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5권 조선 후기의 문화
  • Ⅰ. 사상계의 동향과 민간신앙
  • 1. 성리학
  • 4) 의리론의 전개
  • (2) 화이론의 의리론적 전개

(2) 화이론의 의리론적 전개

 척화론으로 이끌어 가던 병자호란의 저항의리론은 인조가 청 태종에게 항복하는 굴욕을 당한 이후 새로운 적응을 위한 변화를 겪어야 했다. 곧 조선 후기 사회를 지배한 이념은 華夷論에 기초하고 있는 강렬한 배청의 의리론이라 할 수 있다.

 호란 이후 조선사회의 도학자들은 청나라를 오랑캐로 배척하고, 이미 멸망한 명나라를 중화의 정통으로 존숭하는「崇明排淸」의 의리를 열렬히 신봉하였다. 청나라가 중원을 지배하였지만 조선사회는 국내의 모든 기록에서 청나라의 연호를 쓰지 않고 명나라의 연호인「崇禎」을 계속하여 사용하였다. 이는 청을 인정하지 않고 중화의 모범으로 이미 멸망한 명나라를 계승한다는 의미를 내포하는 것이었다. 또 궁중 안의「大報壇」과 청주 華陽洞의「萬東廟」 및 가평 朝宗巖의「大報壇」등의 사당을 세워 명나라 마지막 황제인 신종·의종을 섬기는 제사를 지내기도 하였다.

 명나라를 숭배하는 이유는 표면적으로는 명나라가 한족의 정통 중국왕조이고 또 신종이 임진왜란 때 원병을 보내주어 우리 나라를 멸망에서 구원해 주었다는 ‘再造藩邦’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 내면에는 현재 중원을 장악한 청나라는 만주족의 오랑캐이므로 인정할 수 없다는 화이론적 신념이 더욱 강하게 자리잡고 있었음이 사실이다. 곧 이 시대에 “중국을 받들고 오랑캐를 물리친다”는「尊華攘夷論」(華夷論)의 문제는 배청의식의 도학적 근거로서 당대 의리론의 중심문제로 강조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화이론은 중화문명에 대한 존숭의식과 더불어 오랑캐의 야만적 침략성에 대한 저항의식을 내포한 의리정신으로 나타나고 있다. 또한 화이론은 중국중심적 세계관이므로 그 논리형식을 빌어 만주족의 청나라는 중원을 차지하였지만 오랑캐(夷)로 규정하고 우리 나라는 중국의 문화를 받아들인 중화(華·夏)로 파악하는 세계질서의 인식이라 할 수 있다.067)조선 후기에 지리적으로 우리 땅을 華·夏로 명명한 사례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宋時烈의 華陽洞(청주), 金守增의 華陰洞(화천), 吳孝錫의 大明洞天(광산), 李恒老의 淸華山(가평), 朴世和의 用夏洞(월악산), 田愚의 繼華島(부안) 등 무수히 많은 尊華·崇明의 지명들이 이 시대에 나타나고 있다.

 17세기 이래 성리학의 최대의 이념적 과제는 화이론을 강력한 의리론으로서 확립하는 것이었으며, 이는 주자의 철저한 계승과 춘추대의의 천명을 통해 구현되었다. 곧 조선 후기 성리학은 주자의 해석에 따라 화이론이 춘추대의인 王覇論(尊王賤覇論)과 근원에서 일치한다고 인식함으로써 당대의 의리론적 문제의식을 체계화하였다. 주자도 남송시대에 금나라에 대하여 주전론을 주장하던 입장이었으므로 그의 사상은 직접적으로 화이론의 의리론체계를 제공해 주었으며, 따라서 당시 도학자들은 尊華攘夷·尊王賤覇의 명분 아래 금나라에 저항하여 주전론을 주장한 주자의 입장을 본받음으로써 당면한 배청-북벌의 과제에 대해 이념적 기반을 마련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은 인식은 존왕천패→존화양이→숭명배청으로 구체화시켜 마침내 효종대에는 北伐滅淸을 대의의 실천과제로 확인하기에 이르렀다.

 또한 여기서 주자학(도학)의 엄격한 수호태도가 정립되었다. 그 중심인물이 송시열로서 그는 북벌론에 앞장섰고 가장 강하게 배청숭명의 화이론을 주장하였다. 송시열은≪朱子大全≫과≪朱子語類≫를 연구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으며, 그의 제자들과 함께≪朱子大全箚疑≫와≪朱子言論同異攷≫를 편찬하여 방대한 주자학의 주석학적 심화를 추구하였다. 그는 주자의 성리설이나 예론뿐만 아니라 闢異端論과 화이론의 정통주의도 철저히 계승하였으며 주자의 좌우명이나 행적도 친밀하게 답습하였다.068)송시열을 가리켜 “≪朱子大全≫을 주석함에 머무르지 않고, 자기 존재 그 자체를 주자의 註釋으로 살다 간 희유의 인간”이라 규정한 견해도 있다(三浦國雄,<17세기 조선에 있어서의 정통과 이단>,≪민족문화≫ 8, 民族文化推進會, 188쪽). 따라서 의리론의 전통에서는 주자 이후 조선사회에서 가장 철저한 주자의 계승자를 송시열로 인정하는 기호학파의 학풍도 나타나게 되었다.

