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5권 조선 후기의 문화
  • Ⅰ. 사상계의 동향과 민간신앙
  • 1. 성리학
  • 6) 성리학의 사회적 기능

6) 성리학의 사회적 기능

 성리학의 중요한 사회적 기능으로서 하나는 왕권에 대한 옹호기능과 견제기능을, 다른 하나는 시대와 사회의 변화에 따르는 역사적 대응기능을 들 수 있다. 먼저 이 시대에서 왕권에 대한 성리학의 역할을 주목해 보면 도학적 신념을 지키기 위해 왕권에 저항하는 기능이 두드러진다.

 고종 31년(1894) 갑오경장 이후의 10년 동안은 개화정책에 대한 격렬한 저항이 일어났다. 신생 민중종교인「東學」에 의해 주도된 갑오농민봉기는 조선사회의 중대한 역사적 분기점을 마련하여 주었다. 을미의병(고종 32년:1895)은 도학파에 의하여 주도되었다. 이 의병운동은 도학파가 시대에 대처하는 방법으로서 매우 중요한 사건이었다. 을미의병의 발단에는 두 가지 기본 명분이 있다. 하나는 일본인에 의해 민비가 시해됨으로써 국모에 대한 복수를 표방하게끔 되었고, 다른 하나는 을미년 연말에 개화정책의 한 방법으로서 내려졌던 단발령은 유교 정통의 중화문화 전통을 수호하기 위한 저항의식을 폭발시켰다.

 전통이념의 담당자였던 도학파들은 조정에 상소를 올려 건의하는 단계를 넘어서 스스로 반기를 들고 의병을 일으켰다. 이에 따라 조선사회는 내전상태에 들어가는 전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게 되었다. 을미의병 당시에 의병을 주도하던 도학자들의 태도는 임금의 명령이라 하더라도 의리에 위배되면 따를 수 없음을 선언하는 정부에 대한 명백한 저항이었다. 어것은 왕명에 대한 기본적 부정이다. 곧 의리론에 의거하여 왕명을 바르게 이끌어 가는 것이 아니라 임금이 대표하는 조선정부의 정책이 조선왕조의 도학적 정통이념에 근본적으로 위배된다는 입장에서 정면으로 왕명에 저항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성리학의 이론이 관념적 분석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 상황에 대한 대응논리로서 역할하고 있음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새롭게 주목하고 싶은 것은 人物性相異論(湖論)이 조선 후기의 사회이념인 화이론에서 중화와 오랑캐를 본질적으로 분별하려는 입장과 통할 수 있다는 점이다. 또한 人物性俱同論(洛論)은 중화와 오랑캐 사이에 지역적·문화적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본성과 도덕성에 근원적 동질성을 인정할 수 있는 것으로 보이는 점이다. 당시 사회는 실제로 당파적 분열 속에 호서의 산림도학자들은 명분에 더욱 엄격하였고, 이에 비해 近畿에서는 다양성을 좀더 능동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포용력이 요구되었다.

 호론과 낙론은 서로 개념의 외포와 내연을 달리함으로써 끝없는 개념논쟁 에 빠졌다. 그러나 인간과 사물 사이에 공통성과 차별성을 확인하는 성리학적 인식은 당파의 분열과 의리론의 비판정신이 첨예화한 시대현실 속에서 인간의 세계에 대한 행동원리를 제공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한말 성리학의 심주리설은 서양과 일본의 침략세력 앞에 조선사회의 무기력한 현실과 유교사회의 전통질서가 붕괴되는 현실 앞에서 개인의 능동적인 저항의식과 항거운동을 뒷받침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항로·기정진은 丙寅洋擾(고종 3년:1866) 때 가장 강력히 主戰論(斥和論)을 제기하였으며, 그의 문하에서 을미의병으로부터 한일합병에 이르는 동안 국권상실과 국가적 치욕에 항거하는 의병운동을 벌였다. 또한 이진상의 문하에서는 해외에 망명하여 유교개혁운동을 전개하거나 3·1운동에「파리長書사건」(儒林團사건)을 주도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심주리설에서는 강한 사회적 실천의지를 발휘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비해 宋秉璿은 을사조약에 반대하여 자결하고 전우는 섬으로 망명하여 자신의 지조를 지키고 도학의 계승에 힘써서 개인적 저항의식을 보여주고자 하였다. 따라서 한말 성리학의 본심(명덕)의 主理·主氣문제는 성리설과 역사적 의식과 사회적 실천에 따라 서로 다른 양상으로 연계되어 나타났음을 알 수 있다.

<琴章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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