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5권 조선 후기의 문화
  • Ⅰ. 사상계의 동향과 민간신앙
  • 3. 천주교의 수용과 전파
  • 3) 천주교박해와 지하교회로의 발전
  • (3) 박해정책과 교회의 성장

(3) 박해정책과 교회의 성장

 초창기의 신앙공동체로서의 교회가 생겨난 곳은 서울에 뒤이어 내포와 전주였다. 이들 신앙공동체의 주도적 교인들은 양반과 중인 지식계급이었고, 그들의 천주신앙은 보유론적 천주신앙이라는 한계성을 지닌 것이었다. 이러한 보유론적 천주신앙은 정조 15년 辛亥珍山事件을 계기로 청산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신문화운동적 차원에서 신앙을 지켜오던 지식인 교인들이「拜孔祭祖」의 유교제례문제로 말미암아 신앙생활에서 탈락한 결과였다. 이 때로부터 교회의 지도적 주도권은 중인층으로 바뀌게 되어 보다 비밀리에, 보다 적극적인 전교활동을 추진하는 가운데 차차 서민대중으로 천주신앙이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219)한국교회 초창에서 초기의 지도층에 관해서는 趙珖의 연구가 돋보인다(趙 珖,<信仰共同體 指導層의 特性>, 앞의 책, 1988, 53∼82쪽).

 성직자 없이 출발한 조선천주교회는 그들이 이루었던「가성직조직」을 해산한 후 성직자영입운동을 일으켜 정조 19년에 한국교회 최초의 성직자 주문모신부를 맞아「성직자 있는 교회」로 새 출발을 다지게 되었다.

 주문모신부를 맞이한 후, 교회는 조직정비와 새로이 구성된 지도적 교인들(총회장 최창현, 명도회장 정약종, 여성회장 강완숙과 각 지역 소집단 공동체의 회장)의 활동으로 교세가 급속히 자라났다. 순조 원년 신유박해가 일어날 당시 교세가 1만명을 돌파하였었다.

 그러나 국가정책에 의한 최초의 전국적 박해인 신유박해로 주문모신부와 지도적 교인을 잃고 많은 교인들이 희생되자 조선교회는 심대한 타격을 받았다. 살아남은 교인들도 전국으로 흩어지게 되었다. 이처럼 빈사지경에 빠져든 조선교회의 재건운동이 활발해지는 것은 순조 10년(1810)대에 들어 새로운 지도적 교인들이 나타나면서부터였다. 권계인·丁夏祥으로 이어지는 새로운 지도자들은 흩어진 교회조직을 재편하면서 제2차적인 성직자영입운동을 일으키게 되었다.220)丁夏祥은 辛酉殉敎者 丁若鐘(최초의 明道會長이며≪主敎要旨≫의 저자)의 둘째아들이었다. 흩어진 교회조직을 재편하고, 성직자영입운동의 선두에서 활동하였고 天主敎朝鮮敎區가 설정되는 계기를 조성했으며 계속적으로 성직자를 영입하였다. 己亥迫害를 맞아 체포되었을 때 조선인 최초의 護敎論인<上宰相書>를 당국에 제출하였다. 1984년에 103위 성인의 한 분으로 諡聖되었다. 새로운 교회 중심인물의 지도력과 더불어 전국 각지로 흩어져 심산유곡이나 야산지대에 교우촌을 형성하게 되었던 離散천주교인들의 영향으로 천주교세는 경기도·충청도 야산지대와 태백산맥 산협지방(강원·충북·경북지방), 노령·소백산맥 협곡지방 등 각 지역으로 조용하게 부식되고 있었다.221)敎友村에 관한 연구는 아직 미흡하나 金玉姬,≪崔良業신부와 敎友村≫(學友社, 1983)이 있고, 근래 지방사연구가 점차 활발해짐에 따라 朱明俊·金眞召·車基眞·馬伯樂·金秀吉 등의 실지답사에 의한 연구보고가 계속 발표되고 있다. 이처럼 정부의 박해정책에도 불구하고 교세가 전국으로 확산되고, 교인이 증가됨에는 지도자들의 헌신적 활동과 더불어 교우촌에서의 신앙과 삶, 사랑의 나눔의 영향도 컸다. 동시에 세도정치하의 사회경제적 모순이 심각해지면서 현실에서의 구원과 내세의 복락을 찾을 수밖에 없었던 농촌대중 서민층의 동향이 큰 힘이 되었던 것이다.

 정하상은 9차나 비밀리에 북경을 왕래하면서 성직자 파견을 요청하는 활동을 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이 모두 허사로 돌아가자 劉進吉의 이름으로 성직자 파송과 조선교회에 대한 적극적 대책을 羅馬敎皇에 요청하는 청원서를 보냈다. 이 청원서가 순조 27년에 로마에 접수되었고, 그 청원이 계기가 되어 순조 31년(1831) 9월 9일에 조선을 북경주교 관할하에서 떼어 朝鮮敎區를 설정하였고, 巴里外邦傳敎會222)巴里外邦傳敎會는 1658년 F. Dallu신부가 동양지방에 전교성직자를 파견할 목적으로 설립한 傳敎會. 이들은 기성의 在俗神父 가운데 동양전도를 자원하는 성직자를 받아 外邦傳敎會神學校서 소정의 훈련을 마치게 하고 동양 각지로 파견하여 포교활동에 종사케 했다. 포교지서 敎階制度 수립, 土着本邦人 성직자 양성 등에 큰 공헌을 했다. 外邦傳敎會史로는 A. Launay, Histoire Générale de la Société des Mission-Étrangères, Paris, 1894가 저명하다.에 조선교회의 관리를 위임하는 조치가 취해졌고, 최초의 교구장으로 Bruguiére(蘇霖)주교를 임명하였다.223)朝鮮敎區라 하나 교회법상으로는 정식교구가 아닌 代牧區였다. 그러나 代牧區의 장인 代牧은 주교가 代牧區長으로 임명되는 것이 관례였다(名儀主敎). 정식 교구장과 같은 권한을 행사하는 존재이기에 관례상 朝鮮敎區로 통칭한다. 초대 敎區長 Bruguière주교는 임지인 朝鮮敎會로 착임치 못하고 滿洲땅에서 헌종 원년(1835) 10월에 급서하였다.