 이와 같은 화이론의 춘추대의는 조선 후기 사회에서 사회이념으로 정립되어 모든 생각과 행동에 적용되었으며, 따라서 화이론은 춘추의리를 계승하는 조선 후기 도학파의 의리론에서 근본문제로 확립되었다. 이처럼 병자호란의 치욕에 대해 복수설치의 의분감에 따라 주창된「숭명배청」의 명분은 실질적으로 존왕천패와 존화양이의 의리론에 기초하여 구체적으로 역사적 상황에 대응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배청의리론은 시대에 따라 몇 단계의 과정을 거치면서 전개되어 왔으며, 배청의식이 쇠퇴하지 않도록 이를 새로이 고양시키는 방법이 탐색되었다. 척화-배청의 모범적 인물과 행적을 지속적으로 선양하고 추존함으로써 배청의리론을 이념적으로 확립하기 위하여 각 시대에 문헌편찬이 지속되었던 것은 그 한 예라 하겠다.069)宋時烈의≪三學士傳≫을 비롯하여,≪斯文大義錄≫·≪尊攘錄≫·≪尊周錄≫(이태수 작),≪陪臣考≫(황경원 편),≪忠烈錄≫(박승종 편),≪柵中日記≫(김경선 작),≪瀋陽日記≫·≪尊周彙編≫(正祖命撰) 등 무수한 문헌이 있다. 처음 청의 침입을 받았던 인조 때부터 왕명에 의해≪尊周彙編≫이 편찬된 정조 때에 이르기까지 배청의리론이 조선 후기 사회에 전개되는 과정은 몇 단계로 나누어 볼 수 있다.070)≪尊周彙編≫에 의하면 排淸의리는 시대에 따라 ① 仁祖 때의 斥和, ② 孝宗 때의 北伐의식, ③ 肅宗-英祖 때의 崇明, ④ 正祖 때의 排淸행적의 편찬으로 전개되고 있음을 보여준다(금장태,≪한국유교의 이해≫, 민족문화사, 1989, 192∼193쪽 참조).

 첫째, 인조 때에는 병자호란의 굴욕을 직접 당한 시대이므로 정부나 백성이 청나라에 대한 적개심을 갖고 화이론의 대의명분을 지키는 데 뜻을 같이하였다.

 둘째, 효종 때에는 이미 청나라가 중원을 차지한 다음이었으나, 오랑캐를 섬기게 된 것을 원통히 여기면서 임금은 복수하여 치욕을 씻겠다는 의지를 확립함으로써 천하에 대의를 펴기를 다짐하였다. 이 때 선비들도 무기를 들고 북녘땅에서 싸우다 죽겠다는 의지를 내세우고 임금의 북벌정책을 지지하였다.

 셋째, 숙종-영조시대에는 천하가 오랑캐의 지배 아래 안정을 누려 北伐論이 쇠퇴했지만, 청조에 대한 거부의식과 함께 명조에 대해 대보단과 만동묘 등에서 제사를 지내 숭명의식을 고취시켰다.

 넷째, 정조 때에는 복수정신이 쇠퇴하는 현실을 경계하면서 척화순절자들의 후손을 포상하여 숨겨진 의사를 드러내고, 배청의리에 관한 역대의 사실과 의식을 수집하여 문헌적으로 정리함으로써 쇠퇴하는 배청의식을 일깨워 춘추의리에 기초한「화이론」의 의리정신을 지속시키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이처럼 긍정적 가치와 부정적 가치를 극단적으로 대립시켜 선택과 배척을 요구하는 화이론의 역사적 인식은 사실상 정통론의 閑邪存聖·衛正斥邪를 비롯하여, 수양론의 存天理遏人欲, 도덕의식의 勸善懲惡, 우주론의 抑陰尊陽 등과 동일한 논리구조로서 일관된 이념체계를 이룬다. 이러한 화이론 곧 숭명배청론은 조선 후기 의리론의 기본인식이라 할 수 있다.

 배청의리론은 조선 후기 사회의 지배이념으로 기능하였으며 배타적·보수적 체제를 강화시켜 갔다. 그러나 화이론-북벌론이 당시 전성기를 이룬 청조문물을 백안시하고 강력한 정통주의적 이념으로 학문과 사상을 통제하는 가운데서도, 17세기부터 개방적인 관심의 학풍이 싹트고 18세기 후반에는 북학파 실학자들에 의해 청의 문물을 배우자고 주장되는 등 배청의리론에 대한 비판과 도전 또한 점차 거세어졌다. 특히 18세기 후반에 이르면 西學-天主敎가 국내에 신앙공동체로 표면화되면서 화이론에 입각한 성리학적 지배체제가 크게 위협받는 상황이 초래되었다. 이에 대해 성리학자들은 의리론적 신념에 입각하여 한사존성·위정척사의 정통론에 근거하는 闢異端論을 전개하게 되었다. 나아가 19세기에 들어오면서 선교사와 직접 또는 간접으로 연결된 서양무력의 위협이 가중되면서 斥邪論(위정척사론)이 화이론의 한 시대적 형식으로서 배청론을 물리치고 등장하였다. 다시 19세기 후반에 오면 위협의 주체이자 배척의 대상이 西學-邪敎에서 西洋-洋夷를 거쳐 日本-倭夷로 바뀌면서 척사론에서 斥洋論을 거쳐 斥倭論 곧 倭洋一體論으로 전개되고 있는 사실을 볼 수 있다. 이러한 과정에서 主理說-理尊說을 주류로 하는 성리학은 중화주의에 의지한 배타적 의리론을 형이상학적으로 뒷받침하고 강화하는 데 기여하였다.

 이처럼 화이론의 의리정신은 시대이념으로서 조선 후기 도학의 중심이념이었고, 따라서 18세기 말에 서학문제로 일어난 벽이단론의 체계나 19세기의 서양과 일본의 침략에 따른 척사위정론도 화이론의 이념을 내포하고 응용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곧 조선 후기의 도학은 의리론의 사회이념적 확립에 정열을 기울였던 것이었으며 그만큼 방어적이고 보수적인 폐쇄성에 빠져 들어갔던 것 또한 사실이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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