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5권 조선 후기의 문화
  • Ⅰ. 사상계의 동향과 민간신앙
  • 3. 천주교의 수용과 전파
  • 4) 역사적 변인으로서의 조선천주교
  • (2) 조선교회의 역사적 기능

(2) 조선교회의 역사적 기능

 천주신앙의 수용, 그리스도적 가치체계의 수용이 유교적 봉건체제에 변화를 촉구할 가능성을 지닌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그대로 강인한 조선 유교사회의 변화에 기능적으로 작용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 후의 교회 내외의 상황의 변화와 국가정책에 따라 제한적으로 조선사회에 작용할 수 있을 뿐이었다. 또한 그 작용은 기능적 측면과 역기능적 측면을 포괄하는 것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었다.

 조선교회가 추구해 온 역사적 기능을 변화의 측면에 초점을 맞추어 다음과 같이 네 단계로 나누어 고찰할 수 있다.

 첫째로 천주신앙의 수용과 교회 초창단계:이 단계는 앞의 항목에서 밝힌 바와 같이 조선 전통사회에 변화를 촉구할 새로운 신앙, 전통적 가치체계와 매우 이질적인 그리스도적 가치체계의 수용에 의한 역사적 변화의 가능성으로 등장하는 단계였다. 이 단계의 천주신앙인은 성리학적 봉건체제의 모순에서 탈피를 시도하는 실학적 양반지식인과 일부 중인지식층이었다.

 둘째 단계는 봉건적 유교집권세력에 의한 천주교 금압과 박해가 행동화되는 단계이다. 이 단계에서 補儒論的 한계에 직면하여 유교적 체질을 청산하지 못하는 양반지식인 교인들이 신앙일선에서 탈락하게 된다. 한편 집권세력의 금압·박해는 서학의 가치체계의 두 측면인 그리스도적 윤리와 신앙의「理」의 측면과 근대로의 발전에 유용한 서양의 과학과 기술의「器」의 측면을 구별하여 현명하게 선택적으로 대응하는 것이 아닌 전면적 거부와 말살의 박해로 격동하면서 천주신앙에 수반되었던 근대로의 발전 가능성은 싹을 삼제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즉 천주교의 박해와 수난으로 끝내는 것이 아니라, 당시 우리에게 필요한 선진의 과학기술을 선택적으로 취용하는 현명한 대책이 필요했던 것이다. 다가드는 식민주의침략의 위험성을 의식하고 민족사회를 수호하기 위한 斥邪政策과 더불어 근대화에 필요한 선진문명은 진취적으로 적극 수용하는 開化政策이 동시적으로 추진되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던 역사전개의 결과로 근대화는 뒷전으로 밀려나고 말았다.

 셋째 단계는 계속적인 박해에 따라 양반 지식교인이 탈락하고, 반면에 세도정치하의 봉건모순의 극대화에 허덕이게 된 농촌사회의 서민부녀자층의 입교가 활발하였고 신분체제 모순의 역리에서 벗어나려는 중인층의 천주교 입교와 중인지도자들이 교회를 영도하는 단계이다.

 이 단계에 서민대중층의 활발한 입교로 천주신앙이 사회 저변으로 확대되고 신앙지역의 전국 확산으로 천주교는 민중신앙으로의 자리를 굳히게 된다. 그들은 대천지군주로의「천주」에 대한 충·효의 원리 아래 전통적인 유교사회의 충과 효를 상대화하여 생각하고, 인간존엄·인간평등의 그리스도적 윤리의식을 받아들여 家父長制의 가족윤리와, 성리철학에 입각한 신분체제와, 유교적 강상윤리에 해석을 달리하면서 전통적 유교예속을 거부하였다. 이러한 사회적 행동양태는 유교적 집권세력으로부터 성리학적 지배체제의 파괴를 초래할 반역적 행위로 단정되어 혹독한 박해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그런 사회변동은 근대로의 이행을 촉구하는 민중의 역사적 진로를 따르는 기능적 의미를 지니는 매우 전진적 행동양태였다.228)조선 후기의 사회해체 상황과 서학관계를 사회사적으로 추구한 것으로 盧吉明의 앞의 책(1988)이 돋보인다. 반면에 서민대중의 신자가 증가하면서 그들의 입교동기나 신앙자세가 개인구복과 내세중심으로 퇴영화하게 되었음을 주시할 필요가 있다. 이미 살핀 바와 같이 박해가 거듭되는 가운데서도, 세도정치하의 가렴주구와 봉건수취의 강화 그리고 관료·세가의 횡포로 현세적 의욕을 상실하게 된 서민층이 내세지향적인 祈福信仰에 이끌려 다수 입교하게 되었던 것이다. 治病·祈福·得子 등 현세구복적 동기나 樂界·樂地·天堂을 가기 위한 내세지향적 동기에서 천주교에 입신한 사람들의 신앙이 개인구령의 신심생활로 흐르게 되어 역사의 변화와 무관한 사람도 적지 않았던 것이다.229)趙 珖은 이 무렵 천주교도들의 입신동기를 극명하게 추적하여 그 특성을 밝히고 있다(趙 珖,<初期信徒들의 天主敎認識>, 앞의 책, 1988, 102∼113쪽).

