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5권 조선 후기의 문화
  • Ⅰ. 사상계의 동향과 민간신앙
  • 4. 불교계의 동향
  • 5) 국가적 활동
  • (1) 승정의 추이

(1) 승정의 추이

 사명대사 惟政을 필두로 임진왜란의 국가적 위기를 이겨내는데 크게 공헌한 승군들의 힘은 이제까지 저급한 사회신분으로 처우되던 승려들의 지위를 일약 국가로부터 공직의 승인을 받은 당당한 지위로 격상시켰다. 이를 위한 불교시책은 관료들의 반발로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으나 승군들의 현실적 필요성으로 인해 일단 선조 26년(1593) 3월에 유정을 비롯하여 전공을 세운 승려에게 승과를 수여하도록 명시하였고,284)≪宣祖實錄≫권 36, 선조 26년 3월 임오. 8월에는 팔도 각처에 摠攝을 2인씩 두고 그 총지휘자로 도총섭을 두도록 정착되었다. 그리고 인조 2년(1624)부터 3년간에 걸쳐 남한산성을 수축하는데 碧巖覺性이 도총섭이 되어 승도를 이끌고 사업을 완수한 이후에는 開元寺·漢興寺·國淸寺·長慶寺·天柱寺·玉井寺·東林寺·靈源寺·望月寺 등 9개 절에 350명의 의승군이 주둔하도록 하였다. 이를 토대로 숙종 37년(1711) 4월부터 9월에 걸쳐 서울의 방위를 위해 북한산성을 수축하고 나서는 산성 안에 重興寺·龍巖寺·輔國寺·普光寺·扶旺寺·元覺寺·國寧寺·祥雲寺·西巖寺·太古寺·鎭國寺 등 11개 절을 두어 鎭護영찰 겸 僧營으로 삼았다. 이렇게 하여 남북한산성에 1년에 6차례씩 의승 350인을 상번케 하고 각 절에 首僧 1인과 僧將 1인을 두며 전체를 총괄하는 승영 승대장 1인을 두어 八道都摠攝을 겸임하게 하니, 이 의승들은 승려 본분의 간경과 승군으로서의 연무를 겸행하면서 왕성수호를 담당하였다.285)李能和,≪朝鮮佛敎通史≫하(新文館, 1919), 832∼833쪽.

 그러나 제한적인 활동 인정과는 달리 일반적인 상황은 여전히 불교계의 활동을 억제하는 것이 기본시책이었다. 영조 25년(1749)에 사헌부의 요청에 의해 이미 금지해 오고 있는 尼僧의 도성출입을 다시금 금지하는 것이 이를 말해주는데, 이는 또 그와 같은 금령에도 불구하고 일반인들의 종교적 요구와 관련하여 승려들의 도성출입이 실제로는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한편 영조 29년에 講書院에서≪능엄경≫이 나왔는데 이는 왕세손에게 가르칠 도가 아니라서 중흥사에 보내도록 하였다는 기사가 보인다.286)李能和, 위의 책, 843쪽. 이는 후에 정조가 되는 왕세손을 중심으로 왕실 안에서 경전을 읽을 만큼 불교신앙이 이어지고 있음을 알게 한다.

 이 시기에 들어 논란이 된 것은 남북한산성의 군역문제였다. 모두 700명의 규정승군을 확보해 윤번으로 수호하게 하는 것은 승려들에게 크나큰 부담으로서 이를 호소하는 사례가 늘어갔다. 이에 따라 영조 32년에는 防番제도를 혁파하여 原居僧으로 하여금 雇價를 받고 방번을 대립하게 하고 일반승은 방번전을 납부하도록 하여 그 폐해를 고치고자 하였다. 방번전은 지역에 따라 다르게 책정하여 경기는 1인당 10냥씩인데 비해 전라·경상은 22냥씩으로 정하여 전라·경상 양도의 책정액이 전체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였다.287)禹貞相,<南北漢山城 義僧防番錢에 대하여>(≪朝鮮前期佛敎思想硏究≫, 동국대 출판부, 1985), 312·328쪽.
1인당 定額은 논자에 따라 차이가 있으나 義僧防番錢 變通節目에 따른다.
이는 영조 12년 봄에 북한산도총섭이던 護岩若休(1664∼1738)가 방번전을 건의한 것에 따른 것으로, 이 때부터 산성에서 수호하는 승병은 常傭兵이 되어 연 17냥씩을 지급받아 의식을 마련하며 임무에 종사하도록 하였다.

