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5권 조선 후기의 문화
  • Ⅰ. 사상계의 동향과 민간신앙
  • 5. 민간신앙
  • 1) 도교·도참신앙
  • (2) 새로운 도교신앙의 형성

(2) 새로운 도교신앙의 형성

 조선 후기에는 도교의 한 변태라고 할 수 있는 ‘三帝君 信仰’이 유행하였다. 삼제란 關聖帝君(蜀漢의 關羽), 文昌帝君(또는 梓潼帝君, 晋의 張亞), 孚佑帝君(唐의 呂純陽)의 三聖을 말한다. 이 세 사람은 신선이 되어 천궁으로 올라가 제군의 자리에 앉아서 하계 인간의 선악을 감시하여 화복을 내리는 존재로 받아들여졌으며, 그 중 관우를 至上至尊으로 섬겨 ‘三界伏魔大聖關聖帝君’으로 불렀다. 장아는 科擧의 司部神으로서 ‘司祿職貢擧眞君’이라 하였으며, 여순양은 모든 소원을 성취시키는 ‘四生六道’라 하였다.

 조선에서는 선조 30년(1597)에 명나라 도독 陳璘이 전라도 강진현의 古今島에 관왕묘를 창건하였다.300)이것은 숙종 10년(1684)에 수리되었고 그 곁에 따로 사당을 세워 진도독을 주향하고 忠武公 李舜臣을 배향하였다. 같은 해에 경상도 성주목에다는 명나라 장수 茅國器가 관왕묘를 창건하였다. 선조 31년에는 명나라 眞定營都司 薜虎神이 경상도 안동부에다 관왕묘를 세우고 석상을 봉안하였다. 선조 32년에는 명나라 도독 劉綎이 전라도 남원부의 성 서문 밖에다 관왕묘를 세웠다.301)이것은 숙종 42년에 중국제도를 모방하여 다시 세워졌다.

 이상의 관왕묘들은 삼제신앙을 가진 명나라 무신들이 임란을 계기로 이 곳에 오면서 설립한 것들이다. 그러나 조정에서도 난을 겪으면서 이러한 신앙을 수용하여 선조 32년에는 南關王廟를 숭례문 밖에 건립하였고, 선조 35년에는 동관왕묘를 동대문 밖에 건립하였다. 柳成龍은 그 본말을 적었고 許筠은 왕명을 받아 顯靈碑文을 지었다.302)李 瀷,≪星湖僿說≫권 9, 人事門 關王廟.
≪增補文獻備考≫권 64, 禮考 11, 諸廟 關帝廟.

 숙종 17년(1691)에는 임금이 능에 거둥할 때 송나라 태조가 관우묘를 지나는 길에 들렸다는 고사를 인용하여 동관왕묘에 역림하였다. 또 숙종 37년에 각 도에 명하여 제사의식을 宣武祠의 예에 따라 정하게 하고 매년 驚蟄과 霜降에 향과 축문을 보내어 해당 도에서 제사지내게 하였다. 선무사란 도성문 太平館 서쪽에 있던 것으로 명나라 병부상서 楊鎬를 제향하던 곳이다. 영조 3년(1727)에는 임금이 관왕묘에서 재배례를 행하였다.

 관왕묘에서는 5월 13일 관우의 생일에 대제를 열었다. 나라에서는 國祭로서 매년 봄 경칩일과 가을 상강일에 제사를 지냈는데, 영문의 대장으로 제관을 삼았다. 도시의 남녀들도 이 곳에 와서 기도하여 향불 태우는 행렬이 일년 내내 그치지 않았다고 한다. 또 시전 상인들도 관우를 신봉하여 재물신으로 삼고 종로 보신각 옆 中廟에 塑像을 모셨다. 10월 상달에는 상가에서 남묘에 고사를 지내고 재운을 빌었다.

 고종 20년(1883)에는 왕명에 의해 관왕묘를 宋洞에 세우고 제반 절차는 동묘와 남묘의 예에 따랐다. 이 때 세운 관왕묘를 북묘라고 한다. 이후 전라도 전주에도 관왕묘가 세워지는 등 관성신앙은 조선 후기 상당기간에 걸쳐 유행하였다.

 민간에서는 善陰騭敎의 영향이 컸다. 중국에서는 송나라 이래 삼제군을 신봉하여 災祥과 禍福을 이들에게 기원하였는데, 그 중 관우를 가장 높이 신봉하는 선음즐교가 생겨났다.「음즐」이란 하늘이 은밀히 인간의 행위를 관찰한 후에 화복을 내린다는 뜻이다. 우리 나라에서는 이것의 영향을 받은 신앙으로 60일에 한 번씩 행하는 ‘守庚申’ 또는 ‘庚申守夜’의 풍습이 있었다. 이것을 지키는 사람들은 인체 안에 三尸蟲이 있어 경신일에 몸을 빠져나가 천제에게 악행을 고한다고 믿고 이 날 밤을 지샌다. 궁중에서도 이 행사가 수백년간 내려오다가 영조 때에 와서 폐지되었다고 한다.303)李能和,≪朝鮮道敎史≫23장 (李鍾殷 譯, 普成文化社, 1989, 271∼273쪽). 민간에서는 이러한 습속이 삼시충신앙과 竈神신앙으로 널리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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