 10장 28절로 분석하고 중용에서 ‘庸’을 주희가「平常」이라 해석한 것과 달리「有常」이라 하여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관통하는 것으로 해석한 점에서 정약용이 ‘庸’을「恒常」으로 해석한 뜻과 통하는 것으로 보인다.054)尹 鑴,≪白湖全書≫하 권 36, 雜著, 讀書記 中庸 中庸朱子章句補錄(慶北大 出版部, 1974). 나아가≪중용≫제1장의 성격을 ‘성인이 하늘을 섬기는 도리(聖人事天之道)’와 ‘군자가 도리를 체득하는 일(君子體道之事)’을 총론한 것으로 규정함으로써 하늘을 지향하는 성인과 마음을 닦아가는 군자를 대응시키고, 하늘을 섬기는 도리(道)와 도의를 체득하는 사업(事)으로 대조시키며, 그 구성 내용으로 天人의 理·學問의 道·性情의 德·聖神의 能이 갖추어 있다고 밝힌다.055)尹 鑴, 위와 같음.

 윤휴는 또한≪대학≫의 해석에서도 주희가≪대학≫을 드러낸 것은 높이 평가하였지만≪대학장구≫를 인정하지 않고<古本大學>을 받아들여 7절로 구분하고 있는 사실도 그의 독창적 해석체계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는 격물의 ‘格’을 주희가 ‘이르른다(至)’로 해석하고 있는데 반대하고, ‘감응하여 통한다(感通)’의 뜻으로 해석한다.056)‘感通’은≪周易≫‘繫辭 上’의 “寂然不動, 感而遂通天下之故”에서 나온 말이다.

 소론계열의 西溪 朴世堂은≪思辨錄≫(일명 ‘通說’)에서 사서와≪서경≫·≪시경≫을 새로이 주석하였는데, 특히≪대학≫과≪중용≫의 주석에서 주희의 해석을 벗어난 독자적 해석을 가장 잘 보여주었다. 그의≪대학≫주석에서 주희와 대립된 대표적 쟁점은 ‘物과 事’의 개념문제와「格物致知」문제에서 잘 드러난다. ① 주희가 3강령을 ‘물’이라 보아 ‘明明德’이 근본이요 ‘新民’이 말단이며, ‘知止’가 시작이요 ‘能得’이 끝이라 보았지만, 박세당은 8조목에서 ‘物·知·意…天下’가 물이요, ‘格·致·誠…平’이 事라 해석한다.057)朴世堂,≪西溪全書≫하, 思辨錄 大學(太學社 영인본). 따라서 전자는 물을 사와 같은 것으로 해석하였지만, 후자는 대상으로서의 물과 행위로서의 사가 다른 것임을 명백히 하였다. 이러한 박세당의 해석은 정약용에게도 계승되고 있다. ② 격물개념의 해석에서 박세당은 주희의 ‘物에 이르른다(至物)’라는 해석으로는 ‘격물’이 성립될 수 없다고 보며, 그는 격을 ‘바로잡는다(正)’라 정의하고, ‘격물’은 ‘物의 법칙을 구하여 바른 것을 얻는 것’이라 해석하였다.

 다음으로≪중용≫의 해석에서 박세당과 주희의 견해와 충돌하는 쟁점으로는「천명」의 개념,「성」의 개념 등을 찾아볼 수 있다. ①≪중용≫첫머리의 “하늘이 명한 것을 性이라 한다”에서 ‘命’의 개념으로, 주자는 ‘시키는 것(令)’이라고 해석하지만, 박세당은 ‘주는 것(授與)’이라 해석하여 천과 성이 일치함을 명확하게 제시하였다. ②≪중용≫첫 구절의 주석에서 주희는 “人과 物이 각각 그 性의 자연스러움을 따르는 것이 道이다”라 언급한 데 대해, 박세당은≪중용≫은 사람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요, 물을 가르치기 위한 것은 아니요, 사람은 도를 알 수 있으나 물은 도를 알 수 없다 하여 물까지 언급한 것은 잘못으로 지적하였다.058)朴世堂,≪西溪全書≫하, 思辨錄 中庸. 이처럼 박세당은 실증적 분석을 추구함으로써 주희의 관념적 해석의 논리적 허점을 예리하게 지적하였던 것이며, 여기에 그의 실학적 경학정신을 엿볼 수 있다. 이러한 윤휴와 박세당의 경학적 입장은 당시의 정통주의적 주자학자들로부터 이단으로 규정되어 혹독한 배척을 당하였다.

