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5권 조선 후기의 문화
  • Ⅰ. 사상계의 동향과 민간신앙
  • 1. 성리학
  • 4) 의리론의 전개
  • (3) 의리론의 역사의식

(3) 의리론의 역사의식

 조선 후기 의리론의 역사의식은 그 논리적 기반에 있어서 두 가지 중요한 인식을 내포하고 있다. 하나는 화이론적 이념에 바탕한 문화적 자각이요, 다른 하나는 역학적 순환론을 통한 민족사의 이해라고 할 수 있다.

 먼저 의리론의 역사의식은 무엇보다도 유교의 이념적 우월성에 대한 확신과 도덕적으로 미개한 민족의 지배를 받을 수 없다는 문화적 저항의식에서 출발하고 있다. 조선 후기 도학파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통해 인접한 나라로부터 침략을 당하면서 중국문명을 계승한 우리 사회의 문화전통을 보존하고 오랑캐를 거부하는 배타적 정통주의를 더욱 강화시켜 갔다. 인조 22년(1644) 한족의 명나라가 만주족의 청나라에 멸망하여 중국 천하가 만주족의 지배 아래 들어간 다음에는 중국문명은 중국땅에서 사라지고 우리 땅에만 남아 있는 것이라는 신념과 더불어 오랑캐를 배척하는 강한 저항정신을 배양하였다. 따라서 ‘尊中華 攘夷狄’의 화이론은≪春秋≫의 정신에 따른 조선 후기 의리론의 가장 기본적 과제가 되었다.

 물론 조선 후기 도학의 의리론에서「화이론」의 ‘華’가 한족의 중국을 의미하기에 명나라를 존숭하고 청나라를 배척하는 존명배청론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中華」는 중국만이 아니라 우리 나라도 포함하는 개념으로 인식되었으며, 중국이 오랑캐인 청에 의해 점령된 이후로는「중화」가 중국에서는 없어지고 우리 나라에만 남아 있다는 신념이 보편화되었다. 여기서「중화」가 단순히 중국땅을 뜻하는 말이 아니라 중국문화나 예의를 의미하는 유교의 이념적 가치임을 확인할 수 있다.

 이처럼「華」를 예의와 문화의 개념으로 이해한 반면,「夷」를 무례나 야만의 개념으로 파악한 것은 조선 후기 의리론에서 가장 중요한 논리적 근거가 되고 있다. 19세기 말엽 도학자들이 서양과 일본의 침략을 당하면서 그들을 침략자로서 규정하기에 앞서「오랑캐」라 규정하였던 것은 이와 같은 인식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러한 태도는 유교이념을 근간으로 한 조선사회의 도덕적 우월성을 확신하면서 서양과 근대 일본이 유교전통의 예법과 의리를 무시하고 세력을 앞세워 욕망을 드러내고 있음을 비판하는 것이라 하겠다.

 이와 같은 조선 후기 도학파의 의리론적 역사의식은 이 시대 도학자의 한 사람인 毅堂 朴世和(1834∼1910)가 일본의 합병에 항거하여 자결하면서「禮義朝鮮」이라는 네 글자를 절필로 남긴 데서 선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이는 그의 제자 晦堂 尹膺善이 “예의는 중화문화의 진리요, 조선은 대대로 지켜온 나라”라고 해석하고 있는 바와 같이,「예의」라는 도덕문화와「조선」이라는 민족국가를 지켜야 할 가치로 제시한 것이라 하겠다.071)琴章泰·高光稙, 앞의 책, 129쪽 및 139쪽 참조. 여기서 조선 후기의 의리론적 역사의식이 외침에 맞서 민족의 정체성을 지키려는 민족적 자각과 무관하지 않으면서도 그 근저에는 禮敎로 표상되는 유교의 문화적·종교적 순수성을 수호하려는 의식이 보다 뿌리깊게 자리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는 20세기 초 일제의 침략에 의해 조선정부가 무기력하게 붕괴되는 현실 속에서 정통도학자들의 적극적인 항쟁에서 소극적인 은둔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입장들이 나타났지만, 국권의 수호보다도 유교의 본질을 지키는 것을 일차적인 명분으로 내세우는 점에서 모두가 일치하였던 사실에서도 또한 확인할 수 있는 문제라 하겠다.072)국권상실기에 도학파가 보였던 다양한 입장을 들어 보면, 義擧하여 적을 토벌하고 물리치겠다는 ‘擧義掃淸’의 입장, 목숨을 끊어 절의를 지키겠다는 ‘致命遂志’의 입장, 해외로 망명하여 전통을 지키겠다는 ‘去之守舊’의 입장, 깊은 산곡으로 들어가 은둔하여 안정하겠다는 ‘入山自靖’의 입장 등이 있다(琴章泰·高光稙, 위의 책, 7쪽 참조).

