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5권 조선 후기의 문화
  • Ⅰ. 사상계의 동향과 민간신앙
  • 3. 천주교의 수용과 전파
  • 2) 천주신앙 실천과 초기교회의 발전
  • (4) 진산사건과 조상제사문제의 의의

(4) 진산사건과 조상제사문제의 의의

 정조 15년(1791) 5월 珍山땅의 양반 천주교인 尹持忠의 모친상 때「廢祭毁祠」문제175)尹持忠은 전통적 유교 예속의 喪禮인 제사를 지내지 않고 神主를 모시지 않았다.가 발단이 되어 벌어지게 된 辛亥敎難은 조상제사문제로 말미암아 생긴 박해사건이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보유론적 천주신앙의 한계가 청산되지 않을 수 없었다. 한국천주교는 조상제사문제로 유교와의「習合的」성격을 청산하게 되었다. 이러한 신앙의 질적 변화로 말미암아 진산사건을 계기로 한국천주교회는 제2의 출발을 내딛게 되었다.

 보유론적 천주신앙의 입장에서 천주를 봉행하게 되었던 초기 조선교회의 교인들은「조상제사」행위가 조선교회 창설되기 반세기 전에 이미 로마교황에 의하여 거듭「禁令」이 내려졌음을 전혀 알지 못했었다.176)拜孔祭祖문제를 가지고 淸代 中國敎會傳敎會간의 의견대립으로 그 문제가 羅馬敎皇廳에 제소된 것은 1643년의 일이었고, 1645년에 처음으로 교황 Innocent Ⅹ에 의해 禁令이 취해진 후 복잡한 경로를 거쳐, 1715년 교황 Clemens Ⅺ의 敎勅인 EX illa die와 1741년 교황 Benedicto ⅪⅤ의 敎勅인 EX quo singulari에 의해 조상제사의 금지가 선포되었다. 그러나 신앙생활을 실천하게 되면서 조상제사와「神主」를 모시는 유교적 전통예속에 회의를 품게 되었고, 정조 14년 밀사 尹有一을 북경주교에게 파견하여 조상제사에 대한 유권적 해석을 구하였다. 조선신자의 질의에 대하여 구베아(Alexander de Gouvea)주교는 司牧敎書를 통해 제사금지령을 하달했다.177)Alexandre de Gouvea, Extraetum Epistolae Excellentissimi, Admodumque Reverendi Episcopi, Pekinensis, ad Illustrissimum Admomumque Reverendum Episcopum Caradrensem. 이 서한은<朝鮮王國における天主敎の確立>이라는 표제로 日譯되어 있다(山口正之,≪朝鮮西敎史≫, 雄山閣, 1967, 209∼231쪽). 이 소식에 접한 조선교인 사이에서 동요가 있었으나 그것이 얼마나 중대한 선택을 요구하는 것인지를 피부적으로 실감하지 못하고 있다가 정조 15년에 신해교난을 맞게 되었다.

 구베아주교의 교시에 따라 진산에 살던 양반교우 윤지충과 외종형 權尙然은 조상제사를 폐하고 신주를 불태워 버렸다. 또한 정조 15년 5월 윤지충은 모친이 별세했을 때 전통적 유교상례에 따라 혼백을 모시거나 신주를 세우지 않고 제사도 지내지 않았다.「廢祭焚主」한 이 일은 전통유가들을 자극하게 되고 비난과 공격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한 일이었다. 이 사건은 국가적 문제로 확대되어 아래로 지방유생과 위로는 재상에 이르기까지 유가세력은 상소와 통문 등을 통해 윤·권 양인을 패륜을 저지른 역적으로 몰아세우는 한편, 천주교를「無父無君」·「悖倫亂常」의 사학으로 단정하고 천주교를 금지하고 탄압할 것을 주장하고 나섰다.178)李晩采,≪闢衛編≫권 2, 辛亥珍山之變條에 尹·權을 비난하고 처벌을 요구하는 通文·儒書·上書·上疏 등 10여 편이 수록되어 있다. 마침내 윤지충과 권상연은 처형되고, 이승훈도 邪書구입과 간행에 관련되어 삭탈되었고, 권일신은 교주로 몰려 제주도로 유배되는 처분을 받았다. 다수의 교인이 체포되어 신문받고 배교를 고백하고야 석방되는「辛亥迫害」179)權日身·李承薰이 유배당하고 崔必恭·崔仁喆·鄭仁爀·孫景允·梁德潤·崔仁吉·崔必悌 등이 체포·투옥되었었다.가 뒤따랐다.

 신해교난은 조선천주교회의 성격과 방향에 새로운 변화를 이끌어 조선천주교회의 제2의 출발을 재촉하였고, 儒·耶(유교와 그리스도교)교섭사에 중요한 분기점이 되었다.

 첫째, 신앙면에 있어 종래의 보유론적 천주신앙은 설 땅을 잃게 되었다. 이제 천주교도들은 유교적 예속을 강요하는 국왕에 대한 충과 그리스도신앙의 근본인 천주에 대한 충을, 육신의 부모에 대한 효와 신에 대한 신앙적 효 그 어느 한쪽을 선택하여야 하는 궁지에 몰렸다. 종래와 같은 습합적인 보유론에 터전을 한 천주신앙을 청산하고 천주교회의 본래 교리 그대로의 천주신앙을 선택하여야 했다. 이러한 점에서 조선천주교회의 신앙적 내면에서의 제2의 새 출발을 하게 된 것이다.

 둘째, 이러한 선택의 결단을 강요당하는 단계에서, 신문화수용이라는 문화의식에서 보유론적 천주신앙을 따랐던 양반지식층 교인들 다수는 교회를 떠나게 되었다. 교회를 창설하고 초기교회의 지도자로 활약하던 지식층 교인 대부분이 조상제사금지에 거부반응을 보이고 천주신앙에서 이탈하였다.

 반면에「奉祭祀」나「拜孔儀禮」가 크게 문제되지 않는 중인층 신자들(최인길·최창현·최필공 등)이 교회의 새로운 지도세력을 이루게 되고, 서민·부녀자층의 교인이 대종을 이루게 되는 등 교회의 지도세력에 변화가 일어났다. 즉 양반층은 이탈하고 中庶계층이 주류를 이루게 됨으로써 교회의 반유교적·반봉건적 성격이 강화되었다.

 셋째, 천주신앙의 순수성과 절대성이 강화되고 서민층이 신도의 주류를 이루게 됨으로써 내세·천당·救靈생활은 중시하고 현세와 세속사회를 경시하는 경향이 뚜렷해지게 되었다. 따라서 신앙과 사회, 교회와 국가와의 반목과 확집이 거세져 천주교에 대한 박해 분위기가 강화된다. 천주교도들에 대한 반사회·반국가의 비국민으로 비난공격하는 여론과 정부당국의 입장이 강경해져 천주교박해가 가혹하게 될 수밖에 없었다. 廢祭焚主→無父無君→悖倫亂常→禽獸之敎·滅倫之道로 의식하는 박해자의 일방적인 흑백논리가 사회의 호응을 크게 얻게 되고 교회는 격렬한 형극의 수난을 겪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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