 18·9세기에는 이익과 정약용이 새로운 경학적 방법을 제시하였고, 김정희·성해응 등은 성리학연구에 고증학적 방법을 도입하였다.

 星湖 李瀷(1681∼1763)의 경학적 방법은 주자학적 전통을 기반으로 하면서도 경전의 전통적 해석에 의지하거나 스승의 학설을 고집하는 권위주의적 태도에 안주하지 않았다.

조금 의심하면 조금 진보할 것이고, 크게 의심하면 크게 진보할 것이다. 따라서 많은 의심을 갖는 것도 무방하기 때문에, 의심이 없는 곳조차도 의심하여 볼 필요가 있다(李 瀷,≪星湖僿說≫권 13, 人事門 尹彦明質魯).

 이익은 위와 같은 주희의 언급을 인용하여, 끊임없는 회의의 방법을 통해 새로운 창의적 해석을 하고 있다.

 이익의 대표적 경학연구는 7종의 경전을 포함하여 11종의 고전을 주석한「疾書」로서 그「질서」의 저술순서는≪맹자≫에서 시작하며, 특히 사서에서는 孟子→大學→中庸→論語의 순서로 작업하여 대학→논어→맹자→중용의 도학의 전통적 독서순서를 따르지 않았다.

≪맹자≫의 7편은 시대로는 뒤에 오고 뜻은 상세하다. 뒤에 오는 것은 가깝다는 것이며 상세하다는 것은 드러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聖人의 뜻을 구하는 일은 반드시≪孟子≫로부터 시작해야 한다(李 瀷,≪孟子疾書≫, 序).

 그것은 시기적으로 가깝고 증거가 명백한 사실에서 출발하는 것으로써, 증거의 객관성과 경험의 현실성을 중요시하는 경학방법의 실학적 태도를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나아가 그는 경학을 한마디로 ‘致用’이라 지적하여 경학의 목적이 실용에 있음을 밝혔다.

經을 설명하면서 이 세상 온갖 일에 베풀지 않는다면 이것은 단지 읽을 줄 아는 것일 뿐이다(李 瀷,≪星湖僿說≫권 20, 經史門 誦詩).

 경전을 지식의 대상으로 삼는 讀經의 풍조를 반성하고 실제에 응용할 것을 강조하였다. 곧≪詩≫로써 백성의 숨은 뜻을 살펴서 백성을 다스리는데 활용하고,≪禮≫로써 사회의 일이나 외교에 대처하여 실무에 힘쓰는 경학 본래적인 성실한 자세를 존중하였던 것이다.

 성호학파의 계승자로서 茶山 丁若鏞(1762∼1836)은「六經四書」를 가장 창의적으로 주석하여 방대한 경학체계를 이루고 있다. 그는 漢學이 考古를 방법으로 삼았으나 명철한 변별이 부족한 폐단이 있고, 宋學은 窮理를 주장하여 옛것에 증거함에 소홀한 허물이 있음을 지적한다. 그가 지향하는 경학적 입장은 한학의 훈고적 방법과 송학의 의리론적 방법을 비판적으로 극복하고 洙泗學에로 돌아갈 것을 추구하는 것이다. 그의 경학연구는≪중용≫에서 시작하며, “天命의 性은 人性이요, 率性의 道는 人道요, 修道의 敎는 人敎라” 밝히고, “중용이라는 한 권의 책이 비록 天命에 근본을 두는 것이나 그 도는 모두 人道이다”059)丁若鏞,≪與猶堂全書≫ 2-4권, 經集 中庸講義補 性天下至誠節.라고 하여, 인간의 문제에 초점을 맞추어≪중용≫을 해명하였다. 또한 그는≪논어≫의 ‘一貫之道’로서「忠恕」에 대해 충과 서의 體用이나 본말로 분석하는 주자학적 해석을 거부하고 충서를 ‘實心으로 行恕한다’는 뜻으로 해석하여 오직 ‘서’로써 일관하는 것임을 밝히며, 나아가 ‘일관지도’와≪대학≫의 ‘絜矩之道’를 ‘서’로써 해명하고 ‘人道=仁=恕=人倫’의 연관성을 제시하였다.060)丁若鏞,≪與猶堂全書≫2-2권, 經集 大學講義 心經密驗. 또한 정약용은 주희가≪대학장구≫에서 제시한 3강령 8조목체계를 거부하고 오직 明德의 1강령과 孝·弟·慈의 3조목이 있을 뿐이라 하여≪대학≫의 기본구조를 전면적으로 재구성하고 있다. 곧 그는 명덕을 인륜이라 하여 ‘명덕을 밝히는 것(明明德)’은 바로 ‘인륜을 밝히는 것(明倫)’이라 지적하고, 태학이나 향교에 明倫堂이 있는 것도 바로≪대학≫의 도가 ‘인륜을 밝히는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증거로 확인한다.061)丁若鏞,≪與猶堂全書≫2-1권, 經集 大學公議 在明明德.

