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5권 조선 후기의 문화
  • Ⅰ. 사상계의 동향과 민간신앙
  • 3. 천주교의 수용과 전파
  • 2) 천주신앙 실천과 초기교회의 발전
  • (1)「신앙공동체」의 형성과 그 특성

(1)「신앙공동체」의 형성과 그 특성

 영조 말년경 洪儒漢(1726∼1785)이≪天主實義≫와≪七克≫을 읽고, 개인적으로 그리스도신앙을 터전으로 한 隱修的 생활을 한 일이 있었고,159)金九鼎,<洪儒漢에 關한 史料發見>(≪가톨릭靑年≫, 1965-11), 60쪽. 한편 정조 3년(1779)경의 走魚寺天眞庵講學모임에서 한역서학서를 공동 검토하여 천주신앙을 어느 정도 이해하고 그 계율을 지킨 사람들이 있었음이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들은 천주신앙의「신앙예비자」일 수 있으되 聖洗聖事를 받은 정식교인은 아니었다. 그러기에 주어사천진암강학의 모임이 한국천주교회의 시원일 수는 없었다.160)천주교성직자로 교회사가인 崔奭祐신부는 이 점을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未信者가 가톨릭교회의 일원이 되려면 聖洗聖事를 받는 길밖에 없다. 따라서 洪儒漢과 李檗이 하느님에 대한 신앙을 가졌었다 하더라도 성세성사를 받지 않았기 때문에 정식으로 교회의 일원이 될 수는 없었다. 새 교회법이 예비자들에게도 종래 신자들에게만 주어졌던 장례식 같은 권리를 어느 정도 허용하였다 하더라도 그것은 교회법상의 권리이고 성세성사의 은총과 교회의 구원 은총에까지 참여한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그러므로 홍유한이나 이벽은 아직 교회 안에까지 들어간 사람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교회의 멤버가 아닌 사람들의 모임이 절대로 교회공동체가 될 수는 없었다…」 走魚寺(天眞庵-필자추가)의 講學은 한국교회의 기원일 수 없다(崔奭祐,≪韓國敎會史의 探究≫Ⅱ, 한국교회사연구소, 1991, 12쪽).

 한국천주교회의 출발을 이루는 역사는 이승훈이 북경천주교회에서 성세성사(영세)를 받고 정식교인이 되어 귀국한 정조 8년 서울 水標橋 가까이 있던 이벽의 집에서 이벽·권일신·정약전·정약용·최창현 등에게 입교절차를 취해 줌으로써 정식교인들이 생겨나고, 그들이 중심이 되어 明禮洞의 중인 김범우의 집에서 정기적인 신앙집회를 가지기 시작한 같은 해 가을에서 겨울 어느 때에 서울의 천주신앙공동체가 생겨났다. 이 일로 한국천주교회가 정식으로 탄생되었던 것이다.161)Dallet의≪한국천주교회사≫, 李晩采 편≪闢衛編≫, 작자미상의≪邪學懲義≫나 왕조실록 기사를 통해서 확인되고 있다. 이 신앙공동체 창설의 소식에 접한 북경교구의 Gouvea주교는 1790년 10월 6일부로 羅馬布敎聖省長官에게 朝鮮天主敎會 창설의 소식을 감격적으로 보고하였다(崔奭祐, 위의 책, 14쪽).

 이에 앞서 이승훈이 서장관으로 북경에 들어가게 된 부친을 따라 북경에 간다는 소식을 듣고 그의 동학도이던 이벽이 그를 찾아가 북경교회를 찾아 보고 서학과 천주학을 자세히 알아본 후 서학에 관한 자료를 얻어 가지고 귀국하도록 부탁한 바 있었다. 그 자신도 천주교서를 가까이해 왔으며 서양수학에 대한 관심이 컸던 이승훈이 신문화에 대한 강한 의욕을 가지고 북경천주당을 방문한 후, 그 곳에서 성세성사를 받고 귀국했던 것이다.162)李承薰이 한국인 최초의 領洗者는 아니었다. 임진왜란 때 전쟁터에서 代洗 받은 조선인이 있었고, 일본땅으로 납치된 俘虜朝鮮人의 키리시땅(切支丹-천주교의 당시 일본서의 호칭)에 입교한 사람이 많았다. 다만 그들의 일이 한국천주교회의 기원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이승훈이 북경에서 영세 받은 경위는≪한국천주교회사≫에 자세하다(Dallet,≪한국천주교회사≫:한글역주본, 상권, 303∼305쪽). 그가 가지고 돌아온 한역천주교서를 신중히 검토한 이벽이 정식교인 되는 조치를 취해 주도록 이승훈에 요청하여 몇몇 천주서 동학도들이 같이 입교절차를 취했던 것이다.

 새로이 탄생된 한국천주교회는 몇 가지 점에서 다른 나라에서의 교회 창설과정과 다른 특수성을 지니고 있다.

 첫째, 전교자의 입국활동 없이 전통사회 지식인들이 自學·自修의 서학활동을 통해 천주신앙과 접근한 사실,

 둘째, 학구적 검토를 통해 보유론적 천주신앙의 깨우침에 터전을 삼아 교회를 창설한 사실,

 셋째, 신앙과 더불어 신문화수용 의식을 지닌 양반지식인들의 자율적인 求道활동으로 신앙공동체를 이루게 된 사실,

 넷째, 성직자가 없고 미사祭禮도 없는 신도들이 瞻禮(성직자 없이 신자들만에 의해 진행되는 신앙집회)로 신앙생활을 시작했으며 교회를 키우게 된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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