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5권 조선 후기의 문화
  • Ⅰ. 사상계의 동향과 민간신앙
  • 3. 천주교의 수용과 전파
  • 1) 천주학과 보유론적 천주신앙
  • (4) 국내 실학지식인들의 천주학연구

(4) 국내 실학지식인들의 천주학연구

 17세기 초부터 북경을 방문하여 사대사행원 손에「한역서학서」로 건네주는 일은 예수회 전교성직자들의 숨은 의도가 깔려 있었다. 즉 그들은 이 한역천주학서를 통하여 유·불의 이교세계인 조선사회에 그리스도복음이 조용히 침투되기를 바랐던 것이다.

 조선의 지식인들은 문화적 호기심에서 서양문물을 대하고 한역서학서를 가까이하게 되었다. 특히 실학정신의 깨우침을 가지게 된 선각자들은 종래 접해 오던 한 문화와 다른 문화를 가까이하려는 실천적 의지를 가진 사람들이어서, 서양과학·기술에 관심을 가지고 또는 그리스도적 서양의 종교와 윤리설에 큰 흥미를 가지고 이를 알아보기 위해 한역서학서를 열독했다. 더러는 짧은 글로 논평기록을 지어 남긴 선각지식인들도 있었다.

 선조대에 李睟光이 한역서학서인≪천주실의≫를 논평하는 글을 엮었다. 그러나 그의 글은 서양의 종교가 천주를 받드는 것으로 우리의 것과 다르다는 이해를 엿볼 수는 있으나 깊이 있게 연구한 글은 아니다.137)李睟光,≪芝峰類說≫ 권 2, 諸國部 外國. 이수광과 같은 때의 柳夢寅도≪천주실의≫와≪칠극≫을 읽고 “천주라 함은 상제를 말함이요 실은 不空이니 老·佛의 空·無를 배격하는 것이라”고 이해하고 있다. 천주교의 천당지옥설과 不婚娶制를 논하며 천주교도 필경은 ‘惑世의 異敎’로 단정하였다.138)柳夢寅,≪於干野譚≫ 권 2, 西敎. 그 후 許筠이 북경에서「偈十二章」을 얻어다 그 가르침을 홀로 지켰다 하나, 과연 그가 천주신앙을 실천하였는지는 분명치 않다.139)李離和,<許筠의 思想과 天主敎>(≪敎會와 歷史≫63, 韓國敎會史硏究所, 1980), 3쪽.

 이처럼 호기심에서 천주학을 가까이한 사람이 없지 않았으나, 18세기 중엽까지는 그리 많지 않은 사람들이 천주학을 가까이하였고 또 그 자신의 견해를 적어 놓은 사람을 찾기는 어렵다. 그러나 18세기 중엽에 들어 실학자 李瀷이 서학에 강한 학문적 의욕을 가지고 많은 서학서를 섭렵하였으며 星湖의 문집 여러 항목에 걸쳐 천주학에 대한 그의 이해를 엿볼 수 있는 글을 기록해 놓았다. 그는 이른바「星湖學派」에 속하는 그의 제자들과 편지를 주고 받으며 서학에 관해 자주 의견을 교환했다.

 이익은≪天主實義≫를 읽고 “그 학문은 오로지 천주만을 위하는데 천주란 곧 儒家의 상제이다”라고 상제와 천주를 같은 것으로 이해하였다.140)李 瀷,≪星湖先生全集≫ 권 55, 跋天主實義.

 그는 자신의 한 제자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尹幼章으로부터 들으니 자네는 천주학을 배격함에 온 정력을 다한다는데-천주학은-불교가 혹세무민하는 것과는 다르다. 서양에서 중국까지 8만리인데 그들은 이 먼 길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중국에 나와 관직도 영예도 사양하고 오로지 그들의 도를 알뜰하게 드러내는데 힘써 이를 천하에 전하고자 한다. 그들은 도량이 넓고 크며 생각하는 바가 깊고 넓음을 볼 때 족히 세상의 악착스러움을 깨칠 만하다고 나는 생각한다…천주설에 어두운「上帝鬼神之說」로써 이를 본다면 서로 부합되는 바도 있으니 이 점이 중국학자가 西士에게 이끌리게 된 까닭이다. 자네가 오늘날 천주학을 힘써 물리치고 있음도 아직 그에 대한 고찰이 부족하기 때문이 아닐까 두렵다(愼後聃,≪河濱集≫권 2, 內篇 紀聞).