 정약용의 경학체계에는 사서에 대한 독자적인 주석 이외에도≪詩經講義≫·≪梅氏書平≫·≪周易四箋≫등 삼경의 주석과≪喪禮四箋≫·≪春秋考徵≫의 주석으로 나타나는 오경의 주석에서 고증학적 방법을 포함한 종합적이고 독창적인 경학의 집대성을 보여주고 있다.

 硏經齋 成海應(1760∼1839)은 고증학을 수용하는데 선구적 인물의 한 사람으로서, 고증학을 名物度數의 말단적인 것으로 비판하는 淵泉 洪奭周에게 閻若璩 등 고증학의 여러 유형을 분석하여 평가하면서도 고증학을 널리 인용하고 해박하게 논증하는 박학적 가치를 역설하고 있다. 여기서 그는 송학의 집약적 역할과 종합하는 博文約禮의 정신을 확보할 것을 주장한다.062)成海應,≪硏經齋全集≫본집 1, 答洪學士奭周 斥考證書(旿晟社 영인본). 그는<洪範傳>을 지어 홍범의 九疇와 洛書의 관계를 설명하는 孔安國·二劉 등 漢學들의 이론을 검토하고서, 그 자신은 伏犧 때의 河圖·洛書와 禹의 홍범이 상관없는 것이라 지적하였다.063)成海應,≪硏經齋全集≫외집 2, 洪範傳. 그는 오경에 주목하고 ‘經翼’의 체제 속에≪易類≫·≪書類≫·≪詩類≫·≪春秋類≫·≪禮類≫·≪庸學類≫·≪孝經類≫·≪總經類≫등 전체 23권의 방대한 체계로 고증학적 경전연구의 업적을 이루었다. 여기서 그는 古文易·尙書古文·儀禮古今文·孝經今古文辨을 통해 금문·고문의 쟁점을 본격적으로 다루고 있으며, 石經·十三經·通志堂經解 등 古經에서 청대 경학까지 다루어 주자학의 경학체계를 완전히 벗어난 경학의 세계를 제시하였다.≪대학≫의 문제에서는<鄭注大學>·<明道改正大學>·<伊川改正大學>·<朱子改正大學>으로 고금의≪대학≫이 변화하는 과정의 차이를 보여주고, 경학전통에서 鄭玄의 역할을 높이 평가하면서도≪대학≫의 경우 주희의 주석을 높이 평가하는 漢宋 절충적 입장을 보여주고 있다.064)成海應,≪硏經齋全集≫외집 3, 古今文大學.

 秋史 金正喜(1786∼1856)는 청년시절 연경에서 당대 청조 고증학의 대가인 翁方綱·阮元 등을 만나 직접 지도를 받음으로써 청조 고증학의 본격적 전수자가 되면서 實事求是의 방법을 제기하였다. 따라서≪주역≫의 爻辭를 周公이 지은 것으로 보는 宋儒의 태도를 실증이 없는 것으로 반대하여 의리에 따라 논단하는 송학의 태도를 거부하고 한학의 문헌적 증거를 중시하는 ‘存古’의 태도를 보여주고 있다.065)金正喜,≪阮堂全集≫ 권 5, 書牘 與李月汀璋煜. 그러나 그는 옹방강의 영향 아래 한학과 송학의 종합을 추구하는 漢宋不分論의 입장을 받아들이고 있다. 다만 그의 고증학적 방법이 경학에 적용된 것은 극히 단편적인데 그치고 金石學에서 뚜렷한 업적을 남긴 것이 사실이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