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5권 조선 후기의 문화
  • Ⅰ. 사상계의 동향과 민간신앙
  • 3. 천주교의 수용과 전파
  • 2) 천주신앙 실천과 초기교회의 발전
  • (6) 성직자 영입과 교회활동의 조직화

(6) 성직자 영입과 교회활동의 조직화

 천주교 신앙생활은 복음의 믿음과 천주에 대한 제사인「미사」를 중심으로 실천되는 것이다. 미사의 집전자는 그리스도가 친히 후계자로 권능을 보장한 사도 이래의 사제들, 즉 성직자는 천주교회에 있어서 필수의 제도적 존재이며 영적 구령의 인도자로 불가결의 제도적 요소인 것이다. 자학자습에 의해 보유론적으로 천주신앙을 깨우쳐 교회를 창설하고 이끌고 나오던 초기교회의 지도자들은 성직제도에 대한 교리적 이해가 부족했었다.

 그러나 몇 차례 시련을 겪으면서, 한역교리서를 더 가까이하는 가운데「성직제」에 관한 이해를 얻고, 정조 13년(1789) 마침내 그들 스스로 이른바「假聖職組織」을 편제하게 되었다. 지도적 교인 스스로 주교와 신부가 되는 성직단을 조직하고 聖務를 담당하게 된 것이다. 이 성직조직은 명백한 교회법위반의 불법조직이었다.182)정조 10년(1786) 봄에 告解聖事의 제도를 시작하였고(Dallet, 앞의 책, 324∼325쪽), 그 해 가을에 10명의 신부를 지명하여 미사聖祭를 거행했다 한다(정조 13년 李承薰이 北京主敎에 올린 서한). 이런 행위는 교회법 1,380조를 어기는 瀆聖行爲였다. 그러기에 뒷날 周文謨신부는「乙巳後妄稱神父行諸聖事」(≪李基讓推案≫신유 3월 15일 周文謨供草) 또한 黃嗣永은「妄行聖事」로 이 일을 규정하고 있다(黃嗣永帛書 48행). 그러나 1년 후 이 제도에 대해 柳恒儉이 의혹을 제기하자 교회는 북경주교에 밀사 尹有一을 파견하여 가성직조직에 대한 교회의 유권적 해석을 구하였다. 북경주교의 조직해산과 성무금지 지시에 따라 이 조직은 정조 14년에 해산했다. 이후 조선교회는 다시금 윤유일을 북경에 파견하여 조선교인들을 위해 적법한 성직자의 파송을 간청하게 되었다. 북경주교의 배려에 의하여 정조 19년 초에야 조선천주교회를 위한 최초의 사목담당자가 되는 周文謨신부를 맞이해 들일 수 있었다.183)假聖職組織의 시말과 聖職者迎入運動은 李承薰과 그 밖의 몇몇 신도들에 의하여 주도된 것이었다(崔奭祐,<韓國敎會의 創設과 初創期 李承薰의 敎會活動>,≪韓國敎會史의 探究≫ Ⅱ, 한국교회사연구소, 1991, 61∼68쪽 참조).

 중국인 주문모신부의 입국과 조선교회의 사목주관으로, 종래 신자만의 교회가 이제 성직자와 신자로 된「성직교회」로의 새로운 출발을 뜻하는 일이기에, 어느모로는 한국천주교회「제3의 출발」이라 할 수 있다.184)천주교회는 그리스도신앙을 만든 하느님 백성의 신앙공동체로 그 인적 구성요건은 신자(평신도)와 더불어 그들 신자들의 靈身의 현세적 관리자로 성직자가 필수적인 것이다.