 영조 44년에는 각도의 사찰 중에 궁방의 願堂이라고 칭하는 사원을 혁파하도록 하였고 영조 46년에는 왕릉 주변에서 사찰을 창건하는 것을 금지하였다. 원당은 왕실을 중심으로 한 고위 가문들이 妃嬪·夫人·王子·宗室 등의 위패를 봉안하고 齋를 올려 조상의 명복을 비는 데서 시작한 것이었다. 그런데 점점 위패 봉안의 범위가 유력자층에까지 확산되고 여기에 사원측에서도 공공기관이나 지방세력가의 침탈로부터 사원을 보호하기 위해 원당으로 지정받고자 적극적으로 노력함으로써 극성을 보이게 되었다. 따라서 집권층과 연결되어 이들의 정치적·경제적 지원을 받고 있던 원당 모두를 없애는 데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정조는 즉위하여 원당혁파 등 불교계의 활동을 제한시키는 조처를 내렸다. 곧 즉위년(1776)에는 各司·各宮房의 원당을 일체 혁파하도록 하였는데, 원년과 6년에도 다시 논의되는 것을 보면 원당혁파는 실효를 거두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288)≪正祖實錄≫권 1, 정조 즉위년 6월 계축;권 6, 정조 2년 7월;권 13, 정조 6년 6월 정묘. 특히 원년에는 원당의 혁파와 관련하여 원당이 승도들에게 과도하게 부과된 官役으로부터 사원을 보존하기 위한 계책이었음을 인정하고 지방관청의 사원침탈도 엄금하도록 하는 것이 주의를 끈다.289)高橋亨,≪李朝佛敎≫(寶文館, 1929), 749∼752쪽.

 이러한 정조대의 사원에 대한 인식은 의승군에도 이어졌다. 정조 9년(1785) 5월에는 의승 한 사람으로 한 사원의 재력이 기울고 사찰에 대한 관부의 주구가 가혹하여 승려들이 줄어들어 의승의 除番錢이 부족하므로 화폐징수를 반감하여 각 도별 사찰에 할당 징수하도록 하였다.

 정조 10년 공조참판이 妙香山에 예전에는 사찰이 많았으나 지금은 머무르는 승려도 적고 사찰이 조락한 것이 지역과 감영 본관의 요구임을 지적하는 상계를 올린 것이나, 정조 12년에 건봉사의 궁납잡비가 면세토지 소출의 10배나 되니 탕감해 주어야 한다면서 궁납의 폐단은 중앙에서 그리고 관납의 폐해는 각 도에 대한 신칙에서 가능함을 밝히고 있는 것들290)高橋亨, 위의 책, 745∼749쪽.은 이 시기 사원의 경제상태가 극도로 어려웠음을 말해준다.

 정조는 왕세손으로 있을 때≪능엄경≫을 읽었다는 데서 보는 것처럼 불교에 대한 이해가 깊었다. 정조 12년에는 仙巖寺에 中使를 파견하여 백일기도를 올렸고, 2년 후에 순조가 되는 왕자가 태어나 그 후에 선암사에 혜택을 내렸다. 그리고 정조 14년에는 억울하게 돌아간 생부 莊獻世子의 顯隆園을 수원에 새로이 조영하고 그 修福寺로 龍珠寺를 창건하였다. 남한도총섭 寶鏡獅馹을 팔도대화주로 삼아 건립한 용주사는 蔡濟恭이 지은 상량문에 보이는 것처럼 정조의 신앙이 깊게 배어난 결정체로서 효행의 상징이 되니, 정조가 친필로<奉佛祈福偈>를 써서 용주사에 보장한 것도 마찬가지 의의를 지닌다. 같은 해에 정조는 釋王寺에 스스로 비문을 지은 生男 기원성취 감사비를 건립하고 토지를 기부하였으며, 정조 16년에는 조선을 개국할 당시 불교계의 지도인사인 무학·나옹·지공에게 시호를 가증하기도 하였다.

 19세기에 들어서도 사원에 대한 제한은 지속적으로 시행되니 순조 15년(1815)에 巫覡과 僧徒의 성내 출입을 금지하는 장계가 올려진 것이 이를 말해준다. 이는 계속된 금제에도 불구하고 尼僧들이 성내에 드나들고 사찰에서 기도와 設齋가 빈번하게 이루어지고 있음을 반영하는 기록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시기의 전반적인 집권력의 쇠약과 기강의 해이에 따라 관가의 부패가 만연하고 이는 사찰에 대한 주구가 더욱 극심해지는 결과를 초래하여 사원의 황폐를 가속화시키게 된다.

