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5권 조선 후기의 문화
  • Ⅰ. 사상계의 동향과 민간신앙
  • 2. 양명학
  • 1) 양명학의 이해
  • (1) 중국양명학과 조선양명학

(1) 중국양명학과 조선양명학

 退溪는 주자의 이기이원론의 입장에서, 邵雍(1011∼1077)·花潭 徐敬德(1489∼1546) 등의 기일원론의 입장인 心無體用說에 입각한, 心卽理·知行合一·性情一體論 등을 주장하는 陽明學을 비판하고 있었다.099)李 滉,≪退溪全書≫권 41, 雜書 心無體用辯. 그러나 高峯 奇大升(1527∼1572)과의 심성논쟁을 벌이는 과정에서 퇴계도 秋巒 鄭之雲(1509∼1561)이 제시한 주자의 ‘四端은 理의 발현이오 七情은 氣의 발현이라(理之發 氣之發)’는 경직된 理氣二元論을 벗어나 ‘四端은 理가 발현하여 氣가 따르는 것이오, 七情은 氣가 발현하여 理가 타는 것이다(理發氣隨之 氣發理乘之)’라는 이기일원론적 이원론으로 이행해 갔다.

 이러한 퇴계의 이기일원론적 이원론은 선조대의 栗谷에 이르면 ‘이발기수지’를 부정하고 ‘기발이승지’만을 인정하는 이기이원론적 일원론으로 전환하게 된다. 따라서 퇴계가 기본적으로 이원론에 입각하여 배척하던 양명학을, 일원론의 입장에 서는 율곡은 양명학의 일원론적 입장을 수용하며 心卽理라는 주관적 유심론만을 지적하는데 그친다.

 그러므로 서경덕의 기일원론적 입장에서 양명학을 수용하던 東崗 南彦經·慶安令 李瑤 등이 율곡과 입장을 같이한다든지, 선조 7년(1574) 명나라에서 양명이 문묘에 배향되어 조선에서 논의가 일어난다든지, 선조 27년 이요가 남언경을 선조 앞에서 극구 칭찬한다든지, 이후의 양명학을 주도하는 象村 申欽(1566∼1628)이나 遲川 崔鳴吉·谿谷 張維 등이 율곡학파인 서인으로서 활동하는 이유도 이원론을 비판하며 일원론을 확립하여 가는 과정이라는 데서 찾아볼 수 있다.

 이처럼 율곡 이후에는 이미 四端七情논쟁이나 人心道心논쟁을 거치면서 일원론의 입장에 가까워진 조선성리학을 양명학자도 수용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신흠이나 장유·최명길 등은 율곡의 氣發理乘之說이라는 철학체계를 바탕으로 양명학을 수용하여 이미 조선양명학으로 재구성하고 있었다.100)池斗煥,<張維의 生涯와 思想>(≪泰東古典硏究≫7, 1991). 이처럼 牛溪 成渾(1535∼1598)의 문도들에 의해 이미 조선양명학의 기틀이 잡혀 가는 가운데 임진왜란이 발발하니, 명나라의 원조를 받는 과정에서 명의 양명학자들과 빈번한 접촉을 벌이며 조선양명학은 더욱더 심화되어 나가고 있었다.

 소옹이나 서경덕의 기일원론에 입각한 ‘心卽理’를 주장하던 남언경 등의 중국식 양명학은 신흠·장유에 이르러 氣有體用說을 통해 율곡의 ‘기발이승지’라는 이기이원론적 일원론을 수용하고, 이러한 理氣觀에 입각한 ‘심즉리’를 주장하는 조선식 양명학으로 변화한다.

 氣無體用說·心無體用說·理無體用說에 입각하여 性情一體論·理氣一體論 등을 주장하며 ‘심즉리’를 주장하는 중국식 양명학에서 氣有體用·心有體用·理有體用論에 입각하여 性情體用·理氣合一論 등을 주장하며 ‘심즉리’를 주장하는 조선식 양명학으로 전환하고 있었다. 이는 중국에서 羅整菴이 비록 理氣一物論의 입장에서 양명학을 비판하며 전개하던 心有體用論을, 율곡의 이기일원론을 바탕으로 수용하면서 이루어진 성과였다.

 따라서 비록 ‘심즉리’를 주장하여 주관적인 유심론에 흐르고는 있지만 ‘情을 임의로 하고 慾을 멋대로 할 병폐가 있던’101)鄭齊斗,≪霞谷全集≫권 9, 存言 하(驪江出版社 영인본, 1988). 양명학의 위험을 제거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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