 이익은 천주학이 先儒古經의 상제와 합일되는 것으로 이해하고 세상 교화에 헌신하는 西士 즉 전교서양성직자를 높이 평가하고 있다. 다만 유가의 心性之說과 다르고141)愼後聃,≪河濱集≫권 2, 내편 紀聞 星湖紀聞. 堂獄說로 말미암아 필경은 불교와 같이 ‘환망한 것’이기는 하나142)李 瀷,≪星湖先生全集≫ 권 55, 跋天主實義. 불가는 寂滅뿐이나 천주학은 자못「消惡積德」과「世上敎化」의 실용됨이 있다고 인식하였다.143)愼後聃,≪河濱集≫권 2, 내편 紀聞 星湖紀聞.

 이익의 서학에 대한 접근과 검토의 학문정신은 그의 수다한 제자에 크게 영향을 미쳐「朝鮮西學」의 학문세계를 열어 놓게 된다. 즉 그의 제자들은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라 진지한 학문자세에서 서학과 천주교를 관찰하고 자기나름의 견해를 밝히게 된다. 같은 이익의 제자라 하여도 대체적으로, 이른바 성호우파(愼後聃·安鼎福계의 제자들)는 천주학 배격의「斥邪衛正」으로, 성호좌파(李蘗, 權哲身·日身, 丁若鐘·若銓의 계열)는 천주학 수용의「天學實踐」으로 양분되어 서로 반대적 입장에 놓여지게 된다.

 유가적 입장에서 깊이 있게 천주교서를 분석 검토한 후 담담한 문장으로 엮어 놓은 척사론인<西學辨>144)<西學辨>은 漢譯西學書인≪靈言蠡勺≫·≪天主實義≫및≪職方外紀≫를 가까이한 河濱 愼後聃이 그리스도교 靈魂論과 西洋中世의 敎學을 儒家的 입장에서 예리하게 논평한 문헌이다. 李丙燾는 이 책이“朝鮮儒耶交涉史上 가치있는 하나의 중요한 史料”로 지칭하고 있다(李丙燾,≪資料朝鮮史草稿≫제4장, 제4기 儒學, 서울大 史學科敎室 油印未定稿本, 54쪽).이나 실학사가 安鼎福이 천주학의 연혁을 논한<天學考>와 천주학의 중요문제를 축조적으로 문답하는 형식으로 검토하고 그것이 내포하고 있는 위험을 경고한<天學問答>등의 斥邪論說이 나오게 된 것145)安鼎福이 斥邪論書를 지은 것은 그가 儒家的 闢邪衛正精神에 철저했음은 물론이나 한편으로 자기의 사회적 기반인 南人西敎入信者를 타일러 장차 일어날 수도 있는 政爭의 수난을 피하게 하고 姻戚인 權哲身에게 回頭를 권하기 위한 것이었다 한다(李元淳,<安鼎福의 天學論攷>,≪朝鮮西學史硏究≫, 55∼183쪽 참조).은 그들 당시에 이미 천주학의 위험성이 느껴질 정도로 높아졌기 때문이라 하겠다. 당시 공부하는 지식인들인 학자들이 서학과 천주교서를 가까이함은 안정복의 표현을 빌리면「書室之玩」으로 일반화되어 있었고, 丁若鏞이 문초당할 때 실토한 바에 의하면 서학서를 가까이함은 그가 젊었을 때「一種風氣」즉 유행이었다고 한다.

 이런 ‘風氣’ 즉 지식인 사이에서 유행처럼 중국에서 들어온 서학서·천주교서를 학문적 관심을 가지고 활발하게 열독하고 검토하는 가운데 그들은 補儒論的 天主信仰을 자율적으로 깨우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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