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5권 조선 후기의 문화
  • Ⅰ. 사상계의 동향과 민간신앙
  • 3. 천주교의 수용과 전파
  • 1) 천주학과 보유론적 천주신앙
  • (5)「보유론적 천주신앙」의 깨우침

(5)「보유론적 천주신앙」의 깨우침

 위에서 살핀 바와 같이 이익 이전에도 천주교서에 접하고 천주학=천주교에 대해 자기 나름대로의 이해를 적어 놓은 유교지식인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그 기록은 호기심에서이거나 또는 신기한 異學·異敎에 대한 계몽적인 접근에 지나지 않았다.

 이익은 서학에 대한 강한 학문의식에서 천주교서를 대하고, 결론적으로 부정적인 입장에 섰으나 상당히 호의적인 이해에 접근했음을 알 수 있다. 이익은 광범위하게 한역서학서를 검토하였다. 서학의「理」의 측면인 천주학서나 그리스도적 가치를 담은 서양윤리서를 검토하고 천주교를 先儒의 上帝思想과 통하는「補儒論的 體系」로 이해했던 것이다. 물론 이익은 그의 실학정신을 발휘하여 비교적 세밀하게 검토하고 수긍할 것은 수긍하고 배척할 것은 배척하였던 것이다. 그의 서학·천주학비판은 實正·實證·實利의 실학정신에서 이질문화체계를 검토한 끝에 이루어졌던 것이다.146)李元淳,<異湖李瀷의 西學世界>(위의 책), 149∼154쪽 참조.

 그의 이러한 실학정신을 받아 천주학서를 검토한 후 천주학을 긍정적으로 이해하고 나아가 천주신앙의 실천으로 신앙생활을 자작하게 되는 이익의 제자들은 성호좌파에 속하는 실학지식인들이었다. 스승 이익의 서학열의 영향을 받아 개인적으로 한역의 천주교서를 읽어 보거나 또는 동지들과 서신으로 서로 의견을 나누었다. 나아가 집단적으로 조용한 장소를 찾아가 며칠을 두고 공동연찬하는 학문모임을 가지며 서학·천주학에 대한 이해를 넓혔다. 앞서 본 바와 같이 서학서를「書室之玩」으로 적은 안정복의 글이나, 서학을 연구하는 풍토를「일종풍기」로 실토한 정약용의 진술에서 당시 지식인 사이에는 개인적으로 서학·천주학을 연구하는 자가 다수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른바「走魚寺天眞庵講學의 모임」도 동학도들이 선배학자 권철신을 중심으로 모이게 된 공동의 학문회합이었던 것이다.

 「강학회」란 유교사회의 학문하는 사람들이 공통관심사를 공동연찬하기 위해 조용한 장소에서 학문의 회합을 가져왔었다. 정조 3년(1779)경에 走魚寺와 天眞庵에서 權哲身·丁若銓·丁若鏞·權相學·李寵億·金源星과 李檗(蘗) 등 남인 소장학자 10여 명이 자주 모임을 가지며 儒經을 논하고 당시 그들이 검토해 오던 서학서와 천주교를 논하였다. 이벽의 주장을 받아 천주교서도 집중적으로 검토한 끝에 마침내 천주학·천주교를 신봉할 만한 가치가 있는「異學」이요「異敎」로 공동이해에 이르게 되었다. 이들의 천주학 이해는 갑자기 된 것이 아니었다. 이에 앞서 오랜 세월에 걸친 선배학자들의 천주학연구와 그들 자신들의 천주학서 검토를 통해 도달한 결론이었다. 이들은 모두가 이익의 영향을 받아 실학과 서학에 큰 관심을 가지고「實學經學」에 힘써 오던 소장 실학자였고 한역서학을 검토해 오던 인물들이었다. 이들이 결론에 도달한 천주학의 깨우침이 주목된다.147)李元淳,≪天眞庵走魚寺講學會論辨≫(≪韓國天主敎會史硏究≫, 한국교회사연구소, 1986), 43∼79쪽 참조. 그것은 유학을 부인하고서의 천주신앙의 수용이 아니었다. 유학의 입장에 서 있으면서도 유학철학의 가르침을 보다 확충한 학문의식에서, 즉 유학을 보충한다는 보다 확대된 문화의식에서 깨우친「보유론적 천주신앙」을 자율적으로 체득 인식하고 수용한 점에 특색이 있는 것이다.

 왜란과 호란의 고난을 겪은 후에 동요하는 유교적 조선 후기 사회상황에 기능적으로 대응할 능력을 상실한 성리학 가치체계가 한계상황에 직면하면서「虛의 學」으로 변화된 성리학에 대해 근본유학의 입장으로 돌아가 유교를 재음미하고 새로운 발전을 학문적으로도 모색하는 움직임이 태동하게 되었다. 즉 조선 후기사회에「실학정신」이 감돌게 되면서 실학자들은 새로이「實」의 유학을 근본유학인 洙泗學(孔孟學)에서 찾게 된 것이다. 실학자들의 실학적 현실목표는「四書」에 치우쳐 오직 사변적 理學만을 고집하는 宋·元流의 주자학에 대신하여「五經」을 중심한 수사학적 유학 즉 근본유학으로의 회귀에 의한, 이른바 古經 중심의 학문을 추구하게 되었고 王道社會의 구현을 추구하는데 치중하였다. 이들의「實學經學」적148)李乙浩,≪茶山實學의 洙泗學的 構造≫(≪實學思想의 硏究≫, 玄岩社, 1795). 노력으로「經書」의 天·上帝思想을 다시 검토하게 되었다. 그들은「천」·「상제」가 동시에 그들이 연구하고 검토하던 서학서의「천주」와 접합되는 위치의 존재로 보는 인식에 도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즉「先秦經學」의 연구를 통하여‘先秦의 유신론적 천주관’149)朱在用,≪先儒의 天主思想과 祭祀問題≫(京鄕雜誌社, 1985).의 깨우침을 얻게 되었던 것이다. 즉 그들이 동시에 접하던 한역서학서에서 대했던 만물의 창조주요, 주재자로의 천주를「천」으로 이해하여「接變」적으로 보유론적 천주신앙을 수용하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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