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5권 조선 후기의 문화
  • Ⅰ. 사상계의 동향과 민간신앙
  • 3. 천주교의 수용과 전파
  • 3) 천주교박해와 지하교회로의 발전
  • (2) 박해 받는 조선천주교회

(2) 박해 받는 조선천주교회

 이미 한역천주교서를 연구 검토하는 단계에서도 척사론적 의식을 가지고 천주학을 배격하는 衛正論者들이 있었다. 그들은 천주학이 장차 끼칠 해악들에 대하여 공격 배척하는 글을 남겼다.206)愼後聃의<西學辨>, 安鼎福의<天學考>·<天學問答>이 그 대표적 사례이다.

 정조 8년(1784)에 시작된 천주교회에 대한 배척이 구체화된 것은 다음해 乙巳秋曹摘發事件 때부터의 일이었다. 이 사건으로 일부 양반교인 가족들의 배교강요가 있었으나 정부대책은 집회장소의 제공자 김범우를 유배하는데 그쳤다.207)李晩采,≪闢衛編≫권 2, 乙巳秋曹摘發. 金範禹가 단양으로 유배되어 그 곳에서 사망하였음은≪邪學懲義≫권 1, 正法罪人秩 金顯禹供草로 입증된다. 다만 이 사건이 계기가 되어 ‘左道不經’한 ‘異端妖誕說’과 ‘雜術方書’의 貿書를 적극 금압하여야 한다는 여론이 일어나 마침내 비변사가 금서조치를 취했다.208)≪正祖實錄≫권 33, 정조 15년 11월 기묘.

 정조 15년의 신해진산사건 때에는「廢祭焚主」소동의 주인공인 윤지충·권상연을 사형에 처하는 한편 홍문관 소장의 서학서를 소각하고209)≪正祖實錄≫권 33, 정조 15년 11월 기묘·계미. 천주교서적 소지자를「臧匿邪書罪」로 유배시켰다. 정조는 빗발치는 유가들의 강경한 상소에 대하여 “正學(성리학)이 크게 밝혀지면 邪說은 스스로 꺾이고 말 것이라” 하고 그 이상의 대책이나 사상통제의 방법을 취하지는 않았다.210)≪正祖實錄≫권 26, 정조 12년 8월 임진.

 이렇게 온건하고 조건반사적인 대천주교정책은 정조의 승하와 僻派정권의 등장으로 사태는 급전되었다. 신해진산사건으로 조선정부는「廢祭滅倫之敎」로 몰리게 된 천주교에 대하여 박해의 구실을 찾기는 어렵지 않았다. 순조 원년(1801) 벽파와 대왕대비 김씨의 정치적 보복의 복선이 깔려 발생한 신유박해는 대왕대비 김씨의 척사윤음에 의해 정략적으로 추진되어 경향 각지에서 많은 교도들이 희생되었다. 이런 와중에 생겨난 黃嗣永帛書사건은 사태를 더욱 악화시켰다.211)黃嗣永帛書는 辛酉迫害의 禍亂 중에 조선교회의 고난을 알리는 한편 구원을 요청하기 위하여 黃嗣永이 피신처인 忠北堤川郡鳳陽面九鶴里 舟論마을 토굴에서 작성한 北京主敎에게 보내는 비밀통신문이었다. 명주에 쓰여진 133행 13,311자의 편지이기에 帛書로 불리고 있다. 이 일을 같이 도모하던 黃沁이 체포되었고 결국 黃嗣永 자신도 화를 입게 되었으며 辛酉迫害가 더욱 격렬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천주교도는 모역의 무리로,「통외」의 무리로 단죄되는 등, 박해가 五家作統法을 동원하여 더욱 치열하게 전개되어 주문모와 그 밖의 지도적 교인들이 모두 희생됨으로써 조선교회는 빈사지경에 빠지게 되었다.

 정부의 강력한 탄압정책에도 불구하고 세도정치 아래 확대 증폭되고 있던 조선왕조의 사회·경제적 모순에서 현세적 위열과 내세의 영생의 가르침에 이끌리게 되는 서민대중은 다시금 교회에 몰려들게 되어 교세는 점차 늘어났다. 또한 각지에「敎友村」이 총생하였다. 순조 15년에 경상도지방에서 乙亥敎難, 순조 27년에 전라도지방에서 丁亥敎難의 박해소동이 벌어졌다. 그러나 이런 지방박해로는 거센 천주교세의 불길을 잡을 수는 없었다. 순조 31년에「朝鮮敎區」가 설정된 후 서양성직자들의 계속적 잠입과 비밀스런 전교활동으로 조직적인 교회활동이 다시금 활발해졌다.212)≪敎會史硏究≫4 (한국교회사연구소, 1983)에 朝鮮敎區 설정과 관계되는 논문 4편이 수록되어 있다(李元淳,<朝鮮敎區 設定의 歷史的 契機>;金玉姬,<朝鮮敎區의 活動>;崔奭祐,<朝鮮敎區 設定의 敎會史的 意味>;趙 珖,<朝鮮敎區 設定의 民族史的 意味>). 이에 대한 박해가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의 세도권 쟁탈의 정권다툼을 배경으로 헌종 5년(1839) 폭발적으로 전개되었다. 이 때 대대적으로 자행된 기해박해로 말미암아 교회는 주교 및 신부 등 3인(Imbert주교, Maubant·Chastan신부)이 순교하는 대타격을 받게 되었는데,213)이 때 살해된 巴里外邦傳敎會 소속 프랑스 성직자는 Imbert(한국이름 范世亨)주교, Maubant(羅伯多祿)과 Chastan(鄭牙各伯)신부였다. 3월부터 시작된 박해는 10월 척사윤음의 반포로 더욱 거세졌고 많은 희생자를 낳게 하였다.