 정작 조선교구에 프랑스인 성직자가 입국하고 교구장 주교마저 입국하여 敎階敎會의 제모습을 갖춤으로써 한국천주교회의 새 역사가 시작되는 것은 헌종 2년(1836)의 일이었다.224)헌종 2년(1834)에 Maubant신부가 조선에 입국했고, 다음해에 Chastan신부 그리고 그 해 말에 제2대 교구장 Imbert주교가 입국하였다. 이후에도 박해정책하에서 전교성직자와 교인들의 희생자는 더 생겨나는 가운데, 조선교회를 이끌어 갈 책임주교와 전교에 헌신하여야 하는 조선교구 소속의 성직자가 계속 입국함으로써 조선천주교회는 성직자 중심체제로 바뀌게 되었다. 자율적으로 천주신앙을 깨우쳐 교회를 창설한 자생천주교회 당시와 성직자를 가지지 못한 무성직자교회로의 오랜 시기에 발휘되었던 조선교인들의 진취적이고 적극적인 신앙자세225)朝鮮天主敎會史上 박해기 100년간 성직자 없이 평신도만의 교회로 평신도지도자들이 교회를 영도한 기간이 매우 길다. 특히 그 시기가 교회 초창기와 큰 박해를 입은 후인 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교회창설(1784)∼周文謨신부 입국(1795)……11년간
辛酉박해(1801)∼劉方濟신부 입국(1834)……33년간
己亥박해(1839)∼金大建신부 입국(1845)……6년간
丙寅박해(1866)∼Blanc신부 입국(1876)……10년간
와 사회적·공동적 구원을 추구하던 신앙생활은 성직자들의 敎導權 주도하에 들면서 점차 퇴영적이고 순종적인 신앙자세로, 또한 그들의 천주신앙이 개인구령의 신앙으로 바뀌게 되었다.

 박해로 수많은 희생자를 내고 자신의 천주신앙이 곧 사생결단과 직결되는 절박한 사정임에도 불구하고 천주신앙을 봉행하는 서민대중층은 늘어나기만 하였다. 관료의 토색과 가혹한 수탈 그리고 특권층의 행패가 기승하는 세도정치하에서 현실생활의 고난을 강요당하며 삶의 희망을 잃을 수밖에 없었던 서민대중은 인간적 존엄과 사랑의 평등과 내세의 영생을 약속하는 천주신앙으로 기울지 않을 수 없는 당시의 사회경제적 모순이 그들로 하여금 천주교로 모이게 한 것이다.226)서민부녀층의 입교의 문제를 사회사·사회학적 관심에서 살펴본 연구로는 趙珖의≪朝鮮後期 天主敎史硏究≫와 盧吉明의≪가톨릭과 朝鮮後期社會變動≫이 참고가 된다. 천주신앙의 이질성에 저항을 느끼는 농촌서민층이「廣濟蒼生」·「後天開闢」을 내거는 東學으로 급격하게 모여드는 것과 같은 사회추세였다.

 헌종 원년부터 프랑스 성직자들은 계속적으로 해로를 이용하여 국내의 숨어 들어와 사생을 걸고 전교활동에 종사하였다. 그들은 포교를 위하여 교리서를 펴내는데 힘쓰는 한편, 외방전교회의 방침에 따라 本邦人성직자를 양성하기 위하여 신학생을 해외로 유학 보내기도 하면서 국내에도 신학교를 개설하였다.227)박해시대의 성직자 양성을 위한 신학교육활동
헌종 2년(1836) 金大建·崔良業·崔方濟의 마카오유학 파견.
헌종 3년(1837) 국내서의 速成神學敎育→丁夏祥·李文祐 등 수명의 신학생, 己亥迫害로 무위로 돌아감.
철종 6년(1855) 배론(舟論)神學校(忠北堤川郡鳳陽面九鶴里소재)의 설립운영, 고종 3년 丙寅迫害로 자연 폐교됨.
고종 22년(1885) 부흥골 예수성심神學校(京畿道驪州郡康川面釜平里소재)의 개교, 고종 24년에 서울 龍山으로 이동(현 가톨릭대학 신학부의 전신).
그리고 서구식민주의 열강의 침략적 접근정책에 따라「이양선」이 조선해역에 자주 출몰하게 되고 조선정부에 대한 그들의 군사적 통교요구가 거듭되는 가운데, 국내 척사위정세력의 위기의식은 더욱 고조되어 천주교도를「通外」또는「招寇」의 위험세력으로 몰아 계속적으로 박해를 가하였으니 교회의 수난도 가중되지 않을 수 없었다.

 철종 15년간은 비교적 박해가 잠잠한 소강상태에 들어가 있었다. 거기다가 세도정치의 모순이 보다 격화하는 당시의 사회동향이 상승되어 천주교세는 전국 각지로 파급되고 여기저기에 교우촌이 속속 생겨났다. 종래 교세가 미치지 못한 평안도나 남부 해안지대와 제주도에까지 교인을 찾을 수 있게 되었고, 그 수는 23,000여 명을 헤아리며, 국내에는 두 명의 주교와 10여 명의 신부가 비밀리에 활동하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고종 3년 최대의 박해인 병인박해를 맞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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