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5권 조선 후기의 문화
  • Ⅰ. 사상계의 동향과 민간신앙
  • 3. 천주교의 수용과 전파
  • 1) 천주학과 보유론적 천주신앙
  • (2) 천주교서와 조선인의 만남

(2) 천주교서와 조선인의 만남

 전통적 유교사회인 조선왕국에 천주신앙이 수용되고 교회가 생겨나는 것은 정조 8년(1784)의 일이다. 조선왕국에서 그리스도신앙을 수용한 일은 밖으로부터의 전교에 의해서가 아니라, 전통사회 유교지식인들의 天主敎書연구에 의해 자율적으로 천주신앙을 깨우치고 신앙공동체인 교회를 조직하게 된 자생교회란 점에서 다른 나라의 그리스도신앙 수용과 비교되는 특수성을 지니고 있다.

 조선의 지식인들이 천주교와 처음 만나게 된 것은 중국 북경에서의 일이고, 천주교서를 연구하게 되는 것은 실학의식을 지녔던 유교지식인들에 의해서였다. 북경에서 천주신앙과 처음 만나고 중국의 예수회 서양성직자들이 한문으로 저술한 이른바「漢譯西學書」130)「漢譯西學書」는 西洋中世의 Schola학문과 文藝復興期의 서양과학시기에 관한 西洋문헌을 耶蘇會員들이 중국어로 論著 飜案한 것이며, 중국예수회가 해산되는 1759년까지 그들에 의한 저술된 한역서학서가 약 550종의 다수를 이루었다고 보고되고 있다. 이를「漢文西學書」나 또는「耶蘇會漢文著述書」로 표현하는 연구자도 있다.를 조선왕국으로 도입한 주역은 사대외교관계로 해마다 중국에 파견되던 事大使行員들이었다.

 명·청에서 천주교 전교에 종사하던 예수회 전교신부들은 그들의 전교대상지가 유구한 역사와 높은 문화 그리고 독특한 가치체계가 굳건하게 정착된 문화세계임을 깨닫고 중국에서 補儒論的인 문화주의적 전도방책을 추진하였다. 이런 전도방침에 따라 그들은 중국사회에 그리스도교에 터전한 서양문명(정신문명으로 종교와 윤리, 물질문명으로 기술과 과학)을 이식하는 활동을 폈다. 그 하나의 방법으로 서양관계 서적을 한문으로 편술하여 내놓은 것이 이른바「한역서학서」였다. 당시의 서양문명은 정신문명이든 물질문명이든 그리스도적 가치체계 위에 서는 것이었거니와, 그리스도신앙과 그리스도적 윤리사상을 담은 것이었기에 이런 책은 중국교화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북경에 이식되어 중국인들이 가까이하던 중국「서학」은 마침내 선진적 천문·역산술 도입에 열심이던 조선왕조의 기술관료들과 북경에서 서양성직자를 통해 만나게 되었다. 한편 이와는 달리「北學意識」을 가지고 북경에 들어가 한역서학과의 교류에 노력하는 북학자들에 의해 중국 현지서의「만남」이 있었다. 북경에 파견되는 사대사행원들은 北京天主堂과 欽天監 등에서 서양성직자와의 만남을 해마다 가지게 되면서 자연 천주교와 접하게 되고 한역서학서인 天主敎書를 대할 수 있었다.131)淸初 耶蘇會西洋聖職者인 西士들이 天主堂과 더불어 그들이 淸皇室로부터 책임 맡게 된 天文曆算機關인 欽天監과 數學기관인 算學館에 머무르고 있었기에 그 기관의 선진시설과 西士를 만나기 위하여 朝鮮使行員들이 다수 방문하는 것이 恒例였다.

 이런 만남은 17세기 초부터의 일이며, 그들의 손에 의해 한역천주교서가 조용하게 조선으로 계속 흘러 들어오게 되었다. 이런 받아들임이 1세기 이상이나 계속되는 가운데≪天主實義≫·≪七克≫·≪畸人十篇≫·≪交友論≫·≪二十五言≫·≪靈言蠡勺≫·≪辨學遺牘≫·≪眞道自證≫·≪盛世芻蕘≫·≪萬物眞源≫등의 천주교서가 조선으로 도입되어 지식인 사이에 유포된다.132)裵賢淑,<朝鮮에 傳來된 天主敎書籍>(≪韓國天主敎會創設二百周年紀念 韓國敎會史論文集≫, 韓國敎會史硏究所, 1984), 1∼31쪽.

 이렇게 조선 후기 사회로 도입된 한역천주교서를 학문적 호기심에서 가까이하고 열독하는 국내의 선각적 지식인에 의해 북경에서의「1차적 만남」에 이어 국내에서의「2차적 만남」의 역사가 진전되었다.

 그리스도적 가치체계를 담은 한역천주교서는「北學」이나「實學」의식을 지녔던 조선 후기 사회의 유교지식인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한 이질문화의 소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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