 이보다 앞서, 헌종 2년 조선교회가 멀리 마카오로 유학을 보냈던 김대건이 헌종 11년에 귀국하게 되었다. 그는 교회재건에 헌신하다가 다음해 성직자 영입을 위한 해상루트 개척차 서해에 나갔다가 체포되고 말았다. 때마침 내항한 프랑스 동양함대의 무력시위에 의한 통교교섭으로 위기의식을 크게 느끼게 된 집권당국자들은 김대건신부와 그 연루자들을 처형하는 병오박해를 일으켰다.214)金大建의 일대기와 그의 생애를 추적할 그의 서한에 관한 연구로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金九鼎,≪聖雄金大建傳≫(가톨릭出版社, 1970).
≪성 김대건 안드레아신부의 서한≫,≪성 김안드레아신부의 활동과 업적≫,≪성 김대건 신부의 체포와 순교≫,≪敎會史硏究≫ 12:성 김대건 안드레아신부의 생애와 영성 등 4편은 1997년 한국교회사연구소에서 간행된 것이다.
병오박해가 벌어진 헌종대 뒤를 이은 철종대 15년간은 소규모의 박해가 여러 곳에서 간헐적으로 벌어졌으나 김대건과 같이 마카오에 유학했던 崔良業신부215)崔良業신부는 金大建·崔方濟와 같이 헌종 원년(1835) Macao(澳門)에 유학했으나 金大建신부보다 4년 후인 헌종 15년에 上海에서 한국인으로서 두 번째 신부로 서품되고 그 해 연말에 해도를 이용하여 귀국했다.와 조선교회의 전도를 책임졌던 巴里外邦傳敎會(La Sociétédes Mission-Étrangères de Paris) 소속의 프랑스 전교성직자들의 계속적인 잠입활동과 세도정권 밑에 학정과 착취와 관료의 수탈 그리고 계속적으로 엄습하는 자연재해(홍수·한발·충해·질병 등)에 지치고 피폐한 농촌사회의 현실에서의 정신적 이탈을 꾀하는 사회추세에 힘입어 거의 전국적으로 교세가 뻗어 나갔다.

 이렇게 커진 교회에 최대의 박해가 가해졌는데 곧 고종 3년부터 6년간에 걸쳐 전개된 병인박해였다. ‘縲洩望道’하고 ‘捕廳獄滿’하였으며 ‘棄屍如山積’했다는 대규모 박해216)朴齊炯 述·裵琠 評,≪近世朝鮮政鑑≫상(韓國敎會史硏究所, 1968).는 서구식민세력의 침략적 접근에 자극받아 강경한 위정척사의 쇄국정책과「以夷制夷」의 防俄策으로 천주교회와 접근을 꾀하던 흥선대원군이 정치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정치적 표변에서 벌어지게 된 박해였다. 장기간에 걸쳐 전국으로 확대된 박해로 이어지게 되는 데에는 프랑스의 강화도침공(병인양요), 서구식민세력의 야합으로 자행된 흥선대원군 부친 묘의 파묘사건(고종 5년의 德山堀塚事件)과 미국함대의 강화공격(고종 8년의 辛未洋擾) 등이었다. 이런 사건들로 천주교도는「통외」의 ‘외적을 불러들이는 무리’로 단정되어 철저하게 박해를 받았다. 이리하여 당시 전체 교인의 3분의 1인 약 8천여 명이 희생되었다.217)丙寅迫害에 관한 연구는 柳洪烈,≪高宗治下 西學受難의 硏究≫(乙酉文化社, 1963)가 있다.

 거의 100년 가까이 계속되어 온 천주교의 금압과 박해는 고종 13년(1876)의 개항과 더불어 진정되는 기미를 보이기 시작하였다. 고종 19년에 韓美조약 체결로「洋夷」라 불리던 서양인의 입국이 조약으로 보장되었고, 이어 고종 23년에는 韓佛조약 체결로 서양인의 내지여행과 교회활동이 조약상으로 약정됨으로써 국가권력을 동원한 대대적인 박해는 종식되고 점차 신앙의 자유가 보장되는 현대를 맞게 된다.218)崔奭祐,<韓佛條約과 信仰自由>(≪史學硏究≫21, 1969).
李元淳,<韓佛條約과 宗敎自由의 問題>(앞의 책, 1993, 189∼2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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