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5권 조선 후기의 문화
  • Ⅰ. 사상계의 동향과 민간신앙
  • 1. 성리학
  • 4) 의리론의 전개
  • (1) 척화론의 저항의리

(1) 척화론의 저항의리

 병자호란을 당하자 당시의 선비들 사이에서는 국가와 왕실의 보존을 위해 화친하자는 遲川 崔鳴吉 등 主和論의 현실적 인식과 불의한 힘에 굴복할 수 없다는 대의의 신념에서 화친을 거부하는 淸陰 金尙憲 등 斥和論(主戰論)의 입장이 팽팽히 맞서고 있었다. 최명길과 김상헌은 瀋陽의 옥중에 함께 갇혀 있을 때도 서로 시를 주고 받으면서 그 대응의 의리적 쟁점을 밝히고 있다.066)崔鳴吉,≪遲川集≫권 3, 用前韻講經權. 이 시 외에 또 다른 瀋陽獄中에서 주고 받은 시에서도, 崔鳴吉은 “事或隨時別 心寧道與歸 君能悟斯理 語黙各天機”라 하여 때에 따른 적응을 강조하지만, 金尙憲은 “權或賢獨誤 經應衆莫違 寄言明理士 造次愼衡權”이라 하여 權變에 신중하고 常道를 지키도록 요구하고 있다(柳承國,≪한국의 유교≫, 세종대왕기념사업회, 1976, 227∼231쪽).

 먼저 최명길은 주화와 척화의 두 가지 대처방법이 하나의 도임을 지적하여 모두 인정하는 입장을 밝히며 時와 道를 기준으로 제시하였다.

…끓는 물과 얼음은 모두 물이요

갖옷과 갈포는 모두 옷일세

일이 혹 때에 따라 다르더라도

마음이야 어찌 도에 어긋나리…

 그러나 김상헌은 權變의 대응방법을 위험스럽게 여기고 經常의 도리를 강조하여 적과 타협하는 주화론의 태도를 거부하고 있다.

…새벽부터 밤까지 뒤척이며 생각해 봐도

치마와 저고리는 뒤집어 입을 수 없는 일

權道는 어진이라도 그르치기 쉽지만

常道는 대중에 적응시켜도 어기지 못하네…

 이처럼 불의를 용납할 수 없다는 의리론과 국가의 존속을 보장하려는 실리론 사이에는 불변의 규범을 수호하는 守道(常道)와 상황에 따라 대응하는 行權(權道)이라는 각각 서로 다른 가치관이 작용하고 있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결국 인조의 항복은 주화론을 선택한 것이지만 병자호란 이후 도학적 이념의 입장은 만주족의 청나라를 오랑캐로 규정하고 배척하는 입장을 확립하였으며, 임금이 항복한 굴욕에 대해 復讐雪恥를 표방하여 排淸論을 더욱 강경하게 제시하였던 것이다. 그 대표적 인물로 강경하게 척화론을 주장하던 척화삼학사의 한 사람이 洪翼漢이었다. 그는 조선이 청에 굴복한 뒤 포로로 심양의 감옥에 갇혔으나 청 태종의 회유를 거절하고 항의하다가 끝내 죽임을 당하였다.

내가 지키는 것은 大義일 따름이니 성공할지 실패할지 존속할지 멸망할지는 논할 것이 없다. 만약 우리 나라의 신하와 백성들이 한결같이 내 뜻과 같이한다면 너희 나라가 망하는 것은 얼마 남지 않았다(宋時烈,≪宋子大全≫권 213, 三學士傳).

 성공이나 실패를 개의치 않고 의에 따라 행동한다는 철저한 의리론적 신념과 청에 대한 강한 저항의식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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