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5권 조선 후기의 문화
  • Ⅰ. 사상계의 동향과 민간신앙
  • 2. 양명학
  • 2) 강화학파의 활동

2) 강화학파의 활동

 18세기에 들어서면 탕평정치가 시작되면서 성리학의 이념논쟁에서 패배한 퇴계학파는 퇴계를 다리로 하여 주자를 직접 이해하려는 성호의 우파인 安鼎福계열과 성리학을 버리고 이 당시 전래되고 있는 서학인 천주교를 능동적으로 수용하여 가지고 성리학자와 대결하려는 성호좌파인 李檗(蘗)계로 나누인다.125)崔完秀,<韓國書藝史綱>(≪澗松文華≫33, 1987).

 따라서 이들은 17세기를 끌어온 율곡계의 조선성리학에 대해 자신들이 실학을 한다고 표방하고 나서지만, 한편은 주자로 복귀하여 보수성을 자아내고 있었고 한편은 외래사상을 수용하여 비자주성을 나타내고 있었으므로, 이 당시 북벌론을 외치며 자주성에 입각하여 보편성을 추구하는 개혁파에게는 다양한 견제세력의 하나는 될 망정 결국 주변적인 세력에 불과하게 된다.

 이보다는 오히려 율곡계통의 노론과 우계계통의 소론으로 나뉘어 대립하면서 이 당시 사상계는 재편되고 있었다. 그러나 이 당시 사상계의 주요한 흐름은 湖洛논쟁이었다. 호락논쟁이, 비록 율곡의 조선성리학의 이해라는 같은 전제 위에서 출발하였지만, 이미 말폐를 드러내며 시대변화에 따르지 못하는 성리학은 보편성을 내세워 재구성하려는 洛派와 지엽적인 개별성에 매달려 이를 묵수하려는 湖派로 대립되고 있어, 변화하고 있는 현실에 대해서는 공리공담에 불과한 논쟁이지만 철학적으로는 가장 커다란 논쟁이었다. 즉 성리학이 말폐를 드러내며 율곡의 이기이원론적 일원론 중에서 이원론적 요소를 강조하는 호파와 일원론적 요소를 강조하는 낙파로 갈라져 있었다.

 그러나 이 당시 소론의 양명학은 겉으로 드러내놓고 논쟁할 수 없는 상황이고 이미 양명학 자체도 율곡의 ‘기발이승지’설에 입각한 조선성리학을 바탕으로 하여 조선양명학으로 되어 있는 상황이어서 이 논쟁은 작은 입장의 차이로 밖에는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게다가 李麟佐의 난(영조 4년:1728) 등으로 소론이 정계에서 완전히 실각하면서는 더욱 그 명맥을 유지해 가는데 불과하였다.

 이러한 명맥은 정제두가 숙종 35년(1709) 8월 安山에서 江華島의 霞谷으로 이주하면서 시작되는 江華學派로 이어졌다(<표 1·2>). 이는 제1세대로 먼저 그의 아들 鄭厚一을 통하여 그의 사위 宛丘 申大羽(1735∼1809)에게로 전승되어 갔다. 그리고 정종의 아들 德泉君의 후손으로 숙종 36년 강화로 이주한 후 20년간 정제두에게 사사하고 그의 손자사위가 되는 李匡明과 그의 종형제 恒齋 李匡臣(1700∼1744) 員嶠 李匡師(1705∼1777)를 중심으로 전승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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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 1>全州李氏 德泉派
<표 1>全州李氏 德泉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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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 2>霞谷 鄭齊斗(延日 榮陽公派)
<표 2>霞谷 鄭齊斗(延日 榮陽公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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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세대로 이광명의 아들 椒園 李忠翊(1744∼1816), 이광사의 아들 燃藜 李肯翊(1736∼1806), 信齋 李令翊(1738∼1780)으로, 月巖 李匡呂의 문인인 玄同 鄭東愈(1744∼1808), 신대우의 아들로 이충익과 이종사촌이자 정제두의 외증손인 石泉 申綽(1760∼1828), 정제두의 고손인 蕉泉 鄭文升(1788∼1875) 등으로 이어지면서 강화학파를 형성하였다.

 그리고 19세기 후반 개화기를 맞으며 이충익의 손자인 沙磯 李是遠(1790∼1866), 이시원의 아들인 李象學(1829∼1888), 이상학의 아들들인 寧齋 李建昌(1853∼1989)·耕齋 李建昇, 정문승의 아들인 都正 鄭箕錫(1813∼1889), 이건창의 재종형제이며 이충익의 고손인 蘭谷 李建芳(1861∼1939) 등으로 이어지면서 한말의 양명학파를 형성하여 가학으로 전승되어 간다.

 이광신은<擬朱王問答>을 지어 양명학에 대한 경도를 나타내었다. 鄭寅普는 이광신을 명말 劉念臺와 근사하다고 평할 정도로 朱王의 절충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 유염대는 양명좌파가 미친 듯 떠드는 것을 걱정한 나머지 湛甘泉의 隨處體認天理學을 절충하여 程朱로 우경화한 인물이다.

 이광사는 영조 때 집안이 화를 입어 남북으로 귀양살이를 하였고, 일찍이 강화로 가서 정제두에게 배웠으나 겉으로는 양명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하였지만 정제두에 대하여 복을 입는 것을 보아 속으로는 양명학을 따르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는 ‘去外誘 存實理’를 주장하는 데서도 알 수 있다. 이런 경향은 이광사가 비문을 중시하는 書訣을 짓고 있는 데서도 짐작할 수 있다.