 이 시기 사원에 대한 관가의 공납 주구는 자심한 것이었다. 일찍이 현종대에 白谷處能(?∼1680)의 상소에서 楮紙와 잡물의 진납폐해를 확인할 수 있지만, 도첩제가 폐지된 이후 승려는 還俗編戶의 특별한 관리대상이었기 때문에 관청의 무리한 요구를 수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찰에 대한 과세는 감사와 군수·현감 등 지방수령이 매기는 것이 중심이었지만 궁중·궁가에서 요구하는 진상물도 주요한 부담이었다. 본래 사찰내에 왕족 등의 위패를 봉안하고 재를 올리는데 궁중에서 미곡이나 화폐·비단 등을 하사하여 그 비용에 충당하도록 하였고 이에 대해 사원은 거기서 제조하는 물품이나 명산물을 진상하는 것이 인사였는데, 이것이 점차 의무가 되고 심지어 궁가와 내수사에서 사찰에 과세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18세기 말의≪賦役實摠≫에 합천에서 사찰에 부과한 공납이 짚신(草鞋)·松花·버섯(石茸)·紙物 등이며, 창원에서 부과한 것이 가죽신(白鞋)·草鞋·새끼줄(細繩)·紙物 등이라 하는 것291)윤용출,≪조선후기의 요역제와 고용노동≫(서울대 출판부, 1998), 140쪽.이나 紙地·繩鞋가 사원의 고역이라는 정조 14년의 기록들이 이를 말해준다. 그리고 19세기 초에 통도사에 부과된 잡공은 麻繩·杻骨·松花·伐木·路資·酒·草鞋 등이었다. 또 철종 2년(1851)에 작성된 法住寺 完文에 의하면 법주사는 원종의 원당이요 순조의 태실을 모셨으며 宣禧宮의 원당으로서 이들 궁가의 주구가 더욱 심화되어 사원이 퇴락하고 승도가 조락하는 지경에 이르렀기에 대왕대비의 교시에 따라 공명첩 5∼6백장을 내려주어 사찰을 수리하도록 하고 있다. 동시에 禁飭細目을 규정하여 사원의 침탈을 막도록 하였으니, 그 주요한 내용은 의승 등의 승역과 제반 잡역을 모두 면제하고 산과·산채 등 산중에서 나오는 특산물의 본읍과 향교·서원·향청 및 군사·사령 등에 대한 공납을 없애며, 사대부집안이나 노니는 사람, 지나는 길손들이 요구하는 松茸·木筇·繩鞋·素饌·山果·山菜 등도 일체 엄금한다는 것들이었다.292)高橋亨, 앞의 책, 852∼857쪽. 배경 있는 큰절인 법주사의 실상이 이와 같을 때 여타 사원의 부담이 어떠했을지는 곧 짐작할 수 있다.

 이와 같은 공물의 상납을 위해 사원에서는 여러 유형의 산업이 성행하여 평강 浮石寺의 미투리생산과 같이 분업적 수공업으로 발전한 예도 생겨났으며, 제지·목축·채소·과실·산과 등의 산물을 생산하여 장시에 판매함으로써 사원을 유지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사원의 계조직을 통해 고갈된 사원운영비를 마련하고 전답을 조성하는 補寺활동이 전국적으로 이루어졌다.293)金甲周,<朝鮮後期 僧侶의 經濟 活動>(≪朝鮮時代 寺院經濟 硏究≫, 동화출판공사, 1983). 補寺활동은 신도들의 미타지장계나 승려들의 갑계, 문중 어산계 등은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초에 등장하여 18세기 후반에는 사원의 보수에 주된 목적을 두었으나 19세기 후반에는 전답을 마련하거나 금전을 사원에 시납하는 형태로 변화하였다.294)李載昌,<朝鮮時代 僧侶 甲契의 硏究>(≪佛敎學報≫13, 1976). 이 시기의 승려들은 사원에서 익힌 능력을 가지고 지류 등 공물생산이나 은광의 채굴 그리고 목공·석공·畫僧으로서 또는 잡역부로서 각종 사업장에서 활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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