 이처럼 도학파는 19세기 말의 시대적 상황에 따른 위기의식 속에서 화이론적 의리론을 통해 중화문화로 표상되는 전통적 유교문화를 지키려고 하였다. 동시에 이 시대 도학자들은 역학적 순환론에 의거하여 민족사의 위치를 밝힘으로써 국가존망의 위기에 대처하고자 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경향은 19세기 화이론의 가장 적극적 주창세력이었던 華西 李恒老계열에서 특히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이들은 우주의 변화원리를 역사의 변천에 적용하여 이해하는 역학적 순환론에 따라 당시의 상황을 ‘山地剝’괘에서 ‘重地坤’괘를 거쳐 ‘地雷復’괘를 기다리는 역사적 전환기로 파악하는 공통점을 보여주고 있다.

 이항로와 그의 제자인 省齋 柳重敎는 중국의 각 시대와 우리 나라의 당시 상황을 주역의 卦와 爻로써 해명하면서 혼란이 격심한 왕조의 말기를 ‘산지박’괘와 ‘중지곤’괘로 설명하고 있다.073)李恒老,≪華西雅言≫권 11, 歷代 武王 제32.
柳重敎,≪省齋集≫권 41, 記 朝宗巖見心亭鑴名記.
‘산지박’괘에서 마지막 한 가닥 남아있던 ‘陽’이 없어지면 모두 ‘陰’으로만 이루어진 ‘중지곤’괘가 되고 여기서 다시 한 가닥의 양이 새로 일어나면 ‘지뢰복’괘로 들어가게 된다. 여기서 ‘剝’괘와 ‘坤’괘는 혼란이 극에 달한 한 시대의 말기를 뜻하지만, 동시에 새로이 질서가 회복되는 ‘지뢰복’괘의 직전의 단계인 까닭에 새로운 시대를 예비하는 전환기이기도 하다.

 ‘산지박’(9월)-‘중지곤’(10월)-‘지뢰복’(11월)의 변화는 역의 순환적 변화 속에서 한 단락을 맺게 하는 매듭이다. 계절의 변화 속에서 11월 동짓달이 가까워지면 낮의 길이가 점점 짧아지면서 양의 세력이 극도로 약해지지만, 막상 동짓달이 되면 완전히 숨었던 양의 기운이 다시 회복되기 시작하여 낮이 다시 길어지게 된다. 이처럼 ‘지뢰복’괘는 우주의 운행에 있어 숨었던 양기가 다시 살아나기 시작하는 전환기이며 그것은 역사에서도 혼란의 극치에서 질서를 회복하는 전환기에 상응한다. 여기서 ‘중지곤’괘에서 ‘지뢰복’괘로의 전환은 혼란에서 태평으로 전환하는 역사적 변화와 창조의 계기라 할 수 있고, 그것은 말기적 혼란의 끝에서 새로운 질서로 전환하는 易의 순환적 변화의 계기이기도 하다.074)금장태,<한국 근세유학의 역사의식>(≪겨레문화≫1, 한국겨레문화연구원, 1987), 88쪽. 따라서 역학적 순환론은 역사를 단순한 반복으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한 단원의 종국에서 새로운 질서가 시작될 때 사회의 붕괴와 창조라는 역사의 중요한 계기가 일어나는 것으로 이해하는 계기적 순환론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순환론적 역사인식은 重菴 金平黙, 勉菴 崔益鉉, 毅菴 柳麟錫 등 이항로 문하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으로 19세기 말 의리론의 역사의식에 있어 보편적인 문제의식을 형성하는 것이었다.075)金平黙,≪重菴集≫권 5, 疏 代京畿江原兩道儒生論洋倭情迹仍請絶和疏.
崔益鉉,≪勉菴集≫권 3, 疏 持斧伏闕斥和議疏.
柳麟錫,≪毅菴集≫권 43, 記 見心齋記.

 그러나 도학자들의 이러한 자연의 법칙과 역사의 법칙을 관통하는 순환의 필연성에 대한 믿음이 인간의 역할을 간과하는 숙명론에 빠지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조선 후기 도학자들의 역사의식은 자연의 순환이 인간의 순환과 상호적임을 이해하는 가운데 더욱 적극적으로 인간의 능동성과 책임을 확인하는 방향으로 나아갔으며, 이에 따라 역학적 순환론의 필연성이 도덕적 당위성과 연결되어 순환 방향의 정당성에 대한 신뢰를 구축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076)금장태, 앞의 글, 93쪽. 이와 같은 역학적 순환론에 입각한 조선 후기 의리론의 역사의식은, 우주적 원리(이치·도리)와 역사적 현실(시세·권력)을 본체와 응용의 體用的 일체로 파악하여 철학과 역사가 결합하는 형식을 보여주는 것임과 동시에, 역학의 음양소장론적 순환론을 역사의 전개법칙으로 이해하여 자연의 필연성에 의한 인간 역사의 제약을 인정하면서도 이를 도덕적 당위성과 결부시킴으로써 인간의 역할을 강조하고 있는 독특한 역사관이라 하겠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