 이긍익은 기존의 강목체 역사서와는 다른 기사본말체의≪燃藜室記述≫을 저술하면서 장유·최명길·신흠 등 양명학자들의 기록을 많이 인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가학인 양명학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전통은 이시원의≪國朝文獻≫과 이건창의≪黨議通略≫으로 이어지며 양명학파의 역사인식을 반영하고 있었다. 이영익은 이광사의 아들로 이광사가 富寧으로 호남 薪智島로 귀양다닐 때 늘 따라다니며 봉양하면서 경서를 정독하여 가학인 양명학을 전수받았으리라 본다. 이는 그가 주로 誠意·愼獨을 학문의 중심으로 주장하는 데서도 충분히 엿볼 수 있다. 이충익은 이광명의 양자로 평생 고난 속에서 살면서≪椒園遺稿≫2책을 남기고 있다. 이 중의<假說>상하에서 求眞을 주장하여 양명학의 致良知說을 학문의 중심으로 하는 것을 엿볼 수 있게 한다.

 정동유는 젊어서 이광려에게 배웠고≪晝永編≫상하와 遺集 몇 권의 저술을 남기고 있다. 여기에서 “본래 하나의 대학인데 주자는 格物을 窮理라 하고, 陽明은 致知는 致良知라 하였다. 주자학설에 따르는 자는 오직 窮理하는 것이 大學이라 볼 뿐이고, 致良知하는 것도 또 大學이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하여 양명학을 전수받고 있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이외에도 정문승은 孝·良知·明察(斤斤)·至誠(允臧)을 주장하면서, 정기석은 愼·困乏·誠悃을 주장하며 양명학을 전수받은 것을 표현하고 있었다.

 이는 19세기 한말 상황을 대처하면서 가학을 전수하여 가는 이시원 등에도 그대로 나타난다. 이시원은≪국조문헌≫100여 권을 짓고, 眞如篤行을 주장하였는데, 이를 丙寅洋擾에서 그의 동생 李止遠과 함께 자결함으로써 실천으로 보이고 있었다. 이상학은 推實心懋大體를 주장하였고 군수로 재직하면서 茶山의≪欽欽新書≫를 좋아하여 항상 읽고 있었다. 이시원의 손자인 이건창은 이시원의≪국조문헌≫을 초록하여≪당의통략≫을 지었고, 일찍이 문명을 날리고 있었다. 이건창은 고증학보다는 심학을 강조하고 있고, 양명학의 태주학파의 낭만주의의 영향을 받은 性靈파와는 자율성을 강조하는 면에서 동일한 경향을 가지면서 성령문학을 계승하고 있었다. 이건승은 이건창의 동생으로 을사조약(광무 9년:1905) 이후 애국계몽운동을 일으켜 강화 사기골에서 啓明義塾을 설립하고(광무 11년) 교육구국운동을 추진하였다. 그리고 이 설립취지문에서 “實心이 없으면 어찌 實事가 있겠으며 實事가 없다면 어찌 實效를 바랄 것인가” 하여 실심·실사를 주장하였다. 이처럼 가학을 전수하며 강화학파를 형성하고 양명학을 시대에 맞게 전승하여 갔다.

 또 위정척사파가 이원론의 입장으로 치달아 한말 상황에서 보수화되자 일원론의 양명학을 내세우며 애국계몽운동을 선도하는 滄江 金澤榮(1850∼1927)과 謙谷 朴殷植(1859∼1925) 등과 신민족주의사관을 주도하는 爲堂 鄭寅普(1892∼?) 등이 강화학파인 이건창·이건방과 연결되어 그 여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김택영은 朱王절충적 입장을 취하고 있었지만, 박은식은 융희 3년(1909) 51세로<儒敎求新論>을, 이듬해에는≪王陽明實記≫를 저술하여 양명학을 기반으로 사회개혁을 주장하며 독립운동을 하였다. 정인보는 이건방의 학맥을 이어<陽明學演論>을 저술하여 양명학원론·양명학사·조선양명학사를 정리하였다.

 이렇게 가학으로 전승되어 가는 양명학의 여맥과는 달리 성리학이 말폐를 드러내는 가운데 낙파의 일원론을 계승하여 고증학을 받아들여 신사조로 등장한 북학파에도 일정한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북학파가 이원론으로 형식화되어 가는 조선성리학을 비판하며 다시 본질에 입각한 일원론을 체계화하려 할 때, 양명학은 하나의 참고가 될 수 있는 일원론적 사상체계였다. 따라서 북학의 비조인 湛軒 洪大容(1731∼1783), 燕巖 朴趾源(1737∼1805), 楚亭 朴齊家(1750∼1805) 등의 사상에 양명학을 인정하는 절충적인 견해가 나타난 것이나, 茶山 丁若鏞(1762∼1836)이 “내가 일찍이 강화학에 대해 알았더라면 강진에서 쓸데없는 고생을 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라고 한 것이나, 秋史 金正喜(1786∼1856)가 실사구시설에서 북학사상을 집대성하면서 육왕이나 주자를 막론하고 수용하자는 논리를 전개하는 것이나, 또는 炯庵 李德懋(1741∼1793)의 손자인 五洲 李圭景(1788∼?)이<王陽明良知辨證說>·<朱子晩年定論辨證說>·<格物辨證說>을 지어126)李圭景,≪五洲衍文長箋散稿≫권 5·32·6. 양명학에 대한 견해를 피력한 것 등을 통해 북학파의 여러 가지 양명학에 대한 태도를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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