 이러한 퇴영적이고 소극적인 신앙자세를 일반화시켜 주는 조건으로 조선교구의 전도책임을 맡게 된 파리외방전교회 소속의 외국인 전교성직자들의 조선진출과 조선천주교회 영도가 크게 관계된다.

 파리외방전교회의 성직자들이 늘어나고 그들이 조선교회의 敎導權을 장악하게 됨에 따라, 앞서의 불타는 종교적 열성과 순교조차 마다하지 않는 신앙자세로 교회를 이끌어 왔던 조선 평신도지도자들은 성직자들의 교도권 아래 주체적인 자세에서 시종적 자세로, 창의적 활동에서 순종적 복종으로, 적극적·능동에서 소극적·수동의 신앙자세를 취하게 되었다. 한편 조선교회의 교도권을 쥐고 있던 전교성직자들은 그들 나름의 전교의욕과 방침에 입각하여 조선교회의 裁治權을 행사하고 신도들을 인도했던 것이다. 그들 파리외방전교회원은 신명을 다해 조선교회와 교인들을 돌본다 하여도 필경 그들은 외방인이었다. 그러기에 우리 민중의 고난과 아픔을 진정하게 느끼고 함께하는 데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또한 언어소통도 부자유스러우므로 조선사정과 사회를 이해하는데 한계가 있었다. 그러기에 그들에게는 열심히 믿고 솔직하게 순종하며 열심히 영생을 구하는 교인들이 가장 가깝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또한 ‘쯔아의 것은 쯔아로, 카인의 것은 카인에게로’처럼 敎俗을 엄격하게 이원화하는 전교회의 방침에 따라 교도들의 세속적 관계를 억제하여, 순종하고 기구에 몰두하며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교인이 반가울 수밖에 없었다.230)崔奭祐,<파리外邦傳敎會의 韓國進出의 意義>(≪韓國敎會史의 探究≫ Ⅱ, 한국교회사연구소, 1991), 237∼260쪽. 이러한 여러 가지 사정이 겹쳐 성직자의 큰 그늘 밑에 개인구령에 안주하는 교인들이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신앙자세는 자신의 구령을 위해 순교로써 영생을 택하여 종교적 열성을 발휘하는 많은 순교자를 내게 했다. 그러나 그 반면에, 그리스도적 가치의 사회구현이라는 사회적 기능과는 점차 거리가 먼 개인구복신앙의 자세가 굳어지면서 봉건사회 모순을 비판하고 도전하는 반봉건적 격동과는 거리가 생겨나지 않을 수 없었다. 조선천주교회는 차차로 각박한 현실문제, 모순의 사회문제를 외면하고 역사의 변화에 둔감해져 사회적 고민과는 거리가 생겨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상과 같이 조선천주교회는 단계적으로 역사의 변혁인소 즉 변성요인으로서의 역할을 담당하는 조직과는 거리가 멀어지게 되었다. 그리스도교는 서구사회에서 발전한 종교요, 서양중세의 정신적 기반이었다. 그러나 그리스도신앙이 변질은 인간의 존엄, 인간의 평등과 사랑의 공동의 가르침과 하느님의 정의의 가치체계였다. 이 점에서 근대를 지향하는 자유·평등·박해의 인간의식과 합치되는 면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기에 이기철학에 기반한 인간과 사회의식을 극복하고 봉건적 현실모순을 타개함에 현재적 기능(Manifest Function)까지는 담당치 못하였다 해도 잠재적 기능(Latent Function)을 수행하게 되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231)사회학자 Robert K. Merton이 사회분석의 도구로 제시한 개념이다(Robert K. Merton, Social Theory and Social Structure, New York, Free Press, 1996, pp. 51∼64). 그러기에 유교적 봉건지배자들은 그들의 봉건체제를 수호하기 위해 천주교 박멸에 나서 한국천주교에 많은 희생을 강요했던 것이다. 그런 가운데서도 유일신에 대한 믿음, 인간존엄과 평등의 깨우침, 봉건신분제 모순과 남녀차대의 모순을 깨우쳐 주고 한글보급에 의한 서민층의 문화적 계몽 등으로 근대화를 촉진시키는 기능을 수행하면서 한국사의 변화와 발전을 촉구하는 일에 조용하게 작용하는 변성요인의 구실을 한정된 범위에서나마 수행해 왔다고 할 것이다.

<李元淳>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