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5권 조선 후기의 문화
  • Ⅰ. 사상계의 동향과 민간신앙
  • 3. 천주교의 수용과 전파
  • 2) 천주신앙 실천과 초기교회의 발전
  • (2) 초기교회의 발전과 시련

(2) 초기교회의 발전과 시련

 앞의 항목과 같은 특성을 지니고 창설된 조선의 천주교회는 비록 성직자가 없는 신자만의 교회였으나, 이벽을 비롯하여 초기교회의 이른바 평신도지도자들의 열성어린 전교활동으로 급속하게 신도 수가 늘어났다. 한편 지역적으로 서울만이 아니라 충청도와 전라도지방에도 그리스도공동체로의 교회가 생겨나게 된다.

 지방에 생겨난 최초의 신앙공동체는 李存昌이 창설한 內浦敎會였고 뒤이어 柳恒儉이 全州敎會를 창설하게 된다.163)Dallet, 위의 책, 313쪽. 천안 여사울(현 忠南 禮山郡 新岩面 新宗里)의 양민인 이존창과 전주 초남(현 전주시내의 한 지역)의 유복한 양반 유항검은 다 같이 서울공동체 창설 후에 상경하여 권일신의 인도로 입교하고, 고향에 돌아가 일가 친척과 동민을 집단으로 입교시켜 지방교회를 이룬 지도자였다.

 초기교회가 겪게 된 최초의 시련은 정조 9년의 乙巳秋曹摘發事件이었다.164)작자미상,≪邪學懲義≫권 2, 附 秋官志乙巳春甘結.
李晩采,≪闢衛編≫권 2, 乙巳秋曹摘發.
金範禹의 집에서의 종교집회가 당국에 의해 적발됨으로써 비밀의 한국교회의 존재가 세상에 드러나게 되었고, 이를 계기로 당국의 설득과 집안의 배교 강요의 권명으로 이승훈·이벽 등 초기교회 지도자들이 교회활동을 멀리하게 되었다. 정부당국은 북경으로부터의 한역서학서의 도입을 금지했고 정부소유의 천주교서를 불태워 버리는 조치를 취하였다.

 한때 교회활동에서 후퇴했던 이승훈은 1년 후 교회활동의 핵심으로 재등장하였다. 이 때에 평신도지도자들은 그들이 계속적으로 한문교리서를 연구하는 가운데 알게 된「聖職制」를 조선교회에 도입 적용하게 되었다. 즉 이승훈을 중심으로 권일신·최창현·홍낙민·이존창 등 10여 명이 신부가 되어 가톨릭교회 소정의 聖事를 집행하게 되었다. 가톨릭교회법상 위법조직인 이 성직제도를 교회사가들은「假聖職制조직」이라 부르고 있다.165)<李承薰의 書翰>한문 원본은 유실되고 불어번역문만이 현재 로마의 布敎聖省古文書庫에 소장되어 있다(Andreas Choi, L'Érection du Premier Vicariat Apostolique et les Origines du Catholicisme en Corée, Suiss, 1961, p.91). Dallet, 앞의 책, 324∼325쪽. 이 때 10명의 신부 중에 權日身·崔昌顯·洪樂敏·李存昌·柳恒儉·李承薰 등이 신부였다는 것은 확실하다. 이 제도는 신앙생활을 보다 열심히 봉행하기 위해 필요한 제도적 조치를 취하려고 정조 10년(1786) 봄에 조직된 것이나, 천주교회법으로는 분명한 불법조직이었고 瀆聖行爲였다. 1년 후 유항검이 이 조직에 의문을 제기하고166)Dallet, 위의 책, 326쪽의 주 32 참조. 이 제도에 대한 유권적 해석을 내려주도록 북경주교에게 밀사를 파견하여 문의한 결과 불법임을 알자 곧 이 조직을 해체했다. 이에 앞서 유항검의 의의제기가 있자 이승훈 등은 이미 가성직자로의 성무집행을 중지하고 있었다. 그 이듬해에는 이승훈과 정약용 등이 성균관이 있는 伴村에서 집단적인 서학서연구를 지도하다가 洪樂安·李基慶 등 斥邪勢力에 의해 공격을 받아 지방으로 축출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167)李晩采,≪闢衛編≫권 2, 丁未伴會事.

 거듭 시련이 계속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교세는 교회가 탄생한 후 10년 만인 정조 18년에는 4,000명으로 늘어났다. 서울·충청·전라 각지에서 천주교인을 찾을 수 있을 만큼 급속하게 교세가 자라났다.168)Dallet, 앞의 책, 371쪽. 이렇게 교세가 신장됨에는 초기교회 지도자들의 신앙을 같이 나누고자 하는 적극적인 전도활동의 힘이 컸다. 그들은 기회 있을 때마다 비밀리에 주위 사람을 대상으로 口頭전도에 힘쓰면서「天主歌辭」를 지어 서민층에 유포시켜 노래로 전도활동을 폈다. 한편 그들이 천주신앙을 깨우친 학문자료인 한역서학서를 쉬운 우리말로 번역하여 유포했다(역자미상의≪텬주실의≫와 최창현의≪성경직해≫ 등). 또한 그들은 나름대로 우리글로 간추린 천주교서를 지어 비밀리에 세상에 펴냈다(李檗의≪聖敎要旨≫, 丁若鐘의≪主敎要旨≫등).169)Dallet, 위의 책, 315쪽에≪聖經直解≫번역의 사실이, 같은 책 442쪽에≪主敎要旨≫편술의 사실이 나와 있고, 李檗의≪聖敎要旨≫는 李承薰의 글인≪蔓川遺稿≫에 전문 내용이 수록되어 있음이 밝혀졌다(金玉姬, 앞의 책, 1979). 이런 초기지도자들의 적극적이고 진취적인 포교활동으로 초기교회가 급속하게 자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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