 주문모신부가 역관출신의 교인 최인길의 집에 은신하면서 활동한다는 비밀은 곧 박해자에 알려져 그를 체포하려는 소동인 乙卯失捕事件이 일어났다.185)이 사건의 경위는 Dallet, 앞의 책, 378∼380쪽에 자세하나, 丁若鏞의 自撰墓誌銘(≪與猶堂全書≫1-16권, 詩文集 수록),≪闢衛編≫,≪邪學懲義≫, 王朝實錄, 黃嗣永의<帛書>등을 통해서도 그 전모를 파악할 수 있다. 교인들의 긴밀한 대책으로 주문모신부는 양반여성교인인 姜完淑 집에 은신할 수 있었다. 그는 강완숙 집의 은신처를 근거로 순조 원년(1801)의 신유박해로 체포되어 순교하기까지 6년간 조선교회를 영도하며 성무를 담당할 수 있었다. 이 사건으로 윤유일·池璜·최인길 등은 순교하였다.186)李晩采,≪闢衛編≫권 3, 捕廳三賊徑斃事.
Dallet, 앞의 책, 381쪽.

 주문모신부는 은신중에도 교회활동의 조직화를 꾀하였다. 그는 교회조직을 이원체제화하여, 신도를 영도하며 교회활동을 돕는 신자조직으로 총회장·회장제도를 실시하여 중인출신 최창현을 총회장으로, 몇몇 지도적 교인을 회장으로 임명하는 한편, 여성회장으로 강완숙을 선임하여 유교적 폐쇄사회의 여성교인들의 신앙생활을 관장케 했다. 한편 전도와 신자의 교리학습과 신앙집회의 비밀조직으로「明道會」를 조직하였다. 명도회장에 정약종을 임명하고 그 하부조직으로 신임할 수 있는 교인을 중심으로 교인 5·6세대로 이루어지는 세포적 점조직인 六會를 이루게 하여 교인들의 신심활동을 관리하게 되었다. 박해정책 아래서 비밀을 철저히 유지하며 교인의 신심생활을 실제와 포교활동을 위한 세포조직으로 편성한 것이다. 명도회의 하부조직인 육회의 비밀집회 장소로는 의약계 중인들의 약방이 주로 이용되었다.187)黃嗣永은 明道會에 관해 법정에서 다음과 같이 공술하고 있다.「洋敎有明道會 或三四人或五六人爲一會 先以名報于神父 後爲神工 神工卽察洋學以敎人也 一年之內 神工之勤者 許入於會中 其不勤者拔之」(≪邪學罪人黃嗣永等推案≫). 한편 六會는 洪文甲·洪翼萬·金勵行·玄啓欽과 黃嗣永 자신의 집 등에 있었다고 공술하고 있다.

 주문모신부는<告解要理>·<告解聖餐>·<聖禮問答>등을 저술하여 신심생활을 돕는 가운데 지도적 교인들에게 간추린 한글교리서의 제작을 권장했다.188)崔奭祐,<邪學懲義를 통해서 본 初期天主敎會>(≪敎會史硏究≫2, 韓國敎會史硏究所, 1979), 41쪽. 정약종의≪主敎要旨≫가 그 대표적 사례이다.189)金 澈,<丁若鐘의 주교요지>(가톨릭大 碩士學位論文, 1974).

 이렇게 조선교회가 비밀조직을 가다듬고 전교에 힘쓴 결과 그의 입국 당시 교인이 4천여 명이던 교세가 1만명 가까운 숫자로 늘어났다. 정조 13년에 黃沁을 북경주교에게 파견하여 조선교회의 탄생경위와 그 후의 기적적 발전을 공식적으로 보고하였다. 북경교구장 구베아주교가 그 사실을 로마교황청에 보고하게 됨으로써 한국천주교회 탄생과 발전의 사실이 유럽세계에 알려지게 되었다.190)Gouvea(湯士選)주교는 1790년 10월 6일자로 布敎聖省長官 Antonelli樞機卿에게 두 통의 보고서를 올려 朝鮮敎會의 탄생을 통보하였다. 한편 1797년 8월 15일자로 中國四川省敎區管區長 Calendro주교 de Saint-Martin에게 장문의 편지를 보내어 조선왕국에서의 특이한 천주신앙수용, 교회창설과 박해와 수난에 대해 알렸다. 이 편지가 葡萄牙語(1808)로 佛蘭西語(1820)로 번역되어 유럽에 살포되었다(山口正之,≪朝鮮西敎史≫, 209∼231쪽에 전문이 日語로 번역되어 수록). 한편 崔奭祐 역본이 Dallet의≪한국교회사≫에도 부분적으로 초역 수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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